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개파
"대단하군."
점창검옹이 탁자를 쓰다듬으며 감탄을 거듭 뱉었다.
"사백, 어디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말씀입니까?"
배분이 둘 차이 나는 젊은 제자들은 검옹에게 말을 쉽게 못 붙였다. 검옹을 모시고 젊은 제자를 통솔하라고 보낸 두 중년 제자 중 하나가 모두의 궁금을 담아 질문했다.
"이거 단칼에 벤 거다."
큰 탁자는 아니라지만, 탁자의 반듯한 면이 칼 한 번 휘둘러서 벤 거라고 하니 믿기지 않았다.
"탁자 표면에 옻칠해서 너희가 발견하지 못한 거다. 진실은 늘 가려져 있어 자세히 살펴야 한다고 내가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느냐."
점창 제자들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그러나 검옹의 찌푸린 이마는 펴지지 않았다.
"괘씸해서 평생 모르고 살게 하고 싶지만, 멍청해도 점창 제자니까 참는다. 옻칠 내공으로 말린 거다."
"엄청 어려운 거 아닙니까?"
"어렵고말고. 장문인과 태상장로 정도만 부릴 수 있는 솜씨다."
"사조께 아룁니다. 제가 알기론 옻은 습기로 천천히 말려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내공으로 과연 가능할까요?"
단 씨 성을 쓰는 제자가 궁금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그래. 내가 뭐라 말하면 그러나보다 하는 정신머리로는 평생 고수가 될 수 없다. 의심까지는 아니어도 늘 의문을 품고 고민하며 살아야 한다."
검옹 칭찬을 받은 젊은 제자는 우쭐하며 동행한 사형제를 둘러봤다.
"음한 계열과 양강 계열의 내공을 적절히 조합해서 순식간에 말렸다. 나도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믿지 못했을 거다. 두 가지 내공을 동시에 펼치는 건 엄청 어려운 일이다. 나는 죽기 전까지 못 이룰 것 같구나."
"혹시, 두 명이 힘을 합친 게 아닐까요? 각자 음한과 양강 계열의 내공을 익혔을 수 있잖습니까."
"그럼 더 대단한 거지. 두 사람이 내공 성질과 양을 정말 정확하게 맞췄다는 거 아니냐. 자기 왼손과 오른손도 합이 안 맞을 때가 있는데 둘이 옻칠을 말릴 정도로 내공의 합을 이뤘다면 더 놀라운 일이다."
"희웅 소형제."
젊은 제자가 일행 주변을 기웃거리는 아이를 불렀다. 화산까지 동행한 점창 제자들로선 쌍둥이가 따로 움직이는 건 처음이었다.
굳이 배분을 따지자면 쌍둥이는 점창파 젊은 제자들의 사숙이다. 그러나 갓 여섯 살 된 꼬마를 사숙이라 부를 정도로 넉살이 좋은 사람은 점창 일행에 없었다.
"희영인데요. 희웅이는 도둑놈이에요."
"희영 소형제였군. 이 탁자는 누가 만드신 건가? 혹시 검선 어르신 솜씬가?"
"우리 사조가 만든 거예요."
"독고 소협의 사부는 검선 아니었는가?"
"아니에요. 칼 쓰는 분인데 검선 할아버지 제자예요."
개파식을 맞이해 폐관을 깬 검선은 월영고랑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자연스럽게 잔월은 화산파 제자가 되었고 자강과 두천도 화산파 삼대 제자에 이름을 올렸다.
"그럼 이 탁자 만들 때 칠한 거 말린 사람은 검선이신가 독고 소협 사부신가?"
"말리는 건 우리 사부가 다 했어요."
의기양양하던 단 공자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다른 제자들이 몰래 고개를 돌려 비웃음을 지었다. 출신이 고귀하다고 다른 제자를 깔보는 경향이 심했는데 자질이 출중해 무공 성취로도 이기지 못했다. 근래에 잔월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기색을 자주 비쳤는데 크게 한 방 먹고 굳은 모습을 보니 내심 고소했다.
