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농·불어수
공손무기는 얌전하고 바르게 자란 딸이 정말 고마웠다. 일부러 귓등에 남겼던 흔적을 확인했기에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고생 많이 했구나."
모친 품에 안긴 완청은 눈과 코가 빨갰다. 완아와 달리 무공 자질은 평범하기 그지없지만, 의술이 뛰어나고 머리가 총명했다.
"아닙니다."
"내가 원망스러울 거다. 그러나 십수 년 동안 나와 네 모친이 마음 편한 적이 하루도 없었음을 알아줬으면 한다."
"이해합니다."
잔월과 무곡산장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완청은 그저 친부모를 찾고 수많은 친척 그리고 형제가 생겼다는 게 기뻤다.
비록 잔월이 부친을 기습했지만, 자신이 납치당한 거로 오해해서 구하려고 공격한 줄 알았다. 잔월이 미리 도착해서 대화를 전부 엿들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마지막에 무극존자의 공격을 막아주면서 홍야차의 장법에 당했지만, 그저 밀어내는 공격이어서 잔월이 전혀 다치지 않았다고 동 파파가 얘기해줬다.
"다행히 좋은 사람 만나 무탈하게 자랐구나. 일전의 일도 사죄하고 그분에게 감사도 드리려고 하가촌에 갔는데 이미 떠나고 없더구나. 혹시 다른 곳에 거처가 있는지 아느냐?"
"하가촌에만 살다가 제가 병을 앓아서 의원을 찾아 돌아다닌 게 전붑니다."
완청은 자신이 왜 거짓말하는지 몰랐다. 양부와 잔월 그리고 두천과 자강과 함께 지냈던 곳은 왠지 비밀로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부인, 아일 그만 괴롭히시오. 목욕도 하고 옷도 갈아입게 좀 놔주시는 게 어떻소."
완청은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했다. 그냥 나무로 만든 통에 뜨거운 물 붓고 대충 하던 목욕과 달리, 물을 여러 번 갈아가며 반 시진이나 씻었다.
그리고 그사이, 완청이 몸에 지녔던 물건들이 공손무기 앞에 놓였다.
"기침요결이라. 잔월이라는 아이의 뿌리가 얕지 않구나."
단무전이 잔월에게 남긴 글을 읽어본 공손무기는 적잖이 놀랬다.
"잔월이란 아이를 납치했을 때 여섯 살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여섯 살에 옥녀공을 소성? 혹시 입문을 잘못 적은 건가? 그런데 내가 볼 때는 다섯 살 채 되기 전이었는데. 설마 그때 벌써 옥녀공을 익힌 건가?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기에 구결 뜻을 말해줘도 못 알아들을 아이를 옥녀공에 입문시켰을까?'
"혹시 섬전도라는 무공을 들어본 적 있느냐?"
공손무기의 심복들이 전부 고개를 저었다. 섬전도라는 이름은 독고경천만 아는 이름이었다. 자신을 뽐내며 자랑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누구한테도 이름을 알린 적 없었다.
'이런 대단한 가문이 아이가 납치되었는데도 그냥 버려뒀다고? 부모가 죽어도 가문의 다른 사람이 있을 텐데. 설마 일부러 접근한 건가?'
"백마사와 가까이 지내는 가문 모두 조사하라고 이르거라."
네모난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의 하늘을 네모고 둥근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의 하늘은 동그라미다.
공손무기가 우물 안 개구리는 아니지만, 자신이 본 세상으로 잔월을 재단하며 오해를 키웠다.
'그 신의라는 작자를 소개한 사람이 백마사 주지라고 했지. 신의라는 놈도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무공은 형편없는데 내공은 정말 깊었다. 그때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데 연우의 변심 때문에 당황해서 실수했구나.'
조카가 치료를 받고 살아났지만, 원래 계획대로 왕 원외를 처리하고 왕가장을 암중에서 조종하려 했다. 그런데 공손연우가 마음을 돌려 왕 원외를 감쌌다.
벽사주를 이용해 계책을 짜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신의라는 자가 왕 원외가 준 벽사주를 왕형봉에게 몰래 돌려줬다. 분란을 일으켜 기회를 만들고 싶어도 상대는 전혀 틈을 주지 않았다.
