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동·운룡
"흑 장로. 괜찮으시오?"
당한백의 목소리엔 걱정이 듬뿍 담겼다.
"괜찮소."
둘은 이틀 만에 오독교 무리를 따라잡았다. 당한백이 손가락 반 마디 정도 길이를 한 작은 송곳을 심장에 맞춰 교주와 소교주를 동시에 처리했다.
"옳은 일만 하며 살아도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소."
잔월의 말에 당한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일을 하여 즐겁다면 사람들이 다 옳은 일을 하려고 할 거요. 옳지 않은 일을 해야 즐거울 수 있는 세상이니 협이 귀한 거 아니겠소?"
"그럼 세상이 잘못된 거요?"
잔월은 사고의 깊이가 당한백도 감탄할 정도로 깊었지만, 넓이는 부족하다. 당한백은 자신이 말을 잘못하면 이 무시무시한 소년이 세상을 어지럽힐 수 있다는 생각에 신중하게 입을 뗐다.
"산에 있는 맹수는 말이오. 가끔 마을에 내려와 가축을 집어가오. 웬만해선 사람을 해치진 않지만,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소를 물어가거나 하면 마을 사람들이 생계를 걱정해야 하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맹수를 죽이려 하지 않소."
"마을을 이미 자기 사냥터로 인식한 맹수를 그대로 두는 건 위험한 일이오. 그러나 그 맹수를 죽이면 멧돼지나 토끼와 같은 짐승이 번성하게 되오. 여름 혹은 가을마다 이 짐승들은 마을로 내려와 힘들게 밭을 갈고 풀을 뽑고 물을 주며 경작한 농작물을 먹어치우오. 멧돼지라는 놈은 화가 많아 보이는 족족 들이받기도 하오."
"맹수가 마을에 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멧돼지나 토끼를 먹어치워 마을을 돕기도 한다는 말이오?"
"돕는 게 아니라 맹수는 그저 자신이 태어난 대로 살아가는 거요. 세상이 이렇게 빚어진 데는 우리가 짐작기 어려운 깊은 뜻이 있을 거요. 세상이 잘못된 게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 잘못된 게 아닐까? 세상이 자기 생각대로 돌아갔으면 하는 인간의 헛된 욕심 말이오."
잔월은 이마를 찌푸리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다행히 무당에서 훌륭한 가르침을 많이 받은 후여서 고민은 하되 고뇌에 빠져 심마가 찾아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시 독곡에 돌아가니 남궁가 무인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닌 탓에 칠신병 흔적이 가려졌다. 내공이 심후하고 맷집도 좋아서 쉽게 죽을 존재가 아니기에 걱정을 내려놓고 바로 귀양으로 향했다.
쉬지 않고 달려 귀양에 도착하니 성문에 당문 표식이 있었다. 표식을 해석한 당한백은 잔월을 데리고 객잔으로 향했다.
"오빠, 왔어요?"
당문의 말괄량이 당선령이었다. 당한백이 극구 주장해서 데려온 아이로 미모와 무공 모두 뛰어난 당문의 보물이었다.
"다른 사람은?"
"무곡신공 익힌 무인들 처리하러 갔어요. 공손무기는 사흘 전에 흑백무상을 찾아 비동에 들어갔어요."
"나랑 함께 무곡산장을 쫓는 소협이다. 강호에 유명한 옥면금강이란다."
당선령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잔월을 쳐다봤다.
잔월은 두 남매에게 회포를 풀라고 자리를 비켜줬다. 그간 쌓인 피로도 있고 머리를 어지럽히는 고민도 있어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다.
"어때?"
"뭐가요?"
"옥면금강 말이야. 정말 잘생기지 않았어?"
"에이. 무공도 얼굴도 오빠가 훨씬 나아요. 강호 소문 믿을 게 못 된다더니."
"나 기분 좋아지라고 말하는 거지?"
무공도 잔월이 더 강하고 얼굴은 압도적이었다.
"남자라면 얼굴이 넓적하고 눈썹이 굵고 눈이 부리부리해야죠."
당한백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 먼 하늘을 쳐다봤다.
'큰일이다. 흑룡곡에 처박혀 있어서 애가 이상해졌어.'
당선령이 말한 건 당문 남자들의 특징이었다. 어려서부터 눈에 보이고 친근하게 지낸 남자들이 당선령에게 잘생긴 기준이 되어버렸다.
"젠장. 나도 모르겠다. 술이나 마시자."
잔월만 설득하면 된다고 여겼는데, 더 큰 산이 하나 있었다. 애지중지 자란 당선령의 고집은 당한백 열이어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셌다.
