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월랑·치료
진선은 한자강의 도움으로 외공을 익히기 시작했고, 담두천은 육합권을 익혔다. 잔월은 도망쳐서 낙양으로 갈까 고민했지만, 낙양에 도착하기도 전에 홍야차나 동 파파에게 잡힐 것 같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어느새 봉황산장의 담이 진선의 키를 넘었고 부서진 작은 돌로 깐 길이 대문 밖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무극존자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몇 달만 지나면 봉황산 온 지 일 년인데, 배운 게 아무것도 없네?"
시장으로 향하면서 진선이 툴툴거렸다. 한자강이 몸이 불편해서 오늘은 잔월이 함께 했다.
"근데 대형은 왜 계속 남아있어? 공손완아 때문이야?"
"응. 부친이 그랬거든. 공손완아가 무극존자의 제자가 된 건 목적이 있다고. 나보고 공손완아를 도우라고 했어. 그런데 직접 묻지 말라고 해서 갑갑해 죽겠어. 너 혹시 알아?"
잔월 역시 공손완아가 뭔가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겨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형 도움을 받으면 낙양까지 무사히 갈 수 있어. 공손완아가 빨리 목적을 이루게 해야 해. 그래야 대형이 여길 떠날 테니까.'
시장에서 돌아온 잔월은 흑표에게 비밀 지령을 내렸다.
"공손완아가 뭘 하는지 알아내. 특별한 행동을 하면 눈으로 찍어서 나한테 보여줘."
여름이 끝날 때까지 별 성과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돌산에서 돌을 들고 산장으로 돌아온 잔월은 흑표가 눈을 꼭 감고 있는 것을 보았다.
흑표를 안고 어두운 곳으로 간 잔월은 눈을 뜨라고 했다. 흑표의 황갈색 눈동자와 잔월의 검은 눈동자가 서로 바라봤다.
'태극환허인, 상.'
놀랍게도 흑표의 눈에 태극환허인 상편 표지가 비쳤다.
'뭐지? 공손완아가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건가? 아니면 봉황산장에서 얻은 건가?'
며칠 뒤, 눈을 감은 흑표를 안고 방으로 들어간 잔월은 흑표의 눈에서 글자가 아닌 그림을 보았다.
'상편은 그림이고 하편은 글자야. 둘을 합쳐야 제대로 수련할 수 있는 걸까?'
아는 정보가 전혀 없으니 아무런 판단도 내릴 수 없었다. 잔월은 태극환허인 상편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상편에 있는 내용을 확인하면 공손완아가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난 왕가장에 숨긴 무공이 있어. 무극환허인 따위보다 훨씬 강한 무공일 거야.'
무공에 대한 욕심보다는 빨리 일을 끝내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흑표를 통해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글자는 조금 흐릿해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은 아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데, 공손완아는 밥 먹을 때를 빼곤 방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 게다가 상편을 어디에 숨겼는지도 몰랐다.
"잔월, 뭐해?"
오전에 산꼭대기까지 다녀오고 물을 긷는 건 여전했지만, 오후에 돌을 가져오는 일은 잔월만 했다. 한자강은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면서 몸이 아팠고 진선과 담두천은 외공 단련과 육합권을 익히는 데 몰두했다.
"두천, 넌 왜 포기 안 해?"
"사모님이랑 사부님께 고수가 되어 돌아간다고 약속했으니까. 사모님과 사부님 심법이 나랑 안 맞아서 초식만 배웠거든."
"그 육합권, 나한테도 가르쳐줄 수 있어?"
"물론이지. 너도 돌 나르는 거 그만두고 나랑 함께 육합권 수련하자."
그때 진선과 한자강이 돌아왔다. 한자강은 통증이 너무 심해 진선에게 업혀 의원에 가서 침을 맞았다.
"자강 형, 괜찮아?"
"많이 나았어. 어혈이 몰려서 아픈 거래."
"나 그거 치료할 줄 아는데."
잔월은 침을 놓는 수법을 전부 익혔다. 하지만 어디 아플 때 어디에 침을 놓는지 등 치료 방법에 관해선 무지에 가까웠다.
다행히 어혈 푸는 방법은 잘 알았다. 내공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치료법 중 하나여서 단무전이 자세히 가르쳤다. 왕가장에서 치료도 여러 번 했다.