"그래. 어떻게 한 거니?"
검옹의 질문에 희영이 탁자 앞에 다가가 팔을 넓게 벌렸다.
"합. 끝이에요."
검옹은 이해가 되지 않아 눈동자만 굴렸다.
"그러니까 이렇게 손을 펼친 다음 '합' 하고 소리 지르면 다 말랐어요."
단 공자의 얼굴이 서서히 풀리는 것과 대조되게 검옹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격공으로 내공을 투사해 말렸다고? 탁자에 내공을 넣어서 말린 게 아니고?'
격공으로 말리는 건 장문이나 태상장로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게다가 천천히 말린 것도 아니고 단번에 해냈다고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이거 언제 만들었어?"
"어제요. 청첩 안 보낸 곳에서도 와서 의자랑 탁자가 부족하다고 했어요."
질문이 끝났는데도 희영은 멀뚱히 서 있었다. 눈치 좋은 중년 제자가 탁자에 올린 당과를 권하자 그제야 당과를 집어 들고 공손히 인사하며 떠났다.
잔월을 문외 제자로 받아들인 아미는 개파식 하루 전에 미리 옥녀봉에 올랐다. 점창도 아미와 함께 도착했다.
아무리 검선이 버틴다고 해도 문파 구성원 다 합쳐도 스물 정도여서 깔보는 마음이 은연중 있었는데, 짧은 기간에 건물도 반듯하게 지었고 갖춰야 할 물건이 다 있었다.
오히려 대리에 있는 점창보다 훨씬 풍족해 보였다.
급조했다는 탁자와 의자에서도 명문의 품위가 느껴졌다. 게다가 그 탁자를 하루 만에 다 만들었다고 하니 깜짝 놀랄 일이었다.
'종남이 사라진 자리를 메울 문파는 화산이 유력하다. 금력만 받쳐주면 사십 년 안에 종남의 성세를 되찾는 건 문제도 아니다. 소림도 어려운 처지여서 방해할 여력이 없다.'
검옹이 인솔자가 된 건 단순히 무공이 강해서만은 아니었다. 수많은 싸움을 통해 나름대로 세상 흐르는 이치를 깨달았다. 개파식에서 각 문파의 태도를 보며 향후 강호 흐름을 파악할 적임자였다.
'독고잔월. 점창에 어울릴만한 여아가 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또래 중에 적당한 아이가 없었다.
오매불망 만나보고 싶었던 검선과 짧은 담소를 끝내고 객방에 돌아가면서도 검옹 뇌리에는 화산파 및 잔월과 친분을 쌓을 방법에 관한 고민으로 가득 찼다.
춥고 긴 밤이 지나 날이 밝았다. 점창파 제자들은 물독의 물로 얼굴을 깨끗이 씻고 새 도포로 갈아입었다. 검 손잡이의 가죽도 새것으로 바꾸고 검집도 반들반들하게 닦았다. 신발마저 깨끗이 털어 외모를 단정히 한 다음 화산파 삼청전으로 향했다.
원래 예상보다 훨씬 많은 손님이 올 예정이어서 대청이 아닌 연무장에 상을 차렸다. 점창은 아미 바로 곁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공동 청유관에서 두 분 오셨습니다."
독심호리의 중기 충만한 목소리가 옥녀봉 전체를 울렸다. 점창 제자들은 수염을 짧게 기르고 눈이 작아 간신배 인상인 독심호리를 조금 무시했었다. 그런데 내공 깊이만 해도 검옹 못지않았다.
"천 선배. 혹시 청유도관 아십니까?"
검옹의 질문에 천부전이 곁에 있는 제자를 쳐다봤다.
"청유관은 제자가 사십 명 정도 되는 도관입니다. 공동산 지역에선 점창에 비견하는 문팝니다."
