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경·음양역
'쾌는 공수전환의 빠름이다.'
잔월의 공격은 홍야차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그러나 잔월은 꾸준하게 공격 후엔 방어하고 방어 후엔 공격하는 흐름을 지켰다.
위력은 홍야차가 훨씬 강했지만, 공격과 수비의 전환은 잔월이 압도적으로 빨랐다.
외공으로 튼튼한 몸이 되었다고 해서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맞아주는 게 아니었다. 잔월이 공격할 때마다 몸을 움직여 충격을 해소해야 했다.
여전히 잔월이 열세인 싸움이지만, 문외한 눈에는 대등해 보였다. 쌍둥이는 전보다 훨씬 잘 싸우는 잔월 모습에 손뼉을 짝짝 쳤다.
'해보자.'
위험한 시도도 겁 없이 했던 잔월은 옛말이었다. 천희연과 쌍둥이 생사도 걸려있기에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공격을 보류했다.
'지쳤구나.'
홍야차는 잔월이 회피와 반격을 포기하고 손바닥으로 공격을 막으려 하자 지친 거로 오해했다. 공격이 푸석한 모래를 때린 듯 타격감이 느껴지지 않을 때도 그러려니 했다.
전에 대결할 때보다 조금 더 강한 반탄력이 몰려왔을 때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전개에 만족했다.
'마지막 발악이구나.'
잔월이 오른 주먹을 뻗어 배를 공격할 때 홍야차는 승리를 자신했다. 잔월의 주먹이 때리는 순간에 맞춰 배 근육을 수축했다. 발경 원리를 수비에 적용한 거로, 근육의 빠른 수축으로 상대가 발경 시기를 놓치게 하는 엄청 어려운 수법이었다.
잔월이 허리를 숙여 자신의 왼 주먹을 피할 때에야 홍야차는 겨우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몸부림으로 잔월을 떨쳐내고 뒤로 물러나려 하는데 주먹이 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마어마하게 강하지는 않지만, 내공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취접장이다. 광명우사의 무공까지 익히다니. 무곡산장이 감당하기 힘든 아이일지도 모르겠구나.'
붉은 피를 연신 게워내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지금까지 말썽 없이 튼튼하던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저놈도 무사하진 않구나. 딱 한 대만 제대로 때리면 내가 이기는 건데.'
극음과 극양의 기운을 번갈아 홍야차 몸에 밀어 넣은 잔월도 무사하진 못했다. 음양의 전환을 너무 빠르게 하는 바람에 반발로 작은 내상을 입었다.
타인의 기운으로 입은 내상이 아니어서 정도가 심하진 않지만, 본인 기운으로 입은 내상이기에 회복은 훨씬 느렸다.
"제길, 졌다."
홍야차는 아예 몸에서 힘을 빼버렸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바라보노라니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렇게 매정하게 매질하던 어미가 갑자기 그리웠다.
그때 남은 여섯 중 하나가 다가오더니 홍야차 입에 환약 하나 넣어줬다. 내상약이려니 하고 삼킨 홍야차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너희가 감히."
쌍둥이가 배를 그러안고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다. 천희연도 창백한 얼굴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잔월은 몸속에서 날뛰는 내공이 흔들리지 않게 조심하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홍야차. 이 정도로 비겁한 자는 아니라고 여겼는데."
"내 뜻이 아니다. 어서 해독약을 주고 저들이 떠나게 해라. 반나절을 하루로 늘이면 공평한가?"
해독하고 회복하는 시간도 필요하니 반나절 안 쫓기로 했던 걸 하루로 늘렸다.
"홍야차. 가주 명이다. 모든 수단을 가리지 말고 구결을 확보해야 한다."
왜소한 체구에 얼굴이 갈색으로 탄 사내가 뾰족한 목소리로 외쳤다.
화를 내려던 홍야차는 가주의 명이라는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갈색 얼굴 사내는 지필묵을 잔월에게 던졌다. 지필묵을 받아든 잔월은 협상을 시도했다.
"상편은 총 이백 글자다. 백 글자를 써주면 두 아이의 독을 해독해라."
"네겐 협상 자격이 없다."
"그럼 그냥 죽으면 되겠네. 공손무기가 너 일 처리 참 잘한다고 칭찬할 거야."
"그렇게 하겠다."
잔월은 검은 피 한 모금 토하고 왼손으로 붓을 잡았다. 오른손으로 잡으면 왠지 무극환허인에 적힌 글씨체를 그대로 흉내 낼 것 같았다. 글씨에도 깨달음이 섞인다던 독심호리의 말이 생각나서 익숙지 않은 왼손으로 구결을 적었다.
구결 백 글자를 적은 잔월은 입으로 후후 불어서 먹을 말렸다.
"그걸 순서대로 잘 감싸서 거기 가죽 주머니에 넣어 홍야차한테 전달해라."
"혹시 홍야차만 글씨 모르는 거야?"
