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궁·사영
태을산 서북쪽엔 거인이 칼로 깎은 듯한 절벽이 있었다. 발 디딜 데도 없이 매끈하여 고수도 오르기 힘들었다.
거기엔 왕중양이 자신을 가뒀던 동굴이 있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왕중양은 젊은 시절 의병을 조직해 금나라에 대항했는데 송 황실의 무능으로 몰살당했다. 뜻이 꺾인 왕중양은 종남의 동굴에 자신을 가두고 해풍(害風 - 미친놈)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불렀다.
후에 부인이 된 임조영을 만나 다시 웅심을 되찾았으나, 그땐 이미 송 황실이 장강 이남으로 도망간 후였다. 속세의 미련을 완전히 털어버린 왕중양은 제자 일곱을 받고 도교의 여러 갈래를 하나로 통합했다.
다섯 번째 제자를 받을 때 도를 설파한 정자에 전진(全眞)이라는 이름을 달아줬다. 왕중양이 죽은 후 일곱 제자는 전진교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타났다. 그중 구처기의 전진용문파만 크게 알려지고, 마옥의 전진우선파(遇仙派)나 담처단의 전진남무파(南無派) 그리고 마옥의 부인인 손불이의 전진청정파(淸淨派) 등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손불이가 손자병법을 쓴 손무의 후손이라고요?"
"그래. 부군인 마옥이 출가해 도사가 된다니까 검을 들고 왕중양 조사를 죽이려 했어. 그러다 조사의 인품과 무공에 반해 마지막 제자가 되셨어."
상관소혜는 같은 빙련기공을 익혀서 그런지 유독 손불이를 좋아했다.
"왕처일의 전진곤유파(昆嵛派)나 학대통의 전진화산파(華山派)나 유처현의 전진수산파(隨山派)는 전인이 있는지 몰라. 우선파나 남무파 그리고 청정파는 가끔 후인이 종남에 와서 무공도 겨루고 심득을 교류하기도 했었거든."
상관소혜는 긴장을 풀려고 전진교 역사를 셋에게 들려줬다.
"잔월, 사람 죽일 수 있겠어?"
혁중이 불쑥 질문했다.
"사람을 살리는 게 협이라면 살릴 것이고 죽이는 게 협이라면 죽일 것입니다."
종리형이 코를 찡긋거렸다. 대사형을 꼭 닮은 얼굴로 대사형과 똑같은 말을 하니 가슴 어림이 울렁거려 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각오는 좋다만, 하나만 기억해라. 첫 살인을 하면 이상한 느낌이 온다. 그 느낌은 네 몸을 떨리게 할 수도 있고 네 손발에서 감각을 앗아갈 수도 있다. 아니면 모든 걸 잊고 사람 죽이는 데 몰두할 수도 있고."
상관소혜가 혁중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방금 말한 건 초반 몇 번의 살인에서 내가 직접 겪었던 것들이다. 너는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보다 심할 수도 있다. 첫 살인 때 나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었다."
"의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부친이 절 지켜줄 겁니다."
잔월은 허리에 찬 검을 툭툭 건드렸다.
독고경천은 지세가 낮고 흙이 푸석한 곳에 묻혔다. 큰비가 내려 흙이 쓸려나가서 함께 묻은 검이 드러났다.
천만다행으로 그걸 발견한 사람이 독심호리였다. 그리고 때마침 종리형이 정신 차리고 무덤을 찾았다. 꿈에 독고경천이 나타나 무덤에 물이 찼다고 투정해서 정신을 차린 종리형이 확인하러 갔었다.
둘이 합심하여 독고경천을 묘연향의 무덤에 같이 묻었다. 검도 천으로 잘 감싸서 무덤 바로 곁에 묻었다. 태을산으로 오며 잔월은 양친 무덤에 첫 절을 올렸고 부친이 사용하던 연월검을 꺼내 허리에 찼다.
"죽이는 것보다 버티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너무 약하게 보이면 저들이 의심할 수 있으니, 가끔은 과감하게 손을 써야 할 때도 있다."
"잔소리 그만해."
상관소혜가 혁중의 잔소리를 끊어버렸다.
"이 사형을 찾아 함께 행동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작 시작하려니 종리형은 속이 무척 떨렸다. 대사형 다음으로 든든한 독심호리가 자꾸 떠올랐다.
"우리가 실패하면 이 사형이 남아서 사부를 지켜야 한다. 괜히 이 사형 끌어들였다가 돌아갈 길마저 없는 처지가 되진 말아야지."
게다가 독심호리가 현재 종남에 있는지도 모른다. 괜히 독심호리 찾느라 행적이 발각되면 일을 망칠 수 있다.
정해진 시각이 되자 잔월이 먼저 움직였다.
"경공은 대사형에 근접한 거 같습니다."
잔월은 가파른 절벽을 평지 걷듯이 쉽게 올랐다.
