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자가인·정혼
"무공이란 말이야."
무극존자가 말했다.
"결국엔 사람 패는 기술이다."
상관소혜는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비록 종남파는 수십 년밖에 안 되지만, 전진교 시절부터 치면 꽤 전통이 있는 문파다. 천년이 넘은 소림이나 소림보다도 수백 년 먼저인 아미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종남 정도 오래 유지한 문파도 몇 없는 게 금세 현실이다.
대문파들은 일반적으로 무공을 비롯한 수많은 것들에 관해 자신만의 견해가 있었다.
"처음에야 맹수에 대항하려고 만들었겠지. 그런데 요즘 고수는 맹수를 양 다루듯 하잖아. 그리고 어차피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이는 건 같은 사람이야. 맹수의 위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무공은 인간을 상대로 다듬어졌어."
무극존자의 말은 얼핏 깊이가 없이 들렸지만, 반박하려니 딱히 흠잡을 곳도 없었다.
"옛날에는 포호권이네 도룡장이네 하면서 뱀이나 호랑이 같은 맹수를 상대하는 무공이 널리 퍼졌다고 들었어. 그러나 요즘 초식들을 봐. 모두 사람을 적으로 상정한 초식이잖아."
"그래서 사부는 뭐가 문젭니까?"
"은인은 지금 무공에 관한 생각이 흔들렸어. 자신이 생각하던 무공이 틀렸다는 걸 발견한 거야. 그런데 뭐가 틀리고 왜 틀리고 어떻게 틀렸는지 모르고 있지. 그건 방향이 없기 때문이야. 지금까지 쌓았던 게 무너지니 기혈이 뒤틀린 게지."
"그럼 해결책은?"
"무공이 뭔지 고민하는 거지. 난 무공이 사람 잘 패는 기술이라고 생각해."
잔월은 무공이 뭔지 고민했다. 천하제일이 되려면 반드시 익혀야 하고, 구결을 곱씹으며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게 재밌었다.
외숙공을 찾아내고 부모 원수를 갚는 데 무공이 필수라고 할 수 없다. 무력이 없어도 계책을 꾸며 목적을 달성한 자들이 고금에 드물긴 해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무공이 강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커진다.
담두천과 한자강도 깊은 고민에 빠졌고 월영고랑도 사색에 잠겼다.
"검선 제자. 자네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협의를 지키기 위한 수단."
상관소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악인을 제대로 벌하려면 무공이 강해야 합니다. 무공이 약하면 부득이하게 상대를 죽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존자만큼 강하면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되겠죠."
혁중의 생각도 확고했다.
"역시 명문 출신들이라 신념이 뚜렷하군."
'협의를 지키기 위한 수단. 악인도 죽이지 않으려는 노력.'
상관소혜와 혁중의 말은 잔월 심장에 새겨졌다.
'사부도 참. 나한테는 늘 목적을 잊지 말고 일심을 유지하라 하시곤 정작 본인은 무공에 관해 일심을 품지 못하셨구나.'
월영고랑이 일심을 품지 못한 게 아니라, 단단히 품었던 일심이 충격으로 무너지다시피 하여 지금껏 고생하는 거였다.
"존자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월영고랑은 생각이 얼추 정리되었는지 밝은 얼굴로 말했다.
"은인께 도움이 되었다니 나도 기쁘오."
혁중과 완청이 부엌에서 요리를 만들었고 월영고랑은 뒤뜰에 묻은 술독을 파냈다.
"완청 시집갈 때 꺼내려고 빚은 술인데, 오늘같이 기쁜 날에 안 꺼낼 수 없습니다."
이는 소흥에서 시작한 풍습으로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술을 빚는다. 사내아이를 낳았을 때 빚는 술은 장원홍이라 하고 여자아이를 낳았을 때는 여아홍이라고 불렀다.
장원홍은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여 출세하길 바라는 마음이고 여아홍은 좋은 낭군을 만나 유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담겼다.
월영고랑은 술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두 팔로 안기 힘든 크기의 술독 스무 개나 빚었다.
"거기 검선 제자 두 분, 잔월 의부모라 하셨소?"