'그 귀한 물건을 망설임도 없이 돌려주는 배포를 보면 평범한 놈은 절대 아니다. 남궁가가 주원장이라는 자와 결탁하여 힘을 키우고 있다지만, 저력은 부족한 편이다. 모용가는 저력이 깊지만 대대로 손이 귀해 합쳐봐야 십수 명밖에 안 된다.'
모용가는 선비족이고 남궁가는 고려의 피가 섞였다. 둘 다 공손가의 앞길을 막을 명분 그리고 힘이 부족하다.
'우문세가도 오랑캐 후손이다. 하후가 역시 오랑캐 피가 진하게 섞였다.'
지금 천하를 다 따져봐도 힘과 명분에서 공손가와 어깨를 겨룰 가문은 없었다. 방해가 없으면 황제까지 삼 년이면 되는데, 무극존자는 고작 방해가 아니라 공손가를 지울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재난이었다.
'어(魚)와 웅장(熊掌)은 겸득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내 욕심이 일을 그르쳤구나.'
맹자는 '물고기도 갖고 싶고 웅장도 갖고 싶은데 둘 다 취할 수 없다면 나는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라고 했다.
물고기와 웅장을 비교하면 웅장이 훨씬 귀하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이어서 '삶도 내가 바라는 것이고 의도 내가 바라는 것인데, 삶과 의를 다 취하지 못하면 나는 목숨을 버려 의를 취하겠다. 라고 했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취할 수 있는 가장 큰 걸 취하라는 말이고, 만약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면 목숨을 버려서라도 취해야 함이 마땅하다는 뜻이었다.
공손무기는 황제 자리와 무극환허인이라는 절세 무공을 모두 취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결과만 놓고 보면 과욕으로 웅장과 물고기 어느 하나 제대로 못 챙긴 상황이었다.
'그래도 정체를 숨긴 의문의 가문을 하나 발견했으니 아주 손해는 아니다.'
공손무기의 상상에만 존재하는 잔월의 가문은, 공손무기가 진행하는 음모를 알아내고 일부러 왕가장에 접근하여 무곡산장도 포기한 왕형봉의 난치병을 치료했다. 치료를 끝내고 신의라는 자는 무곡산장 힘으로도 못 찾을 정도로 강호에서 사라지다시피 했다.
공손무기가 막내딸을 무극존자 조카로 위장하려던 것과 마찬가지로 흑표를 이용해 공손완아를 유혹했다. 납치한 아이는 출중한 자질이 아까워 충의대(忠義隊 - 흑의인)에 보내지 않고 무곡산장에서 키웠다.
추론이 조금 억지긴 하지만, 어차피 아이를 이용한 계획은 실패할 가능성이 무척 크다는 가정하에 진행하는 것이다. 막내딸을 무극존자에게 보낼 때도 성공보단 실패를 염두에 뒀다.
무극존자가 속더라도 장성한 딸이 비급을 훔쳐낸다는 보장이 없다. 공손무기의 고모가 비급을 필사하라는 부친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처럼, 키워준 무극존자에 더 깊은 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잔월 정도의 아이를 실패할 가능성이 큰 계획에 투입한 다라.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 거야?'
공손무기는 진우량과 무극존자의 일만 해도 골치가 아팠는데 정체를 숨긴 암중 세력의 등장에 두통이 더 세졌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공손무기를 엄청난 고민에 빠뜨린 잔월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고생하며 바닥부터 천천히 기어오른 게 아니어서 잔월은 성취를 이룰 때마다 수습하는 기간이 무척 길었다.
잔월의 기척이 하도 고요하여 냇가로 간 임완아는 잔월의 존재를 몰랐다. 느리게 흐르는 냇물에 얼굴을 비춘 임완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삐죽인 입은 바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편작의 치료 덕분에 내상과 외상은 꾸준히 낫고 있는데 홧김에 자른 머리가 아까워 화병이 새로 도질 것 같았다.
주변 기척을 살핀 임완아는 허리띠를 풀었다. 그런데 상의를 벗기도 전에 부스럭 소리가 났다.
"이 철부지야. 씻고 싶으면 물 끓여서 목욕통에서 씻어."