"빠르기는 한데 자연스러움은 대사형에게 훨씬 못 미쳐. 겨우 열네 살이라는 걸 생각하면 무척 대단하긴 하다만."
"말짱한 정신으로 산 게 두 달이나 될까 싶은데 십사 년이나 흘렀다니."
"우리도 출발하자. 막내는 바로 사부 지키러 가고 아홉째는 나랑 같이 잔월을 도와 놈들을 죽이자. 최대한 빨리 죽여서 잔월 손에 피를 덜 묻히게 해야 한다."
둘에게 당부한 상관소혜는 자강과 두천에게도 당부했다.
"혹시 용문파 제자들이 오면 저기와 저기에 불을 질러라. 자강은 오래 달리지 못하니 저쪽으로 가서 계곡물에 뛰어들어라. 두천이는 알아서 도망가고, 혹시 잡히면 독고경천이 보냈다고 해라. 그럼 바로 죽이진 않을 거다."
잔월의 신형이 동굴로 사라지자 셋은 바로 출발했다. 한자강과 담두천도 돕고 싶지만, 둘의 경공 수준으론 깎아지른듯한 절벽을 오를 자신이 없었다.
한편.
잔월이 동굴로 들어가자 여기저기 널부러져있던 아홉 무인이 어슬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붉게 충혈된 눈과 진한 술 냄새가 무슨 상황인지 충분히 알게 해줬다. 육양화의 문양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아홉은 술로 두려움을 달랬던 거였다.
"아직도 살아 있었느냐? 나 같으면 검으로 목을 베고 자결했을 텐데."
잔월은 일부러 목소리를 깔았다. 몸을 일으키며 검자루를 잡던 아홉이 동시에 멈췄다. 눈을 너무 크게 떠서 눈알이 튀어나오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검을 뽑는 놈은 죽인다."
잔월은 독고경천을 흉내 내며 상관소혜 등이 안전하게 절벽을 기어오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었다. 셋 중에서 경공이 가장 나은 상관소혜도 아무 기척 없이 절벽을 기어오를 자신이 없었다.
"오늘을 기다렸다."
사람 입에서 나왔지만,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방불케 했다.
"그날 검도 못 휘두르고 널 보낸 다음 깨달았다. 숨을 쉰다고 살아있는 게 아님을. 그래서 우린 이곳에서 천한 간수 노릇을 하며 널 기다렸다. 널 죽이든지 네 검에 죽든지. 우리가 살려면 널 만나야 했다."
잔월은 연월검을 천천히 뽑았다. 검푸른 검날이 새벽 공기를 싸늘하게 얼렸다.
'월영도법은 도로 가장 큰 위력을 내지만, 검으로 펼쳐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병장기가 아니라 내 목적과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 그리고 그 둘을 내가 명확히 인지한다는 것이다.'
잔월의 신형이 사라졌다. 독고경천은 사람 죽일 때만 섬전도의 경공을 사용했다. 대련하거나 상대를 죽일 의도가 없으면 섬전도를 펼치지 않았다. 상소룡의 팔을 자를 때도 죽일 마음이 없었기에 섬전도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검선과 사형제 외에는 섬전도의 경공을 알지 못했다. 갑자기 사라진 잔월의 신형에 아홉 무인은 당황하여 손에 든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만월.'
실초 안에 허초를 숨긴 초식. 이론적으론 완벽하지만, 실전에선 그만한 위력이 나지 않았다. 이론적으론 영결팔법 중 가장 위력이 강해야 하는데 대련해보면 상대가 가장 쉽게 피하는 초식이었다.
그러나 섬전도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며 펼치니 상대 무기를 자르고 목도 잘랐다. 첫 출수에 두 명의 목숨을 앗았다.
'의부가 말한 게 이거구나.'
팔다리가 저렸다. 숨은 가쁜데 겨우 목까지 갔다가 도로 밖으로 나가는 얕은 숨이었다. 가쁘게 쉬어도 숨이 부족했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줬는데 힘이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느낌이 없었다.
'상현월.'
다섯에서 열 사이 숫자의 적을 상대할 때 상현월을 펼치면 이론적으론 죽을 일 없다고 했다. 몸 상태가 정상이지 않으니 잔월은 섬전도의 경공을 펼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적을 죽이는 것보다 시간 끄는 게 목적임을 잊지 않고 수비 초식을 펼쳤다.
상현월이나 하현월이나 반달인 건 마찬가지다. 그저 밝은 부분이 서쪽이냐 동쪽이냐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월영도법에선 그 차이가 컸다.
절반은 실이고 절반은 허인데, 실을 보여주는지 허를 보여주는지 차이다. 실을 보여주면 수비에 치중하고 허를 보여주면 공격에 치중한다.
'상현월과 하현월을 합치면 만월이구나. 만월은 실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실과 허를 번갈아 혹은 동시에 보여주는 게 아닐까?'
