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월동·서동
비록 포박당하진 않았지만, 잔월과 흑표가 맹수 두 마리를 이길 리 만무했다. 빗장이 당겨지며 문도 함께 열리자, 잔월이 소리 질렀다.
"흑표, 맞은편으로 가서 도망쳐."
잔월과 흑표를 가둔 감옥과 달리 맞은편 감옥은 창살 간격이 넓었다. 잔월은 힘들어도 흑표는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넓이였다.
"크아앙."
흑표는 잔월 말을 무시하고 크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덩치가 작아서 전혀 위압적이지 않았다. 흑표는 잔월 앞을 가로막은 채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리고 끊임없이 으르렁댔다.
맹수 두 마리가 조심스럽게 잔월과 흑표가 있는 감옥으로 들어왔다. 아흐레나 굶었는데도 서두름이 없었다. 타고난 사냥꾼이었다.
"너희 둘. 흑표 건드리면 큰일 날 줄 알아."
잔월의 목소리엔 떨림이 없었다. 별은 어두운 밤일수록 밝게 빛났다. 모든 종남파 제자들이 진심으로 따랐던 독고경천의 대인 풍모가 피를 통해 잔월에게 이어졌다.
공손완아는 실제로 잔월과 흑표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저 겁을 줘서 굴복시키려고만 했다. 실수로 빗장을 열어 두 감옥을 통하게 한 후 팔다리가 떨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넘어지며 떨어뜨린 횃불은 차가운 바닥의 냉기를 못 이기고 바로 꺼졌다.
어둠 속에서 두 맹수와 흑표의 눈이 푸른 불을 뚝뚝 떨궜다. 잔월의 눈도 미약하게나마 빛을 흘렸다. 두 맹수의 머리 높이가 잔월의 키보다 높았다. 그런데도 두 맹수는 쉽게 덤벼들지 못하고 코만 킁킁거렸다.
"카앙!"
흑표가 털을 세우고 몸을 부풀리며 앙칼진 소리로 상대를 위협했다. 공손완아의 눈에는 그저 발목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는 푸른 불 두 개만 보였다. 공손완아 자신이라도 무시했을 흑표의 위협에 아흐레나 굶어 눈이 뒤집혀도 이상하지 않은 두 맹수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흑표는 한술 더 떠서 덩치가 자신의 수십 배는 되어 보이는 맹수를 향해 전진했다. 잔월도 흑표를 따라 앞으로 살금살금 나갔다.
두 맹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더니 어느새 자기들 우리로 돌아갔다.
"철부지, 문 닫고 빗장 질러."
잔월의 말투는 여섯 살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침착했다. 아이답지 않은 묵직한 말투에 공손완아는 심장이 쿵쾅거리고 이마와 볼이 뜨거웠다.
그새 어둠에 적응한 공손완아는 갈고리를 들고 조심조심 움직였다. 몇 번이나 실패하고 나서 겨우 갈고리를 빗장에 달린 고리에 걸었다.
영약으로 키운 내공을 움직여 양팔에 보냈다. 빗장과 문이 함께 움직였다. 문이 먼저 닫힌 후 빗장이 질러졌다. 철컥 소리가 나며 고리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빗장을 열려면 고리를 당겨 뽑아내야 한다. 사람이 아닌 맹수를 가둘 목적으로 만든 감옥이기에, 접근하지 않고도 여닫을 수 있도록 기관을 설계했다.
공손완아는 다시 실수할까 봐 감히 갈고리를 뽑지 못했다. 실수로 고리를 당기면 또 빗장이 열리고 감옥이 통한다.
"맹수를 가둔 감옥도 닫아야지. 맹수들이 이 문을 밀면 틈이 생겨서 탈출할 수 있어."
공손완아의 힘으로도 움직였던 감옥이다. 두 맹수가 잔월을 가둔 감옥 문을 밀면, 감옥과 감옥이 분리된다. 그렇게 되면 두 맹수가 탈출해 공손완아를 해코지할 수 있다.
벽을 밀면 내가 밀려난다. 잔월은 익힌 글자는 쉽게 잊었지만, 경인 대사나 대총관이 알려준 지식은 선명히 기억했다.