둘을 맺어주려던 생각은 뒷전에 버리고 뒷맛이 살짝 쓴 술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 독한 술이 배에서 불로 변해 피로와 번뇌를 태웠다.
당문의 다른 사람은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갔던 일은 어찌 되셨습니까?"
인솔자는 당한백의 작은 삼촌이었다.
"한 놈도 빠짐없이 다 죽였다. 갖고 나온 독이 부족해 남은 주검은 태워 없애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당문은 어릴 때부터 정신 교육을 확실히 한다. 백 명이 넘은 자를 죽이고 시체까지 훼손했지만,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기에 살인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당문 일행은 날이 밝자마자 당한백에게 남은 암기를 모두 건네주고 흑룡곡으로 떠났다. 당선령과 잔월을 어떻게든 이어보려던 당한백의 계획은 시작도 전에 요절했다.
당한백은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진 잔월이 깨기만 기다렸다.
"비동은 어떤 곳이오?"
잔월은 잠에서 깨자마자 당한백을 찾아 공손무기가 들어갔다는 비동에 관해 캐물었다.
"운룡곡으로 가는 지하 동굴의 이름이오. 끝까지 쫓을 생각이오?"
잔월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이 일은 반드시 끝장을 봐야 하오. 안 그러면 평생 후회할 것 같소. 지금 당장 흑백무상 찾으러 떠나고 싶소."
오독교 교주와 소교주는 당한백이 죽였다. 그러나 옳은 결정인지에 관한 고민은 여전히 잔월을 괴롭혔다. 빨리 공손무기를 찾아 무극환허인을 완전히 없애고 이번 출행을 마무리해야 마음이 조금 편할 것 같았다.
"흑 장로.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되오. 협을 지키기 전에 자신부터 지키시오."
당한백의 말에 잔월은 한 대 세게 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고민하는 건 협과 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수많은 생각이 동시에 떠오르며 머리를 어지럽혔다. 당한백이 했던 맹수 이야기가 가장 또렷하게 떠올랐다.
'세상은 음양으로 나뉜다. 악이 음이라면 협은 양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악인 일이 누군가에겐 협이다. 음양은 상대적이고 악과 협도 상대적이다. 맹수에게 죽은 멧돼지에겐 맹수가 악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겐 맹수가 협이다.'
'흑표는 작은 동물을 잡아먹고 산다. 죽여서 먹는 행위는 흑표에게 협이다. 살리는 것도 협일 수 있고 죽이는 것도 협일 수 있다. 피로 이어진 가족을 죽이거나 죽게 내버려 두는 건 악이다. 그러나 둘의 죽음은 세상엔 협이었다.'
'내 협이 틀린 게 아니다. 세상의 협이 이번에 내겐 악이었을 뿐이다. 협객이라면 더 큰 협을 위해 자신의 작은 협을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간 꽉 막혀있던 것이 뚫리며 생각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수많은 생각으로 머리가 더욱더 어지러웠지만, 마음은 조금씩 편안해졌다.
당한백은 총기가 다시 돌아온 잔월 눈을 확인하고 시름이 놓였다. 갑자기 깊은 생각에 빠져서 심마가 찾아왔나 걱정했는데 잔월의 눈동자는 밤하늘 별보다 찬란했고 가을 하늘보다 맑고 깨끗했다.
'당선령 이 멍청한 것.'
그간 마음고생으로 볼살이 빠진 잔월은 전보다 훨씬 잘생겨 보였다.
"흑 장로. 혹시 자강과 두천이라는 사제 중에 나처럼 얼굴이 넓적하고 눈썹이 짙고 눈이 부리부리한 사람이 있소?"
"그러고 보니 자강이 당 대협을 조금 닮은 것 같소."
밥과 채를 배부르게 먹고 바로 흑백무상을 찾아 떠났다. 당한백은 제갈속에게 들어서 흑백무상들이 자주 머무는 곳을 몇 개 알고 있었다.
"흑백무상을 이기면 운룡곡에 갈 수 있소. 운룡곡에서 심마해로 갈지는 운룡곡에 가서 결정하면 되오. 심마해로 안 가면 시험 없이 바로 운룡곡을 떠날 수 있소. 심마해로 가려면 멸세교 교도가 되어야 하오."
"공손무기가 멸세교로 왜 찾아간 거요?"
"그건 잘 모르오."
"멸세교 교도가 되면 서로 죽이지 못한다는 규정이라도 있소?"
공손무기가 목숨을 부지하려고 심마해로 숨어든 게 아닌지 의심되었다.
"멸세교는 철저한 강자존이오. 정당하게 대결을 신청하고 싸우면 상대를 죽여도 상관없다고 하오. 그런데 제갈속도 심마해로 들어가 본 적이 없고 그저 멸세교 무인에게 전해 들은 거라고 하오. 실상은 다를지도 모르오."