중요한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데 남은 일곱은 잔월에게 차분히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생사를 도외시한 일곱은 공격 일변도로 잔월을 덮쳤다.
'허초가 안 먹히는 상대다.'
잔월은 오른편에 있던 자들의 공격은 막고 왼편에 있던 자들의 공격은 흘렸다. 일곱 가닥 강맹한 기운이 잔월 몸에 들어왔다. 잔월은 음양무계와 기성해를 동시에 운용해 적의 내력을 온몸 혈도에 분산한 후 피부 표면으로 내보냈다.
적대적인 기운을 빠르게 밖으로 내보내며 잔월 옷이 부풀러 세차게 펄럭였다.
'잔월.'
언뜻 무방비로 보이는 잔월에게 일곱은 쉽게 덤벼들지 못했다. 조금 전엔 꽤 만만해 보였는데 거의 수비를 포기한듯한 모습에 엄청난 위압감을 받았다.
"우리 그간 새겼던 맹세를 잊지 말자."
주춤하던 일곱이 동시에 기세를 키우더니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잔월을 덮쳤다.
'만월.'
잔월의 몸이 밝게 빛났다. 창문을 뚫고 들어와 외로운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달빛이 되었다.
'이거였구나.'
잔월이 만월이 될 때면 무적이라던 월영고랑의 말이 이해되었다. 허로 가득한 잔월을 순식간에 실로 채워 만월이 되었다.
공격할 때 허초와 실초를 섞으면 상대는 어딜 수비할지 고민하느라 대응이 느려진다. 수비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허와 실을 섞어 상대가 어딜 공격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결국, 비슷한 수준에선 누가 누굴 더 잘 속이냐로 승패가 갈린다.
허초와 실초를 섞는 이유는, 순수한 실초만으론 상대가 수비를 고민할 정도로 넓은 범위를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허초를 섞어 상대가 다른 곳도 공격받는다고 오판하게 해야 한다. 실초를 허초로 숨기거나 허초를 실초로 가장해 상대를 속이면 큰 힘을 안 들이고 이길 수 있다.
'만월은 실초와 허초의 경계를 허물었다.'
실이 언제든 허가 되고 허가 언제든 실이 될 수 있는, 그래서 상대 어디든 공격할 수 있는 초식이 만월이었다.
잔월 몸에서 쏟아진 달빛이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달빛이었다. 없다고 여기면 시린 빛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찌르고, 있다고 여겨 피하거나 막으면 덧없이 사라졌다.
일곱 무인이 그간 마음이 피폐했고 술로 손발이 둔해졌다지만, 차분하게 싸웠으면 잔월이 궁지로 몰렸을 거다. 그러나 잔월 얼굴과 연월검 때문에 독고경천으로 오해하고 목숨 아끼지 않고 마구 덤벼들었다.
덕분에 잔월은 자신보다 강한 일곱 무인을 일 합에 모두 베어버렸다.
'이래서 실전이 필요한 거구나.'
잔월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연월검을 검집에 넣었다. 혹시 누군가 검선을 비롯한 갇힌 사람을 해칠까 봐 안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성질 더러운 아홉 때문에 감옥엔 다른 간수가 없었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작은 감옥엔 십수 명의 사람이 묶여있었다. 검선 얼굴을 모르는 잔월은 가만히 서서 상관소혜 등이 오기를 기다렸다.
"경천이냐?"
"선고(先考 - 죽은 아버지에 대한 존칭)의 존함입니다."
"경천이 그날 살아서 아들을 얻은 건가?"
"당일 돌아가셨습니다. 묘연향이 선비(先妣 - 죽은 어머니에 대한 존칭)입니다."
"그 와중에 거짓말까지 했구나. 기특한 녀석. 혹시 완안덕명이 죽었느냐?"
"하늘이 눈이 없어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눈이 없긴. 나더러 손수 목을 베라는 것이지."
그때 상관소혜 등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사부!"
盃弓 잔에 비친 활을 보고
蛇影 뱀인 줄 알고 겁먹다
- 작가의말
배궁사영
어떤 사람이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술대접을 받았습니다. 근데 술잔에 작은 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적하면 친구 호의를 무시하는 것 같고 겁쟁이 같다는 생각에 그대로 마셨습니다.
그러나 뱀이 속에 들어간 것 같아 마음의 병이 생겨 시름시름 알았습니다. 뒤늦게 사연을 전해 들은 술대접한 친구가 앓는 사람을 다시 집에 초대했습니다. 술잔에 술을 부으니 또 뱀이 나타났습니다.
기겁하는 사람에게 친구는 벽에 걸린 활을 가리키며, 뱀이 아니라 활이 비친 모습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병이 가시듯 사라졌습니다.
자라에게 물린 놈이 솥뚜껑 보고 놀라고 뱀에 물린 놈이 밧줄 보고 기겁하죠. 아홉이 잔월에게 쉽게 패배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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