정중하게 나오는 무극존자가 되게 어색했다. 잔월은 소림사에서 한 번 봐서 그나마 괜찮았지만, 자강과 두천은 몸이 뒤틀릴 정도로 불편했다.
"그렇습니다."
"내 조카 임완청 어떠시오?"
혁중은 무슨 소린지 몰라 눈을 껌벅였다. 상관소혜는 무극존자의 생각을 알아채고 속으로 몰래 기뻐했다.
'대사형 핏줄이면 복수할 때 든든한 아군이 생기겠구나. 대사형과 무관하더라도 부모 복수를 해야 하는 아이니, 무극존자를 가족으로 두면 백익무해하다.'
"당사자 의견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존자는 조카를 오늘 만났고 우리도 잔월과 안 지 얼마 안 됩니다."
"완청, 넌 잔월이 어떠냐?"
그제야 한자강도 무극존자의 뜻을 알아차리고 잔월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담두천 역시 눈을 찡긋거리며 소리 없이 축하했다.
완청은 홍시보다 더 빨갛게 익은 볼을 손으로 감싸 쥐고 아무 말도 못 했다.
"싫으면 싫다고 말해라. 싫다고 안 하면 좋은 줄 알겠다."
무극존자의 닦달에 완청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너무 좋아서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가 봅니다."
월영고랑의 말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네 생각은 어떠냐?"
"완청은 임완청이 되었으나 잔월은 아직도 잔월입니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놈이 무슨 자격으로 혼사를 논한단 말입니까."
담두천은 고아로 자랐지만, 최소 아버지가 누군지는 알았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담두천으로 살았다.
그러나 잔월은 부모가 누군지 모른다. 게다가 외숙공 행방도 묘연한데 혼사를 거론하는 건 불효로 여겨졌다.
"잔월, 이것만 묻자. 혹시 완청이 마음에 안 드는 게냐?"
"그건 아닙니다. 다만 제 처지가 다소 기구하여 가정을 이루기엔 이르다고 여겨집니다."
무극존자의 이마 주름이 깊어졌다. 제자로 들이는 건 이미 가망이 없다. 대신 조카사위로 만족하려 했는데, 잔월 말도 일리가 있어 억지를 부리기도 그랬다.
"내게 좋은 생각 하나 있습니다."
"은인은 어서 말해보시오."
"잔월이 반대하지만 않으면 일단 정혼 하는 게 어떻습니까? 약관이 되거나 외숙공 행방을 찾거나 부모가 누군지 알아내면 혼인을 하죠."
"완청은 너무 좋아서 자랑하러 나갔고."
무극존자의 말에 한자강이 참지 못하고 풋 웃어버렸다.
"잔월 의부모는 어떠시오?"
"동의합니다."
"완청 숙부로서 나도 동의하는 바요."
무극존자와 혁중 그리고 상관완혜가 서로 포권했다. 방금 대화 내용을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잔월 사부이자 완청 양부인 은인 의견도 묻고 싶소."
"저야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월영고랑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넷 중에 둘이 부부로 맺어진다고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자. 이제 잔월만 동의하면 되겠구나."
"여러분 후애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자랑하러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한자강과 담두천이 발을 구르며 젓가락으로 사발을 두드렸다. 복수 끝나기 전에 술을 자제한다며 한 잔만 마신 무극존자가 대접을 술독에 넣어 연거푸 석 잔을 퍼마셨다.
월영고랑은 기쁨에 겨워 몸을 들썩였고 혁중과 상관소혜도 서로 바라보며 즐겁게 웃었다.
밖으로 나간 잔월은 노란 옷을 입은 완청 모습을 바로 발견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발끝으로 땅을 헤집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봄을 맞이해 가장 먼저 핀다는 노란 복수초가 떠올랐다.
"완청."
잔월이 다가가 나직이 부르자 완청이 화들짝 놀랐다. 넘어질 듯 위태하여 잔월은 허리와 어깨를 잡아줬다.
"외숙공은 실종했고 난 부모가 누군지 애초부터 몰라. 그래서 일단 정혼 하기로 했어. 외숙공을 찾고 부모가 누군지 알아내거나 나이가 차면 정식으로 혼인하기로 했어. 괜찮지?"
