미완성·무형지독
잔월이 격공으로 철문을 열어 위로 올라갔다. 당한백이 바닥에 손을 대고 한참 가늠하더니 진법이 회복했다고 말했다.
넷은 지도에 적힌 방법대로 움직여 서북쪽 귀퉁이에 도착했다. 당한백은 기관에 관한 지식이 대단했다. 아주 손쉽게 기관을 발견하고 여는 방법까지 알아냈다.
기관을 발동하니 빗장이 열렸다. 문 양쪽에 빗장 여러 개 있어서 어느 쪽에서든 기관을 모르면 열기 힘든 문이었다. 여러 겹으로 만든 문은 무척 두껍고 튼튼해서 내공으로 깨뜨리려면 반나절 이상 걸릴 것이다.
"무곡산장은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병장기 부딪히고 악다구니 지르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정확히 가늠할 순 없지만, 고작 수십 명이 낼 만한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여기보다 더 안전한 곳이 없을 거요. 무곡진도 있고 일부러 함정을 파서 유인할 계획도 있었고."
당한백의 대답에 잔월이 말을 이었다.
"곤륜처럼 인적이 드문 곳에서 대규모로 움직이면 들킬 가능성도 크고. 평소에야 상관이 없겠지만, 지금은 원 황실에 소림사를 비롯한 여러 세력이 주시하고 있으니."
청강은 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계속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았다.
"설마 여기서 결사 항전할 생각은 아니겠죠? 다른 데는 몰라도 소림과 원 황실은 고수를 많이 데려왔는데."
"금선탈각인가?"
당한백이 중얼거렸다. 수백 명 무인을 미끼로 던지고 공손가 직계들만 몰래 도망칠 수도 있다.
"그건 아닌 것 같소. 무극존자 코털도 건드린 놈들인데. 소림이나 원 황실이 두려워서 부하들을 다 버릴 것 같진 않소."
"포자처럼 이상한 무공을 익힌 자가 수십 명이면 몰라도."
비록 기습이라곤 하지만, 포자의 일격에 목숨을 겨우 부지했다. 백화만개가 고산종 수법에 알맞은 수비법인 것도 있고 당한백의 성취가 높아 혈도가 튼튼한 덕도 컸다.
기습이 아니라고 가정하면 포자의 무공 성취로는 당한백 옷깃도 못 스친다. 아무리 강한 내공을 쓸 수 있다고 해도 초식까지 정묘해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런 강한 힘을 쓰는 자가 수십 명이고 적당한 진법을 구성한다면 위력이 어마어마하다. 가장 단순한 삼재진만 해도 서로 공격과 수비를 보완하여 대단한 위세를 떨칠 수 있다.
"우리 목적은 물건 찾는 것이오. 잊지 마시오."
칠신병이 봇짐에서 칼과 검을 꺼내 들고 콧구멍을 벌름거리자 당한백이 가볍게 충고했다.
"찾는 물건을 말해주면 우리도 주의를 기울여보겠소."
당한백이 잠깐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미완성의 무형지독이오. 웬만큼 독에 관해 잘 알지 않고 기운을 느끼고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지 않으면 건드릴 수도 없소. 미완성이어서 해약도 없소."
당한백은 품에서 가죽 장갑 한 켤레 꺼냈다.
"이걸 쓰면 나 정도 수준도 만질 수는 있소. 그러나 다루는 건 꿈같은 얘기요. 무형지독은 붉은 까마귀 뼈를 갈아서 만든 작은 병에 가루 형태로 보관하오. 병은 붉은색 혹은 자색으로 보일 거요. 그냥 두면 안 되고 최소한 이만큼 큰 술독에 독한 술 가득 채우고 그 안에 넣어 보관해야 하오. 술을 자주 갈아줘야 하기에 아주 은밀한 곳엔 숨기지 않을 것이오."
문을 지나 통로를 따라 조금 걸으니 사다리가 나왔다. 사다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니 사방이 벽인 밀실이었다. 당한백이 또 망치를 꺼내 여기저기 두드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만 열 수 있는 기관이오. 흑 장로가 수고 좀 해주시오."
잔월은 당한백이 가리킨 벽에 귀를 대고 지청술을 펼쳤다. 잔월이 뿌린 내공이 온갖 소리를 귀에 전달했다.
잔월과 당한백은 일각 정도 대화로 기관을 여는 방법을 상의했다. 당한백의 도움으로 잔월은 돌아오는 소리가 무슨 의민지 대충 알았다. 기관의 용도를 파악하니 당한백이 알려준 방법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그럼 열어보겠소."