"그래. 나 무식한 놈이다. 됐냐?"
'저놈은 소가 변한 요괴가 아닐까?'
아무리 잔월의 첩경이 미숙하다고 해도 벌써 일어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한 달 넘은 기간 말도 못 하고 천희연에게 못난 모습 보여줬던 걸 생각하니 너무 억울했다.
잔월이 가죽 주머니에 구결을 적은 종이를 넣어 던지자 홍야차가 받았다. 품에서 책을 꺼내더니 글자 하나하나 비교했다. 백 글자 다 확인한 홍야차가 고개를 끄덕였다.
"똑같다. 어서 아이를 해독해라."
갈색 얼굴이 던져준 해약을 쌍둥이에게 먹였다. 복통은 바로 멈췄으나 창백한 얼굴에는 혈색이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이런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데."
잔월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해독약에 수작을 부렸다면 무곡산장이든 오독교든 가만두지 않는다."
갈색 얼굴 사내가 부들부들 떨며 가슴에서 다른 약을 꺼내 던졌다. 그 약까지 먹이니 쌍둥이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무곡존자의 잡서가 큰 도움이 되는구나.'
전음술이 적힌 책에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소리법'이라고 있었다. 그땐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검선에게 공령환허를 배우면서 사용법을 깨달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처음 사용했는데 효과가 무척 좋았다. 오독교 소속일 가능성이 큰 갈색 얼굴은 기세에 억눌려 남은 해약도 고분고분 내놨다.
'이게 심령제압인가?'
"다음은 팔십 자를 쓰겠다. 그러면 천희연 소저를 해독해라."
잔월은 바로 구결 팔십 글자를 쓰고 가죽 주머니에 넣어 홍야차에게 던졌다. 홍야차가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갈색 얼굴이 해약 두 개를 던졌다.
해독약을 다 먹은 천희연이 잠깐 운기 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해독되었다는 신호에 잔월은 억눌렀던 기성해를 풀어놨다. 검푸르던 잔월 얼굴에 순식간에 혈색이 돌아왔다.
"난 해독 안 해줘도 된다. 벌써 삶이 권태롭구나. 약속대로 하루 동안 우릴 쫓지 말기 바란다."
잔월의 말에 갈색 얼굴은 물론 홍야차도 '뭐 저런 새끼 다 있지'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가장 강한 홍야차는 내상으로 더 싸울 형편이 아니었다. 남은 여섯 중 오독교 제자들은 무공이 약하다.
그냥 죽이는 거라면 강한 독을 쓰면 된다. 그러나 안 죽이고 제압하려면 독을 푸는 데 시간이 걸린다. 많아도 안 되고 적어도 안 되며 독을 정확히 상대에게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쌍둥이와 천희연은 잔월과 홍야차가 싸울 때부터 은밀히 독을 조금씩 풀어 중독시킨 것이었다.
잔월이 다 죽이려고 하면 도망쳐야 할지 저항해야 할지도 고민되었다. 내상과 중독으로 약해졌다면 맞서 싸워야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도망쳐야 한다.
잔월 역시 저들이 급한 나머지 강한 독을 쓸까 봐 도망칠 좋은 기회를 노리느라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양쪽은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고 상대 눈치만 열심히 살폈다.
잔월과 홍야차 일행의 치열한 눈치 싸움은 허무하게 끝났다.
"하하하. 듣던 대로 호걸이로구나."
잔월의 눈길을 받은 천희연이 고개를 저었다. 기척을 잔월보다 훨씬 잘 느끼는 천희연이었지만, 상대가 입을 열기 전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공손용기라고 한다. 목숨 넷과 남은 구결 스무 자를 바꿀 생각인데, 너희가 밑지는 거래는 아니겠지?"
[수많은 기척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천희연의 말에 감각을 넓히니 수십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곧 공손용기를 따라온 자들이 잔월 일행을 겹겹이 포위했다. 잔월이 느낀 것보다 훨씬 많아서 백 명이 넘었다.
'공손완아. 이 철부지가 끝까지 날 귀찮게 하는구나.'
공손완아가 알려준 구결에 문제가 생겼기에 무곡산장이 이토록 애타게 잔월을 찾는 게 틀림없었다.
'문제는 무극존자가 몇 글자를 어떻게 바꿨을지 내가 전혀 모른다는 것이지. 처음엔 괜찮지만, 고수가 되면 위험하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뒷부분 구결을 손본 것 같은데.'
백팔십 글자가 공손완아의 것과 똑같았다. 남은 스무 글자가 다르다는 건데, 몇 글자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니 골치가 아팠다.
"이게 그 정도로 고민할 일인가?"
"아까 당신 수하들이 약속을 쉽게 어기는 모습을 보여줘서 말이오. 내가 이기면 반나절 추격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기자마자 독을 풀더군."
