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축소
"자네 혹시 그 얘길 들었는가?"
"그 얘기가 뭔지 말해야 들었는지 말았는지 알 게 아닌가."
허기를 채우는 객잔이 아니라 술 마시는 싸구려 주점이었다. 평소엔 몇몇 주정뱅이가 술잔을 가운데 놓고 이긴 놈이 술 마시기 내기를 했는데 요샌 자리가 없어 서서 마시는 손님까지 생길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화산파 장문인이 검선 어르신 아니라네."
"아니, 자네 그 얘기 확실한가?"
"확실하고말고. 내 사촌이 돌 목수잖아. 화산파 건물 지으면서 들었는데 검선 어르신은 장로인가 뭔가 하신다네."
"그럼 설마 옥면금강이 장문인 하는 건가?"
"옥면금강은 아직 약관도 안 됐다고 들었는데."
그때 가까운 곳에 서서 술을 마시던 삿갓 깊숙이 눌러쓴 사내가 둘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대화 중에 미안한데 옥면금강은 누구요?"
대화하던 두 사내는 갑자기 끼어든 사내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허리에 무기를 찬 걸 보니 강호인인 듯했다.
"멀리서 오셨나 보오?"
"토번에서 왔소."
"소년 영웅이 완안덕명을 물리친 일은 들었소?"
"서안에 온 지 사흘밖에 안 됐소."
서안 토박이 사내는 토번에서 온 사내에게 옥면금강이 검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완안덕명을 물리친 이야기를 들려줬다.
"세상에 그런 무공이 있단 말이오?"
토번에서 온 사내는 검에 강기를 두른 완안덕명을 옥면금강이 무형지기로 쓰러뜨렸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나도 얻어들은 거요. 그런데 열이면 열 이렇게 말하는데 안 믿기도 힘들지 않겠소?"
"내가 비록 중원엔 첫 발걸음을 하는 거지만, 완안덕명이라는 자는 무공이 명성에 못 미친다고 들었소. 그런 자가 검기성강의 경지를 이뤘다는 것도 믿을 수 없고 약관도 안 된 소년이 무형지기를 다룬다는 말도 믿을 수 없소."
"검기성강이야 수천 명이 봤으니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일이오. 무형지기야 눈에 안 보이는 거라니 우리도 그저 소문 듣고 그런가 보다 하는 거요."
'독공이 틀림없다. 독편복 제자나 본인이 분명하겠군.'
토번에서 온 사내는 중원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벌써 독편복 종적을 찾은 듯하여 기분이 좋아졌다.
"좋은 얘기 들었으니 보답으로 술 한 병 드리지. 소이, 여기 화주 한 병 올려라."
옥면금강이라는 자를 하루빨리 찾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술을 쭉쭉 들이켰다. 중원은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옥면금강이라. 어떤 놈이 남의 귀한 제자 별호를 이따위로 지은 거야."
술을 좋아하는 월영고랑의 고집을 못 이겨 화산으로 가기 전에 주점에 들렀다. 그리고 잔월은 처음으로 자기 별호를 들었다.
"금강은 귀신 잡는 흉악하게 생긴 놈들인데."
"사부. 금강은 번개가 아수라 머리를 때려서 만들어진 절대 부서지지 않는 보석입니다. 굳건함을 뜻하는 불가의 용어죠. 사대천왕을 사대금강이라고도 하는데 그것 잘못된 호칭입니다."
아미산에 있을 때 압호 스님과 고기를 뜯으며 적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다. 압호 스님은 지루한 불교 경전을 이야기처럼 재밌게 들려줘서 쌍둥이한테도 인기가 좋았다.
옥면금강을 꼭 찾겠다고 다짐하며 술을 물처럼 마시는 사내를 뒤로하고 월영고랑과 잔월은 화산으로 향했다.
개파식까진 시간이 넉넉하여 서두르지 않고 서안을 구경하며 천천히 걸었다.
"나으리, 적선 좀 하십쇼."
갑자기 거지들이 몰려와서 돈 달라고 성화였다. 보통 무기를 패용한 사람은 성질이 더러운 자가 대부분이어서 거지가 피한다. 거지를 재수 없다고 여기는 풍조가 강하여 성격 나쁜 자를 만나면 흠씬 두들겨 맞기 십상이다.