"진짜?"
"근데 침이 너무 비싸."
"괜찮아. 내일 당장 침을 구해올게."
잔월 덕분에 오랜만에 모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무극존자가 말도 없이 사라진 후 웃을 일이 많지 않았다.
"나 혹시 넷째 덕분에 완치하는 거 아냐?"
한자강이 설레발을 쳤다. 여러모로 신비한 잔월이어서 담두천과 진선도 은근히 기대했다.
이튿날.
침을 담근 술에 불을 붙였다. 안 해도 되는데, 단무전이 가끔 하는 게 너무 멋있어 보여서 굳이 했다. 그러나 술 종류가 달라서 그런지 불이 얼마 안 가서 바로 꺼졌다. 그래도 뭔가 있어 보이는 행동에 일행의 기대감이 증폭했다.
"보자."
잔월은 기다란 침 몇 개를 한자강 등에 꽂았다. 손가락으로 침을 살짝 튕기며 반응을 점검했다. 그렇게 수십 곳에 꽂고 튕기고 나서야 정식으로 치료에 들어갔다.
"자강 형은 살아있는 게 기적이야."
어혈이 등 반 이상에 뭉쳤고 그 두께도 만만치 않았다. 단무전은 내공과 침술을 결합해 쉽게 어혈을 풀었지만, 내공을 쓸 수 없는 잔월은 침술로만 해결해야 했다.
"이러고도 살아있는 거 보면 자강 형은 몸이 정말 튼튼한 거야. 덕분에 치료가 쉬워지겠어."
잔월은 변두리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내공이 있다면 중심부터 시작하는 게 나았다. 치료 기간을 엄청나게 단축해 환자가 고통을 덜 받을 수 있으니까.
몇 개 혈도에 침을 꽂은 잔월은 손가락으로 한자강의 등을 꾹꾹 눌렀다. 살 밑에 어혈이 맺힌 한자강은 잔월이 누를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몸을 꿈틀댔다.
"형, 심호흡해. 크게 들이쉬고 참다가 정 참기 힘들 때 뱉어. 뱉을 땐 최대한 천천히 해야 해."
숨을 멈추면 혈도가 활발히 움직인다. 내공으로 어혈을 뽑아낼 수 없기에 흩어진 어혈은 한자강의 혈도들이 처리해야 한다.
"대형, 의원에 가서 피 맑아지는 약 좀 달라고 해. 치료 끝날 때까지 계속 마셔야 하니까 많이 사."
진선에게 부탁한 잔월은 어혈이 덜 뭉친 혈도에 침을 꽂았다. 보통 혈도 하나에 침 하나 꽂지만, 잔월은 스무 개도 넘는 침을 꽂았다.
"끅."
한자강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을 뱉었다. 침을 꽂은 곳이 불타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참아. 지금 그간 죽었던 혈도가 살아나느라고 그러는 거야."
침이 심하게 떨리자 잔월은 하나씩 천천히 뽑았다. 고통에서 벗어난 한자강이 숨을 돌리려는데 잔월이 바로 옆 혈도에 침을 꽂았다.
기존에 침 꽂았던 곳이 얼얼해서 감각이 채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바로 곁에서 빨간 숯덩이를 올려놓은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한자강은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버텼다.
진선이 약을 지어 돌아올 때까지 스무 개가 넘는 혈도가 고통받았다.
"약 마시고 푹 쉬어. 그리고 찌꺼기는 버리지 마. 목욕물에 넣으면 어혈이 풀리는 데 도움 될 거야."
약을 달이고 남은 약초 찌꺼기를 모아 목욕물을 끓일 때 넣었다. 뜨거운 목욕물에 들어가자마자 등을 지지는 느낌이 들어 한자강이 일어나려 했지만, 잔월과 진선이 힘으로 꾹 눌렀다. 한자강은 고통이 너무 심해서 나무통 안에 오줌을 싸버렸다.
그렇게 보름 연속 치료받은 한자강은 눈 밑이 까맣게 되었다. 고통으로 잠을 제대로 못 잔 여파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등이 마비되다시피 해서 감각만 남고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저녁에 약초 찌꺼기를 넣어 끓인 목욕물에 몸을 담근 한자강이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했다. 심하게 쿨럭거리다가 입으로 시커먼 핏덩이를 연신 뱉어냈다.