완청은 여전히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보통 여자 열넷 남자 열여섯이면 혼인한다. 좀 있는 집안은 아이를 교육하느라 조금 미뤄지기도 하지만, 스물 이전에 보통 혼인을 끝낸다. 완청이 열다섯이고 잔월은 열넷이다. 일단 둘은 정혼자 신분이고 늦어도 육 년이면 부부가 될 예정이다.
둘은 함께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말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집 안에서 술판을 벌인 다섯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도 둘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따뜻한 마음을 품고 달을 바라보는 둘은 숨소리마저 점점 닮아갔다.
정혼식은 혼례만큼 성대하고 떠들썩하게 치렀다. 마을 사람들은 잔월을 하늘이 용에 태워 내려보낸 사윗감이라며 입 모아 칭찬했다.
술독을 모두 꺼내 종일 잔치를 벌였다. 마을 사람들도 둘의 정혼식 덕분에 일 년 농사를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강릉은 내가 둘을 데리고 가겠소."
무극존자는 잔월과 완청을 데리고 봉황산장에 갈 작정이었다. 조카를 찾았음도 알리고 잔월에게 봉황산장의 무공을 조금 가르치겠다고 허락을 구하려는 목적이다.
물론 허락을 구한다고 죽은 조상이 꿈에라도 나타나는 건 아니지만, 수백 년 이어진 가문의 전통이었다.
봉황산장이 있는 봉황산은 강릉에서 십 리 정도 되는 거리였다. 봉황산에 들려서 무극존자가 조상들에게 상황을 고한 후 강릉에 가서 단무전을 아는 사람이 있는지 수소문할 예정이었다.
"그럼 우리 부부는 남아서 두 아들 무공 수련과 고랑 대형의 회복을 돕겠습니다."
술을 마시다가 합이 맞아서 혁중과 월영고랑이 결의형제를 맺어버렸다.
무공에 겨우 입문한 수준인 완청을 위해 무극존자는 말 한 필 구해왔다. 비록 말에 관한 지식은 전혀 없지만, 기운을 살필 수 있어 순하면서도 부지런한 말을 골랐다.
노란 옷을 입고 짧은 칼을 찬 완청이 말을 타고 달렸다. 계도를 등에 멘 잔월과 무극존자가 뒤를 따랐다. 아직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았기에 무극존자는 잔월이라고 이름을 부르고 잔월은 존자라고 불렀다.
"우리는 임 씨 성을 쓰지만, 사실은 왕 씨다."
"왜 성을 바꾸셨습니까?"
"전진교 개파조사 왕중부가 우리 선조다. 세간엔 왕중양이라고 알려졌지. 왕중양 세조께선 의병을 조직해 금나라에 대항했었다. 그때 세조가 죽인 자가 너무 많아 어머니 임조영의 성을 따랐다."
"그럼 종남파와 무공이 같습니까?"
"전진교의 무공은 모두 알고 있다. 전진교에도 무극환허인 일부가 있다. 검선이라는 자가 그걸 해석해서 공령환허라는 무공을 만들었다. 예전에 회수해서 이젠 전진교도 무극환허인을 아는 자가 없을 것이다. 내가 견문이 넓은 편이 아닌데도 네 의부모 빙련기공을 알아본 건 종남파 무공이기 때문이다. 다른 문파 무공은 아무리 봐도 잘 모른다."
"조상에게 허락을 구하고 네게 전진교 무공을 가르치겠다. 네 체질이라면 천양기공과 빙련기공을 동시에 익힐 수 있다. 운 좋으면 나처럼 무혈지체가 될 수 있고, 그게 아니어도 엄청난 위력을 보일 것이다."
"봉황내의도 가르칩니까?"
"무혈지체가 아니면 익히고 펼칠 때마다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 초식이다."
잔월의 농을 무극존자는 진지하게 받았다.
才子佳人 출중한 남자와 아름다운 여인이
定婚 혼인을 약속하다
- 작가의말
왕중양과 임조영. 신조협려에선 결국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부족한 제 글에서라도 부부의 삶을 누리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무극이는 다이아몬드 수저였습니다. 왕중양과 임조영의 DNA를 물려받다니. 얼굴이 웬만큼 생겼으면 네가 주인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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