잔월은 열두 개 외혈을 벽 너머에 만들었다. 그러나 자꾸 실패하는 바람에 반 각이나 헤맸다.
"잠깐 멈추시오. 누가 접근하오."
넷은 황급히 기척을 지웠다. 잔월은 기척 지우는 게 어설픈 칠신병과 청강을 도왔다. 당한백이 살짝 놀라며 허공에 아미 두 글자를 적었다. 잔월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천희연한테 배운 기척 감추는 법을 한눈에 알아본 걸 보니 당한백도 아미와 꽤 가까운 사이 같았다.
"어찌 된 일이냐? 계획과 너무 다르지 않으냐?"
잔월은 허공에 공손무기 네 글자를 적었다. 화가 잔뜩 치민 목소리는 공손무기였다.
"놈들이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한백이 바라보자 잔월은 고개를 저었다. 기억엔 없는 생소한 목소리였다.
"무슨 소리냐?"
"평소 무곡신공을 못 펼치게 제한했습니다. 그런데 몰래 펼쳐본 것 같습니다."
"막내야. 무공 연구하느라 요새 좀 소홀한 것 같다."
"죄송합니다. 형님."
잔월은 허공에 공손용기 네 글자를 적었다. 공손무기를 질책한 건 일면식이 있는 공손용기였다.
"이대로면 양패구상이다.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잔월 손가락이 허공을 화려하게 수 놓았다. 짧은 대화로 상황을 대충 짐작했다.
무곡신공을 수련하고 펼치면 급속히 노화한다. 아마 평소엔 무곡신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거나 사용 횟수를 제한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무인들이 지시를 어겼다. 정작 강적과 맞서 싸워야 할 때 급격히 늙어버렸다. 무곡산장 계산과 달리 훨씬 큰 대가를 치러야 할 듯했다.
"체질이 적합한 자들을 모아 처음부터 가르치려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진우량이 주원장 공격하려고 배를 수백 척 건조한다는데. 그 시간에 맞춰 지원해야 할 거 아냐."
공손용기의 질책에 공손무기는 대꾸를 못 했다.
"그래.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
머리 쓰는 일엔 공손무기가 적임자였다. 질책은 질책이고,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하고 결정하는 건 여전히 공손무기였다.
"이대로 물러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소림이나 원 황실은 몰라도 남은 자들에겐 본때를 보여줘야죠."
"가주. 급한 소식입니다."
익숙한 홍야차 목소리였다.
"말해라."
"완아 아씨가 사라졌습니다."
"한꺼번에 말해. 눈치 보지 말고."
공손무기가 역정을 내자 홍야차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극환허인 상편도 사라졌습니다."
홍야차는 체질이 맞지 않아 무극환허인을 익히지 못했다. 충성심도 깊은 자이고 아무 연고도 없는 놈이어서 무극환허인을 지키기에 적합했다.
"네 거 훔쳤냐?"
공손용기가 질문했다.
"아닙니다. 전 늘 품에 넣고 다닙니다."
"나도 늘 품에 넣고 다니니 그림으로 된 상편을 훔쳤다는 말이겠구나."
"잠깐 보려고 했던 걸 수도 있습니다. 좀 더 찾아보겠습니다."
홍야차 말에 공손무기가 화를 버럭 냈다.
"그년은 내 씨도 아니니 감쌀 거 없다. 진짜 무극환허인 훔쳐서 도망간 거면 데려올 필요도 없다. 그냥 죽여서 머리만 잘라와."
홍야차가 경공을 펼쳐 떠났다.
"절반 남겨서 싸우게 하고 남은 절반을 데리고 빠집시다. 남은 자들은 소림과 원 황실보단 위지나 하후 그리고 팽가 따위와 싸우라고 하겠습니다."
상처뿐인 영광은 영광이 아니다. 그건 허영이다. 어차피 흔적 지울 시간을 벌려면 절반 정도 희생해야 한다. 공손무기는 어차피 희생할 절반을 효율적으로 써먹을 방법을 생각해내고 과감히 실행했다.
- 벽 부술 수 있소?
당한백이 허공에 글씨를 써서 질문했다. 잔월은 고개를 저었다. 단번에 하기엔 너무 든든하고 외혈로 음양을 바꾸는 방식으로는 시간이 걸린다. 굳이 고수가 아니어도 눈치챌 가능성이 크다.