쓱 둘러본 잔월은 월영고랑 소매를 끌고 다른 길로 빠졌다. 길을 바꾼 둘을 거지들은 귀찮게 굴지 않았다.
"태양혈이 평평한 걸 보니 무공 익힌 거지 같구나."
태양혈은 살짝 들어가 있다. 무공을 어느 정도까지 익히면 평평하게 된다. 내공과 외공이 조화를 이뤄 중기가 충만하면 태양혈이 불쑥 튀어나온다.
월영고랑은 반박귀진에 가까워져 태양혈이 살짝 들어갔고 잔월은 옥녀공을 대성하여 역시 태양혈이 일반인과 같았다. 거지들이 겁 없이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북개방인 것 같습니다. 저긴 화룡표국이 있는 곳입니다. 화룡표국 서천주는 예전에 완안덕명과 함께 검선을 해치려 했습니다. 아마 검선이 찾아올까 봐 두려워 거지를 풀어 경계하는 듯합니다."
"거지가 왜 표두 말을 들어?"
"서천주의 딸이 개방 고수와 혼인했다고 합니다. 복중혼이어서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고 하더군요."
복중혼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맺어주는 풍습을 말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는 아이가 많았다. 서로 인연을 맺어주면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난다고 하여 미리 아이끼리 혼인을 약속한다.
같은 남자거나 여자면 결의 혹은 금란을 맺게 한다.
"화룡표국 여식과 복중혼 맺을 정도면 꽤 부유한 집안이었을 텐데, 어쩌다 거지 되었을까?"
"원이 장수와 관리들을 방종하니 부자가 거지 되고 거지가 부자 되는 건 한순간이겠죠."
"그래도 내가 아비라면 딸을 거지한테 시집보내진 못했을 텐데."
완청이 생각났는지 월영고랑의 목소리에 슬픔이 묻어났다.
"완청은 진우량 대공자에게 시집가서 잘살고 있어요. 무곡산장은 악행이 쌓여 언제든 무너질 수 있으니까 사부가 강호에 유명한 고수가 돼야 해요. 그래야 완청이 눈칫밥 안 먹고 잘 살 수 있어요."
한사코 은거하려는 월영고랑을 잔월이 완청을 핑계로 끌어냈다. 잔월은 물론 자강과 두천도 월영고랑의 허락을 받아야 화산파에 입문할 수 있다.
게다가 월영고랑은 잔월이 품은 의문을 명확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가끔 자신이 뭐가 궁금한지 모를 때가 있는데 월영고랑은 잔월 본인보다 더 명쾌하게 정리했다.
물론, 그게 아니어도 잔월은 사부랑 함께 지내고 싶었다.
서안을 벗어난 둘은 경공으로 화산까지 갔다. 그러나 화산에 도착하고 나서 또 천천히 걸어야 했다. 월영고랑은 화산의 험준한 산세에 푹 빠졌다.
비록 경공을 펼치진 않았지만, 쉬지 않고 걸으니 목적지인 옥녀봉이 금방이었다.
"사부, 사부."
옥녀봉에 올라 제일 먼저 만난 건 쌍둥이였다. 쌍둥이는 월영고랑에게 사조라고 부르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월영고랑은 잔월이 벌써 뛰어난 제자를 들인 데 대해 무척 흡족했다.
"흑표 왕이에요."
쌍둥이의 두서없는 수다를 통해 흑표가 며칠 사이에 화산을 평정한 이야기를 들었다. 화산 여기저기 서식하던 맹수들은 흑표의 집요한 괴롭힘에 버텨내지 못하고 도망쳤다.
지금도 영역을 순찰하느라 자리를 비웠다고 한다.
흑표가 곰과 싸우던 이야기를 들으며 산 중턱에 이르니 건물 세우느라 한창 난리였다. 집 짓고 뭘 만드는 걸 좋아하는 월영고랑 얼굴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을 돕던 혁중과 상관소혜가 월영고랑을 반갑게 맞이했다. 화산파 제자가 되기로 한 사람들과도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검선께선 안 계십니까?"
월영고랑이 비록 강호에 관심이 없다지만, 무극존자나 종남검선 정도는 당연히 알았다. 특히 평범한 무공으로 절대고수가 된 검선을 평소 흠모했다.
"쇄심침을 없내는 과정에 깨달음을 얻으셔서 북쪽 운대봉에 가서 폐관하셨습니다."
"안타깝군요."