세상 얄미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가 갈렸다. 셋밖에 없는 곳이어서 부스럭 소리가 날 때부터 짐작이 가긴 했지만, 정작 목소리를 들으니 손톱으로 마구 할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이 근본도 모르는 더러운 자식. 몰래 숨어서 훔쳐보고 있었어?"
"난 여기 이틀 전부터 누워있었다."
"이틀 전부터 훔쳐보려고 준비했다고? 정말 치밀한 색마구나."
색마라는 말에 정영이 떠올랐다. 정영의 뻔뻔한 얼굴이 생각나자 영문 모를 화가 와락 치솟았다.
"색마 같은 소리 하네. 너야말로 아무 데서나 훌렁훌렁 벗으려 하는 색녀다."
임완아가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잔월의 신형이 사라졌다. 임완아를 입씨름으로 이기는 것보다 깨달음을 갈무리하고 얻은 성취를 다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잔월이 자리를 피했다.
물을 덥혀 씻으려면 장작을 주워야 한다. 그리고 개울에서 물을 길어야 하며, 끓인 물과 찬물을 적절하게 섞어 온도도 조절해야 한다.
허드렛일해 본 적이 없는 완아는 날씨도 따뜻한데 그냥 개울물에 씻기로 했다. 그런데 정작 씻으려니 잔월이 어딘가 몰래 숨어서 훔쳐보는 게 아닌지 걱정되어 망설여졌다.
그때 슉 소리와 함께 화살 하나가 쏘아졌다. 임완아는 피하려다가 화살에 달린 천을 확인하고 손으로 잡았다. 화살에 달린 천에는 작은 글씨로 수십 글자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한참 고민하던 임완아는 화살을 개울에 던졌다. 나무로 된 화살은 개울물을 따라 하류로 천천히 떠내려갔다.
글이 적힌 천은 갈가리 찢어서 개울에 던졌다. 임완아는 한결 후련해진 마음으로 편작의 집으로 돌아갔다.
"함부로 나다니지 말아라. 잔월이야 경지가 높아 쉽게 안 들키겠지만, 넌 다르다. 우연히 사람 눈에 띄면 네 외모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무곡산장이 여길 찾아올 거다. 치료 끝나기 전까지는 변수 없이 조용히 지냈으면 한다."
무극존자의 무뚝뚝한 말에 임완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알았어요."
"잔월. 단서를 찾았다."
"네?"
"네 외숙공은 실제로 강릉에서 산 적이 있다. 그땐 편작이 군대에 끌려간 후였고 네 외숙공이 치료를 자주 하지 않아서 의원인 걸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다른 가족은 있습니까?"
"옜다."
무극존자는 글자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드넓은 중원이어서 산이나 봉우리 이름 혹은 지명이 같은 일이 많았다. 그리고 글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을 수도 있어 무극존자는 글자로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칠팔 년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고 하더라. 지금도 그곳에 있는진 모르지만, 가서 찾아보아라."
"감사합니다."
깨달음이고 뭐고 다 팽개친 잔월은 바로 출발했다. 잔월이 떠나고 나서 무극존자는 책 한 권을 임완아에게 건넸다.
"상편이다. 잔월까지 합세하면 좋겠지만, 우리 둘만으로도 복수는 충분할 거다. 네가 제대로 익혀내기만 한다면."
비급을 펼쳐보니 그림은 하나도 없고 글자만 빼곡히 적혀있었다.
"그림으로 된 비급은 내 깨달음이 섞여서 더 강하다. 그러나 그만큼 익히기 훨씬 어렵다. 구결을 통해 익히는 게 훨씬 쉬울 거다. 누가 빼앗으려 하면 저기 아궁이에 던져 태워버려라."
血濃 피가 짙다지만
不於水 물보단 못하다
- 작가의말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만, 키운 정이 낳은 정보다 낫다는 말도 있습니다.
맹자의 말은 아주 훌륭합니다. 신념을 위해 목숨도 버려야 함을 강조한 거죠. 그러나 사람마다 그 해석이 아주 다릅니다.
무곡산장은 신념이 아닌 욕심을 위해 자신이 아닌 타인의 목숨을 쉽게 버렸습니다.
무식한 나쁜 놈보다 유식한 나쁜 놈이 훨씬 해로운 이유죠. 좋은 말도 나쁜 일에 잘 써먹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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