공손무기가 심복들에게 연신 지시를 내렸다. 심복들이 지시를 수행하러 하나씩 떠났다. 어느덧 다 나가고 공손용기와 공손무기만 남았다.
"무기야. 멸세교 가자."
"형님. 거긴 진짜 마지막 수단입니다."
"무극존자가 비급에 손을 쓴 게 틀림없다. 멸세교가 답이다. 우린 무극환허인 얻기 전보다 더 약해졌다. 남은 전력도 두세 번 쓰면 사라진다."
잔월과 당한백뿐 아니라 칠신병과 청강도 놀란 눈으로 서로 바라봤다. 밖에서 공손무기가 엉엉 소리 내 크게 울었다.
강호에 확실하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개방이나 당문 정도면 무곡산장이 얼마나 강한 세력인지 잘 안다. 그리고 무곡진의 범위나 기관의 위력 그리고 보관소의 비급만 봐도 무곡산장이 얼마나 대단한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런 가문의 가주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잘못 아니다. 그리고 끝난 것도 아니니 낙심하지 말아라."
"사천 년 이어져 온 가문인데. 여기서 끝나면 안 되는데."
공손무기는 꺽꺽거리며 한참이나 더 울었다.
"사람이 없소."
당한백이 입을 열자 청강과 칠신병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혹시 들킬까 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고수여서 숨 좀 덜 쉰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지만,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벗어나며 습관적으로 심호흡했다.
'사천 년이나 더러운 짓 해왔어? 내가 하늘을 대신해 너흴 끝장내겠다.'
딸깍 소리와 함께 벽이 비스듬히 열렸다. 조심스럽게 밖을 살피니 싸움과 도주로 무척이나 분주했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당한백이 잔월에게 도움을 청했다.
"흑 장로가 원하는 건 어디 있는지 이미 알고 있소. 내가 추적술로 저들 종적을 꼭 찾아낼 테니. 먼저 무형지독을 찾아주길 바라오."
당한백 말이 사실이라면 무형지독으로 누구든 죽일 수 있다. 그 대상이 무극존자라면 무곡산장이 다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고 활개 칠지도 모른다.
"이건 내가 전문이다."
칠신병이 코를 벌름거리며 술 냄새를 찾았다. 코로 천리향 냄새도 맡는 칠신병이기에 술 냄새 따위는 너무 쉬웠다.
칠신병이 찾아낸 술 창고에는 술독이 천 개 정도 있었다.
"최소 이만큼 큰 술독이어야 하오. 아무리 독한 술이어도 양이 적으면 독 기운을 재우지 못하오. 그러니 작은 건 지나치시오."
신중하게 당한백이 말한 것보다 조금 작은 술독들도 일일이 확인했다. 그러나 무형지독은 그림자조차 없었다.
"이번엔 당 대협이 우릴 도와야겠소. 공손무기를 생포해 나는 무극환허인 비급을 없애고 당 대협은 무형지독 행방을 알아내는 거요."
당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지엔 건물이 수백 채 있었다. 그 많은 건물을 일일이 뒤지는 건 어려운 일이다. 가능성이 가장 큰 본채 술 창고에 없으니 공손무기를 잡아 묻는 게 최선이다.
"내게 정신을 어지럽혀 질문에 대답하게 하는 약이 있소. 혹시 알고 싶은 거 있으면 흑 장로도 미리 생각해 두시오."
未完成 완성되지 않아서
無形至毒 더 무서운 무형지독
- 작가의말
당한백이 살짝 놀라며 허공에 아미 두 글자를 적었다. 잔월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한눈에 알아본 걸 보니 당한백도 아미 같았다.
“팬클럽 2기요. 남자 아이돌이라서 입덕이 늦었소.”
“선배시군요. 전 3기입니다. 요새 1집부터 복습하느라 정신없습니다.”
“초반엔 다들 그것 때문에 고생이지. 싱글뿐 아니라 예능에서 잠깐 불렀던 노래라도 모르면 대역죄인 취급한다니까.”
“가끔 한국 노래 저보다 잘하는 외국인 만나면 자괴감 듭니다.”
“연검정화는 잘하고 있겠지?”
“그럼요. 양의심공으로 컴퓨터 여러 대 놓고 동시에 작업합니다. 캐시 삭제하고 아이피 바꾸고 네크웍카드 맥 어드레스도 수정하면서 하루에 20시간 합니다.”
“이거 선배 체면이 말이 아니군. 정말 1기 같은 3기야. 난 만천화우로 피시방 돌아다니며 한꺼번에 작업하는데, 후배가 나보다 훨씬 나은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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