공손완아는 바닥을 기어 벽에 가서 다른 갈고리를 집었다. 십수 번 실패하고 나서야 겨우 맹수를 가둔 감옥 문을 닫고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서글프게 울던 공손완아는 감옥 쪽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공손완아가 버려둔 갈고리를 잡은 잔월이 고리를 당겨 빗장을 열었다. 빗장이 열리자 감옥 문도 자연스럽게 열렸다.
발로 맹수를 가둔 감옥 문을 걷어차니 틈이 생겼다. 잔월과 흑표는 그 틈으로 나왔다. 공손완아는 벌떡 일어나 월녀봉심 초식의 기수식을 취했다.
"야, 너 뭐해? 얼른 안전한 곳으로 가서 숨어."
"왜?"
공손완아는 겨우 한 마디만 뱉어냈다. 지금 상황이 너무 이상하고 두려워서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생각조차 떠올리기 싫었다.
"얘네 아흐레나 굶었다면서. 불쌍하지도 않아? 나 얘네 방생할 거야. 안 숨으면 널 잡아먹을지도 몰라. 여자애는 고기가 야들야들해서 맹수들이 특별히 좋아하거든."
공손완아는 잔월의 말이 진심인지 가릴 여유조차 없었다. 겁에 질려 달리다 넘어지자 엉금엉금 기어서 지하를 벗어났다.
"너희 내보낼 테니까, 사람 해치면 안 돼. 알았지?"
안타깝게도 두 맹수는 잔월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잔월은 갈고리를 당겨 감옥 문을 열어줬다.
"카앙!"
흑표가 감옥에서 쭈뼛거리며 나온 두 맹수를 향해 포효했다. 두 맹수는 잔월이 가리킨 방향으로 감옥을 벗어났다.
둘은 별장에 자란 커다란 나무에 기어오른 후 가지를 타고 훌쩍 뛰어 담벼락에 올라탔다. 그때 잔월과 흑표도 지하에서 올라왔다.
"흑표, 네 말이 맞았어."
환한 달빛을 빌어 담벼락에 갈비가 아롱아롱한 검은 표범 두 마리를 확인했다. 아흐레나 굶어서 그런지 머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두 표범은 잔월과 흑표를 향해 의미를 알 수 없는 몸짓을 하고 떠났다.
"근데 흑표. 왜 동생인데 너보다 더 큰 거야?"
흑표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공교롭게도 우리에 갇힌 두 맹수는 흑표 동생들이었다. 젖먹이 시절 잔월에게 괴롭힘당하고, 이빨이 날카로워졌을 땐 흑표가 잡아 온 쥐나 토끼 그리고 새로 배를 불렸다.
잔월에 대한 두려움과 흑표에 대한 고마움이 기억에 남아서 아흐레나 굶었음에도 무턱대고 덮치지 않았다.
"미안, 기분 나빠질 줄 몰랐어. 그런데 우린 어떻게 도망가지?"
맹수를 막으려고 담벼락을 무척 높게 쌓았다. 별장 안에 나무를 타고 담벼락까지 가는 건 어찌어찌 가능할지 모르지만, 일 장이 넘는 담벼락에서 밑으로 뛰어내리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었다.
"도망쳐서 어쩔 건데? 밖에 맹수가 득실댈 텐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잔월은 물론 흑표도 깜짝 놀랐다. 흑표도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전혀 못 느꼈다.
"아, 눈동자 이쁜 아저씨다."
동 파파는 공손완아가 사고 칠 것 같다는 느낌에 홍야차를 불렀다. 공손완아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가주인 공손무기와 홍야차밖에 없었다. 가주는 응석이 전혀 통하지 않으니 두려운 거고, 홍야차는 삼인성호로 무곡산장 모든 아이가 두려워했다.
잔월의 말에 홍야차는 말문이 턱 막혔다. 눈매가 흉측하고 눈동자가 빨개서 어릴 때부터 영문도 모르고 쩍하면 매타작을 당했다. 낳은 어미조차 매일 욕하고 때렸다.
기골이 장대해진 후 자신을 업신여기던 사람들을 패고 다녔다. 그러다 공손무기에게 제압당하고 무곡산장의 무인이 되었다. 정식으로 사제 관계는 맺지 않았지만, 공손무기가 직접 무공을 가르쳤다.
무공이 강해진 후 사람들은 홍야차를 더욱 두려워했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홍야차를 보면 피해 다니기에 급급했다.