연속 세 곳을 허탕 치니 힘이 조금 빠졌다. 당한백과 잔월은 경치가 무척 좋은 산을 발견하고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당 대협. 이런 꼴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걸 무곡산장이 모르진 않았을 텐데.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시오?"
"공손가는 황제 후손이오. 대대로 관동에서 살았소. 공손찬이 죽은 후 유비가 그 후손을 보살폈소. 유비가 죽은 다음 공손가는 왕 자리를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몄소. 그러나 제갈무후에게 발각되었고 같은 도당인 마속이 목을 잘렸소. 공손찬 후손들은 계획이 틀어지자 제갈무후가 쓴 팔진도해를 훔쳐서 도망쳤소. 그리고 당나라 때 무곡산장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다시 나타났소."
"그렇다면 운룡곡이나 심마해의 진을 만든 게 제갈무후가 아니라 무곡산장이라는 말이오?"
"그렇소.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고 왜 멸세교의 무리가 들어갔는지는 나도 모르오. 운룡곡주가 출입을 통제한 이유나 흑백무상을 내보내 운룡곡으로 사람을 안내하는 이유도 모르겠소."
'설마 멸세교와 무곡산장이 같은 편인가? 그렇다면 굳이 무극환허인을 탐낼 이유가 없었을 텐데. 멸세교가 말을 안 들어서 무력을 보유하려 한 건가?'
추론할 근거조차 없으니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을 얻지 못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다. 공손무기를 잡아 무극환허인을 없애면 된다.'
당한백이 아는 곳을 모두 돌아봤지만, 흑백무상을 찾지 못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이미 돌아본 곳을 계속 돌아야 하오. 이게 가장 빠른 길일 것이오."
보름이 지나서야 둘은 겨우 흑백무상을 만날 수 있었다.
"당 대협과 독고 대협 맞으시오?"
"그렇소."
"곡주 명을 받고 두 분 모시러 왔소."
대결도 생략하고 둘을 바로 배에 태웠다. 배는 복잡한 수로를 따라 움직이다가 넓은 계곡에 들어갔다.
"물에 젖어서 안 되는 물건이 있으면 여기 넣으시오."
잔월은 비급을, 당한백은 독과 암기를 가죽 주머니에 넣은 후 몸에 동여맸다.
"삼 장 깊이에 동굴이 여럿 있소. 날개 문양이 있는 동굴로 들어가서 쭉 가면 다른 자가 기다릴 것이오."
잔월과 당한백은 바로 물에 뛰어들었다. 물살이 세고 부유물이 많아 시야가 흐렸지만, 둘은 흑무상이 말한 동굴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동굴로 들어가 한참 헤엄치니 밝은 불빛이 보였다. 불빛을 따라가니 체형이 다른 흑백무상이 둘을 기다렸다.
"비동에 오신 걸 환영하오. 우리가 두 분을 운룡곡으로 모시겠소."
동굴을 따라 걷다가 배를 탔다. 동굴이 넓지 않아 배도 무척 작았다. 네 명을 태운 배는 세찬 물살에 휩쓸리면서도 용케 뒤집히지 않았다.
배에서 내려 걷다가 또 배를 타고, 배에서 내리면 또 걸었다.
[진법이오.]
걸을 때도 진법이 있었고 배를 타고 진법을 통과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며칠 정도 동굴 안에서 오가다 보니 방향도 잊고 왔던 길도 다 잊혔다.
"여기부터 운룡곡이오."
동굴을 벗어나니 무릉도원이 둘을 반겼다.
秘洞 비동을 통해
雲龍 운룡곡에 이르다
- 작가의말
“흑 장로. 그간 마음고생이 심한 것 같소. 얼굴이 홀쭉하오.”
“젖살 빠진 거요.”
“다음 계획은 어떻게 되오?”
“심마해로 가야겠소. 거기라면 내 왼팔에 봉인한 흑염룡을 감당할 거요. 우선 힘순찐 컨셉으로 고구마 잔뜩 먹인 다음, 흑염룡을 개방하고 참교육 들어갈 거요. 탄산에 취해 해롱거릴 때 사실 내가 운명으로 정해진 천마였다는 사실을 뜬금없이 밝혀서 경악에 빠뜨릴 거요.”
잔월과 헤어진 당한백은 총명한 전화기를 꺼냈다.
“수리수리마수리.”
인공지능 수리가 대답했다.
“무엇이든 질문하세요.”
“키워드. 15세, 젖살, 힘순찐, 천마, 흑염룡.”
“결과 총 1건 나왔습니다. 중이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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