급기야 코로도 나왔다. 꽤 많은 양의 굳은 피를 뱉어낸 한자강은 식은땀을 흘리며 혼절했다.
"대형, 내가 보기엔 잔월 치료가 싫어서 자강 형 몸이 알아서 나은 거 같아."
담두천의 말에 진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잔월이 주는 고통이 싫어서 한자강의 몸이 노력해 어혈을 뱉어냈다는 게 둘의 공동 추론이었다.
입과 코 주변이 피투성이가 되어 혼절했지만, 한자강은 호흡이 깊어졌다. 등이 아파 늘 몸이 긴장한 상태를 유지했는데 지금은 편하게 이완된 게 눈에 보였다.
"아직 치료 안 끝났어. 그저 큰 고비 하나만 넘긴 거야."
잔월의 말에 기절한 한자강이 몸을 부르르 떠는 착각이 들었다.
엄청난 양의 어혈을 뱉어냈는데도 잔월의 치료는 멈추지 않았다.
"잔월, 거긴 어혈이 없는데 왜 침을 꽂는 거야?"
한자강이 기겁해서 질문했다.
"형 여기 혈도가 너무 약해. 이 혈도로 센 기운이 흘러야 어혈이 더 빨리 풀리거든."
"천천히 나아도 괜찮은데."
"나은 다음 무공 수련할 때 성취도 빨라질 거야."
잔월의 말에 한자강은 등에 불 붙인 것 같은 고통을 꾹 참아냈다. 초반엔 작은 통증에도 신음을 흘리고 비명 지르고 난리였지만, 이젠 웬만한 아픔은 잘 참아냈다. 외공을 익히는 한자강으로선 통증에 둔감해지는 게 반가운 일이었다.
"근데 공손완아 너무한 거 아냐? 맨날 방에 틀어박혀 있고. 식사 시간에만 나와 밥만 먹고 쏙 들어가고. 최소한 설거지 정도는 해야 하는 거잖아."
진선이 약 지으러 갔기에 담두천은 공손완아 흉을 마음껏 봤다.
"그러려니 해야지. 난 오히려 시중드는 사람도 없이 일 년 가까이 버틴 게 대견한데. 투덜대지 말고 육합권이나 펼쳐 봐. 나랑 자강 형이 좀 배우게."
담두천은 졸지에 상체를 벗고 엉덩이까지 드러낸 한자강 앞에서 육합권을 펼쳤다. 자세와 투로를 자세히 보게 하려고 엄청 느리게 시연했다.
"그냥 육합권이 아닌데? 엄청 강해 보여."
한자강이 아픔도 잊고 담두천의 육합권에 빠져들었다. 한자강 말대로 육합권 치고 투로가 복잡하고 초식 변화도 다양했다.
"사모께서 기본 투로만 잘 익히면 본인이 알아서 초식을 만들 수 있다고 했어."
평소 담두천이 수련할 땐 몰랐는데 천천히 시연하니 특별한 구석이 여럿 보였다. 한자강은 어려서부터 무공을 접했기에 보는 눈이 있었고, 잔월은 몸 쓰는 일을 타고났기에 본능과 같은 느낌으로 육합권의 특별함을 알아냈다.
피를 토하고 다시 보름이 흘러 한자강은 완치했다. 사실 꽤 위험했던 치료 과정이었다. 등의 혈도에 대한 자극이 너무 심해서 자칫 잘못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식하여 용감한 잔월이 자신만만한 태도를 시종일관 견지했고 결과도 좋았기에 누구도 엄청 위험한 치료였음을 몰랐다. 잔월 본인을 포함해서.
한자강이 완치된 덕분에 분위기가 한껏 살아났다. 매일 하는 일과도 익숙해져서 산꼭대기를 다녀오는 거랑 물 긷는 걸 무척 빨리 끝냈다. 돌 나르는 일은 포기하고 오후부턴 넷이 함께 육합권을 익혔다. 거기에 진선과 한자강은 외공 수련까지 결합했다.
그리고 깊은 가을이 되며 기다리던 무극존자 대신 스님 한 분이 나타났다.
殘月郞 잔월 소년
治療 병을 고치다
- 작가의말
선무당은 사람 잡고 돌팔이 잔월은 운 좋게 사람 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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