어려서부터 외모에 자괴감을 느꼈는데 눈동자가 이쁘다는 말을 갑자기 들으니 머리가 멍해졌다.
"절 어쩔 생각이에요?"
홍야차가 입을 다물자 잔월은 동 파파를 향해 질문했다. 그제야 가주의 당부가 기억난 홍야차는 잔월의 맥문을 잡았다.
흑표가 잔월의 손목을 잡은 홍야차를 공격했다. 그러나 흑표의 발톱은 홍야차 몸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바위에 발톱을 비벼도 하얀 자국이 남기 마련인데, 홍야차의 살갗은 붉어지지도 않았다.
"어때?"
맥문을 놓은 홍야차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혈도들이 꽉 막혔습니다. 그리고 기해혈도 없습니다."
동 파파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가주께 잘 말해주게."
"아씨의 인품 때문에라도 해치진 않을 겁니다."
가주가 잔월을 해치면 공손완아가 그걸 그대로 보고 배운다. 홍야차는 좋은 집에 시집 보내야 하는 공손완아가 개입되었기에 잔월을 해칠 가능성이 없다고 여겼다.
그냥 납치한 아이였으면 충의대에 보내거나 죽여버렸을지도 모른다.
잔월과 흑표는 동 파파에게 맡기고 홍야차는 무곡산장으로 돌아갔다. 공손완아가 요구했던 홍시는 잔월 뱃속에 들어갔다. 방문을 닫아건 공손완아가 어느새 잠에 빠진 바람에 잔월의 입만 호강했다.
잔월은 홍시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흑표가 여전히 불쌍했다.
"어때?"
홍야차가 들어서기 무섭게 가주가 질문했다.
"기해혈이 없고 혈도가 굳었습니다."
"절맥 같은 거냐?"
절맥 종류에 따라 알맞은 무공을 익혀도 고수가 될 수 있다. 무곡산장에는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특별한 무공이 수두룩했다.
"절맥은 아닙니다. 생명에도 지장이 없는 듯합니다. 심장박동이 느리고 호흡도 깊고 느립니다. 나이를 몰랐다면 내공 고수로 오해할 법도 합니다."
"여섯 살인데 기해혈이 없다면 가망 없는 거겠지?"
"그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혼잣말이다."
가끔 기해혈을 단전으로 오해하는데, 단전은 기해혈 근처 위치에 있는 실존하지 않는 혈도다. 그러나 기해혈이 없으면 단전도 없기에 기해혈과 단전을 동일시하는 자들이 많았다.
별의별 희한한 무공이 다 있는 무곡산장에도 단전이 없는 자가 익힐 수 있는 무공은 없었다. 잘 모르는 자들은 내공 익히기 힘들면 외공 익히면 되지 않냐고 생각하는데, 외공은 단전에 대한 의존이 내공보다 훨씬 높았다.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 거 같으냐."
"잘 타일러서 아씨의 서동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대답이 바로 나오는 걸 보면 그 아이가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이유나 들어보자."
"아씨는 흑표라는 고양이가 마음에 들어 납치를 의뢰했습니다. 잔월을 서동으로 삼으면 흑표도 곁에 둘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단순한 이유더냐?"
"아이가 성품이 강인하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아씨가 그 기질을 조금만 닮아도 무곡산장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여자는 시집 보내면 딴 사람 가족이 된다. 마치 연우처럼 말이지."
"아씨는 다릅니다."
"이 일은 내가 나서기 좀 그렇구나. 네가 가서 그 아이를 잘 타이르거라."
제자 혹은 양자로 받을 거면 직접 나섰겠지만, 겨우 딸아이 서동으로 들이는 데 가주가 나서는 건 체면 떨어지는 일이다.
"네 말주변으로 설득할 자신 있느냐?"
"영리한 아이여서 결론만 말해도 알아서 자신을 설득할 겁니다."
"네가 그 아이를 정말 좋게 보는구나. 혹시라도 기해혈이 생기면 바로 내게 말하거라."
그렇게 잔월은 서동이 되었다.
盞月童 잔월 어린이
書童 책 어린이 되다
- 작가의말
무교불성서 無巧不成書
공교롭지 않으면 재미가 없어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는다.이 정도는 개연성을 아주 많이 해치는 게 아니라고 제발 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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