그 뒤로도 수많은 소문파가 등장했다. 아미 제자는 몇몇 소문파를 제외하곤 모두 그 연원을 읊었다. 아미는 강호에 깊이 관여하진 않지만, 강호 정세를 손금처럼 훤히 들여봤다.
"무당파 장문 철섬자께서 오셨습니다."
무곡산장이 사라진 호북 일대에서 무당파가 최근 활약이 심상치 않았다.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있으면 젊은 제자들을 보내 처리했다. 대부분은 생포해 무당산에 가뒀고 일부 극악무도한 자들은 즉결처분하기도 했다.
"무척 소탈한 문파로군요."
검옹의 말에 천부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이 직접 개파식에 온 것도 그렇고 혼자 다니는 점도 특이했다.
"자성아. 무당파가 강호에서 활동한 게 언제부터지?"
"겨우 사오 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장문인은 백원선사하고도 백 합은 겨룰 것 같은데. 어떻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을까?"
천부전의 말에 검옹은 무척 놀랐다. 강하다는 건 알아봤는데 백원선사하고도 겨룰 정도임은 몰랐다.
"천 선배. 장문만 강한 문파가 아닐까요?"
"그건 아닌 것 같네. 무당 제자들이 사용하는 무공을 보면 소림이나 종남처럼 제대로 익힌 흔적이 보였다고 하네."
'설마 무당에도 왕중양 같은 종사가?'
전진교의 빠른 궐기도 당시엔 큰 충격이었다. 아미와 소림이 천 년 가까이 이룬 것을 백 년도 안 되어 해냈다. 왕중양이라는 무학 대종사의 역할이 절대적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심지어 왕중양 후손으로 밝혀진 무극존자는 가전 무공으로 천하제일이 되었지.'
"모용가 가주 일행 다섯 분 오셨습니다."
선이 굵은 무공으로 강호에 유명한 모용가의 가주가 부인과 자식 셋 데리고 등장했다. 모용가는 특이하게 오십만 넘으면 가주 직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래서 가주치곤 나이가 젊었다.
"남궁가 가주 일행 서른 분 오셨습니다."
남궁가의 무리에는 여자가 여럿 섞였다. 아미와 점창은 물론 미리 왔던 손님 중 젊은 제자들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모용가도 남궁가도 이 기회에 여식들에게 화산 구경시켜주려는 건가?'
단 공자는 혹시 괜찮은 처자가 없는지 눈알을 분주하게 굴렸다. 그러나 천희연과 비교하면 모두 반딧불이었다.
"소림 나한당주 해국 대사 일행 스물입니다."
청첩을 받은 문파는 연무장 서쪽에 앉게 하고 자발적으로 찾아온 문파는 동쪽에 앉게 했다. 서쪽은 자리 배치가 정해져서 군데군데 비었는데 동쪽은 먼저 온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소림은 청첩을 받지 못한 문파여서 동쪽 중간 즈음 자리에 앉았다. 동쪽 상석을 차지한 문파들은 화산이 자리를 소림에게 내주라고 요구하는 게 아닌지 걱정했는데, 아무 말도 없이 소림을 중간에 안배하자 화산에 대한 호감이 부쩍 늘었다.
"안 온 문파를 세는 게 훨씬 빠르겠어."
아미 제자가 붓으로 방문한 문파와 인원수를 적으면서 투덜거렸다.
"해남파까지 왔어."
"겨울이어서 날짜 맞추기 어려웠을 텐데."
겨울이면 북방은 지류가 얼어붙는다. 큰 강은 얼 염려가 없지만, 지류가 얼면서 물흐름이 약해지고 느려진다. 유입되는 강물 양이 적어 수위가 낮아지면 큰 배는 뜨지 못한다.