"우리가 좀 절박해서 말이야. 네가 외운 구결을 알려주면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이다. 무곡산장과 공손가 조상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항문 부스럼이나 벼락보단 훨씬 센 맹세였다. 그러나 잔월의 고민은 사실 공손용기가 약속을 지킬지가 아니었다. 몇 글자를 어떻게 바꿀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무곡산장이 무극환허인을 익히면 세상이 어떤 꼴이 날지 훤하다.'
"괜한 머리 굴리지 말거라. 내가 읽은 구결만 해도 수십만 글자는 된다. 전체적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글자 한두 개 바꾸면 바로 티가 난다. 네 구결이 이상하면 저 두 아이는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 너랑 저 여자는 어떻게 될지 굳이 내가 설명할 필욘 없겠지."
'무엇이 대고 무엇이 솝니까. 두 아이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이게 소라고요?'
문득 경인 스님이 해등 법사에게 던졌던 일침이 기억났다. 그때 적양공 내공을 소모해 두 아이를 구하고 명교를 상대할 때 긴나라진 대신 백팔나한진을 펼쳤으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다.
'소림은 큰 협이라고 여기는 걸 좇다가 오히려 벌만 받았다. 무곡산장이 무극환허인을 얻으면 또 어때. 진정한 협이 와서 저들을 벌할 것이다. 저들을 벌하는 자가 없다면, 내가 기꺼이 그 역할을 해주지.'
"좋소. 당신보단 무곡산장과 그대의 훌륭한 조상을 믿어보겠소."
말을 마친 잔월은 붓을 잡고 스무 글자 구결을 단번에 써 내려갔다. 공손용기가 손을 뻗어 구결이 적힌 종이 두 장을 잡아당겼다.
종이가 끈으로 매단 것처럼 쑥 빨려가자 쌍둥이가 너무 놀라 입을 벌리고 꺽꺽거렸다. 어찌나 심하게 놀랐는지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이거 확실한 거지?"
"나도 외워두기만 했소. 해석도 안 되는 구결을 무슨 수로 바꾼단 말이오."
'상편 다섯 글자, 하편 열두 글자. 무곡산장이 이 비밀을 알아내기 전에 무극존자가 돌아오면 된다. 진짜 구결을 넘겨줬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건 아니다.'
"완아의 것과 똑같은데? 그럼 우리 해석이 잘못됐다는 말인가?"
공손용기는 마지막 스무 글자가 적힌 종이를 쥐고 깊은 사색에 잠겼다. 공손용기 수하들은 방해가 될세라 숨소리마저 죽였다.
고요한 가운데 잔월 머리에는 우레가 울고 번개가 쳤다. 속에서 뭔가 탁 깨지며 가슴에 찬바람이 스쳤다.
'심령제압 완전히 깼구나.'
본인이 직접 심령제압을 시도한 것과 무극존자에 대한 존경심이 가신 것이 겹쳐서 무극존자에게서 받은 심령제압이 깨졌다.
'내게 준 비급도 가짜였구나. 일부러 잡히라고 강물에 던진 거였어. 상식적으로 내가 도망친다는 게 말이 안 되지.'
무사히 탈출한 잔월 때문에 의심이 더 커졌을 것이다. 공손완아와 마찬가지로 시종 잔월을 무곡산장으로 잘못된 구결을 보내줄 전달자로 여겼을 것이다.
'굳이 공손완아에게 내가 상편을 외워뒀다는 말도 했고. 사람의 심계가 어떻게 이리도 깊을 수 있지?'
"저들 넷을 죽이고 흔적을 깨끗이 지워라."
疊勁 첩경은
陰陽易 음양을 바꾸면 된다
- 작가의말
홍야차의 교훈 - 싸우다 지면 엄마 생각나는 건 고수도 예외 없음.
첩경에 관하여 - 잔월이 펼친 첩경은 취접의 것과 다릅니다. 효과는 같습니다.
심령제압 - 무극존자가 초반에 제자들에게 심령제압을 했습니다. 심지가 굳지 못한 아이들이 심령제압에 당해서 아주 빨리 포기했죠. 끝까지 남은 다섯 중 잔월 빼고 다 절실했습니다. 잔월은 공손완아 따라온 거라 아무 생각 없었던 거고요.
무극환허인 수정 관련 - 잔월 예상과 달리 비급 초반에 있는 글자를 바꿨습니다. 마지막 20글자를 두고 고민한 건 정말 쓸데없는 짓이죠.
무극존자가 잔월을 강에 던진 후 사흘이나 지나서 찾은 건, 무곡산장이 잔월을 찾아내어 비급을 가져가길 바랐던 겁니다. 무곡산장이 잔월을 쉽게 포기하고 떠나니 다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지요.
이쯤 해서 무극존자를 다시 소개해야겠습니다.
별호 : 전 봉황존자 현 무극존자
이름 : 임산월
특이사항 : 왕중양과 임조영의 후손, 임조영의 성을 따름
자 : 양파
호 : 까도까도
까도까도 양파 임산월 선생님 최신 프로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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