건축에도 일가견이 있지만, 나무나 돌을 다듬는 데 제대로 이골이 튼 월영고랑이었다. 돌 목수들이 정과 망치를 들고 조심스레 다듬는 돌을 칼 몇 번 휘두르면 끝이었다.
가끔 칼을 부숴 먹긴 했지만, 어차피 싸구려여서 상관없었다. 월영고랑과 잔월의 가세 덕분에 나무와 돌을 다듬는 일이 빠르게 끝났다.
"자강이랑 두천은 어디 갔나요?"
"물건 사러 보냈다. 지은 집을 꾸미다 보면 자꾸 부족한 게 생겨서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쌍둥이만 여기 머물게 됐어요?"
"저 둘이 고양이랑 죽어도 못 떨어진다고 생떼 부려서 말이지. 게다가 네 제자여서 반은 화산파 사람이라고 억지 부리더라."
"의모, 흑표 고양이 아니에요. 표범이라니까요."
"이쁘장하게 생겨서 자꾸 까먹게 되네. 근데 흑표 내공 생긴 거 맞지? 가끔 단전이 느껴지기도 하는 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잔월과 월영고랑 덕분에 집 짓는 일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끝났다. 남은 건 연무장과 이백 명 정도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대청이었다.
필요한 돌과 나무가 오는 길에 있어 일행은 잠시 일을 쉬게 되었다.
잔월은 상관소혜와 느긋하게 담소를 나누면서 혁중이 종리형에게 혼나는 걸 구경했다.
"너 이래서 내 뒤를 이어 장문인 되겠어? 대사형 검 다시 잡아보고 싶지 않아? 집중하고 똑바로 해."
종리형은 내공을 익히기 힘든 체질이지만, 초식 익히는 자질은 타고났다. 상관소혜가 남편이라고 험하게 다루지 않았기에 혁중은 초식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더구나 상관소혜가 초식 쉽게 펼치는 편법들을 가르쳐서 높은 경지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되었다.
차라리 무공을 모를 때부터 종리형에게 배웠다면 괜찮겠지만, 이미 높은 성취를 이룬 상태에서 기초부터 다시 수련하려니 몹시 힘들었다. 잔월 역시 기초 도법을 수련할 때 느낀 어려움이어서 혁중이 얼마나 힘들지 이해되었다.
조금만 집중력을 풀면 익숙한 방식으로 몸이 움직인다. 실전에서야 익숙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게 맞지만, 높은 경지를 이루려면 불편하더라도 쉬운 방식이 아닌 정석으로 움직여야 한다.
"동생. 의념을 몸 중심선에 두게. 자꾸 몸이 앞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네."
보다 못한 월영고랑이 나섰다. 잔월도 지적하고 싶었지만, 차마 의부라서 입을 못 열었다.
"그렇다고 너무 뒤로 보내진 말고. 지금 수련하는 권법은 아무래도 중심선을 지키며 사방을 공격하고 수비하는 무공 같네. 필요에 따라 앞뒤로 보내는 건 괜찮지만, 수련할 때는 늘 치우침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네."
말하다 보니 신난 월영고랑은 밑으로 내려가서 혁중에게 가르침을 내렸다. 같은 편으로 여겼던 월영고랑까지 가세하여 자신을 괴롭히자 혁중은 눈앞이 캄캄했다.
상관소혜도 무공에 관해서는 종리형에게 모두 맡겨버렸기에 아군이 남지 않았다.
'어서 부모님 복수 끝내고 외숙공 찾아서 오손도손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
아직 채 지어지지도 않은 연무장 한쪽에서 쌍둥이가 대련했다. 여섯 살 생일 지난 지 몇 달 안 되는 아이라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격렬한 대련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둘 중 하나가 상대 당과를 훔쳐먹은 줄로 오해할 정도였다.
"내 당과. 저녁에 먹으려고 아꼈던 건데. 이 나쁜 놈아."
華山 화산에
築巢 둥지 틀다
- 작가의말
잔월이 아미에서 통비권을 높은 수준으로 익히는 사이, 자강두천은 매일 돌 나르고 나무 나르고 심부름 다니면서 화산에서 차가운 겨울바람 맞으며 땀 흘렸습니다. 주연과 조연의 확실한 대우 차이, 강호나 연예계나 도긴개긴입니다.
그리고 주인공 별명 촌스럽죠? 좋은 별명 생각나면 댓글로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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