남쪽은 그나마 괜찮지만, 비슷한 이유로 물이 강수가 많은 여름보단 줄어든다. 게다가 수로가 발달한 남쪽은 말 달리기 적합한 길도 제대로 닦이지 않았다.
"바다로 왔겠지. 바다는 겨울에 얼지 않으니까."
"총 얼마 왔어?"
원래는 둘이 함께 기록해야 하는데, 자성이 천부전과 검옹 궁금을 풀어주느라 바빠서 자정 혼자서 다 적었다.
"문파로는 팔십육 개. 사람은 육백 명 가까이 돼."
"인원이 총 스물하나인 문파 개파식치곤 너무 성대한데."
월영고랑과 잔월 의형제 셋 합쳐서 겨우 스물을 넘었다.
손님 숫자에 비교해 의자가 모자라 배분이 낮은 자들은 앉지도 못했다.
"근데 이상하게도 젊은 여자가 많아."
근 십 년 안에 가장 길하다는 날을 고른 화산파는 정해진 시간에 개파식을 시작했다. 개파식은 전진교 절차를 따랐다.
연월검을 허리에 찬 종리형이 단단한 표정으로 개파식을 주관했다. 지파 전수자 몇은 무공이 평범했지만, 화산파는 절반 이상이 쉽게 볼 수 없는 고수로 구성되었다.
"화산파의 개파를 축하하여 청유관에서 준비한 선물이오."
청첩을 받고 온 문파들이 도착 순서대로 축하 선물을 전했다. 아미와 점창은 전날 미리 줬기에 생략했다.
'미리 주길 잘했어. 다들 귀한 선물 준비했구나.'
점창은 검선 명성을 생각해 최대한 귀한 선물을 준비했다. 그러나 화신 인근 문파들이 준비한 선물과 비교하니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華山 화산에서
開派 개파하다
- 작가의말
화산 : 아니, 해남파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해남 : 의리로 왔소.
화산 : 와줘서 감사하오.
해남 : 다른 화산파면 안 왔지. 글쇠 손에서 탄생하는 화산파니까 우리도 온 거 아니겠소.
화산 : 설마, 당신들도?
해남 : 맞소. 우린 시작이 아주 우스웠지. 젠장맞을 글쇠 같으니라고.
화산 : 좀 자세히 들려주시겠소?
해남 : 아니, 희대의 명작 절세신응을 안 봤다는 말이오?
화산 : 희대의 명작? 그럼 글쟁이가 그새 퇴보했다는 말이오? 이 글이 희대의 명작이라고 생각하는데.
해남 : 46만 자 정도 되는 글을 4주에 완결했소. 모태솔로로 알고 있으니 이혼하는 것도 아닐 텐데. 굳이 4주로 끝낸 이유가 늘 궁금하오. 그런 면에서 희대의 명작이오.
화산 : 혹시 우리와 동병상련의 문파가 더 있소?
해남 : 소림이나 무당이나 아미는 못 건드리고, 우리처럼 우스워 보이는 문파만 건드리는 듯하오.
화산 : 그러니까 실존 문파는 감히 언급도 못 하고 우리처럼 허구나 다름없는 문파를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말이군. 아주 악질인 놈일세.
해남 : 김용 선생이 신조협려 윤지평을 허구 인물로 수정했소. 글쇠는 쫄보니까 감히 실존 문파나 인물은 함부로 못 건드리는 듯하오.
화산 : 아니, 그럼 완안덕명은?
해남 : 후손이 없으니까 막 지른 게 아닐까?
주석 : 윤지평은 전진교 6대 장교(장문인)입니다. 완안덕명은 18대 장교입니다. 완안덕명은 소림 장문 해인이나 장삼풍과 철섬자를 비롯한 다섯 제자와 마찬가지로 실존 인물입니다. 진우량이나 진선 등도 실존이고요. 그러나 본 글은 순수한 허구로 실존 인물에 대한 깊은 고찰 없이 이름만 가져다 썼습니다.
Comment '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