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각·진천
해등 법사를 비롯한 열여섯 스님은 엄중한 기색으로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렸지만, 무극존자는 동네 마실 나온 한량처럼 어슬렁거렸다.
그러나 장성천과 잔월을 비롯한 일부는 무극존자의 몸에서 꿈틀대는 수많은 내공 줄기를 확인했다. 무혈지체인 무극존자는 내공 충돌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에 집중력과 심력만 받쳐주면 얼마든지 많은 내공을 동시에 움직일 수 있다.
하나의 운기법을 여러 토막으로 내서 동시에 운기 하는 잔월보다 아득히 높은 경지였다.
"혹시 왜 내 무공 이름이 진천각인지 궁금한 적 없소?"
누구도 무극존자의 말을 받지 않았다.
"분명히 땅을 울리는 무공인데 왜 진지각이 아니고 진천각인지 궁금한 적 없냐는 말이오."
소림사 중들의 얼굴과 마음에 불안과 초조가 스멀스멀 스며들었다.
"왜냐면 진천각은 격공을 전제로 한 무공이거든. 사실 땅을 울린 것도 바닥을 통해 내공을 전달한 게 아니라 그냥 격공으로 내공을 보내 땅을 울린 것뿐이오. 그 대상이 꼭 땅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아."
잔월이 참지 못하고 탄성을 질렀다. 무극존자의 몸에서 내공 몇 가닥이 뽑혀나갔다. 진법 중심으로 향한 내공들이 서로 부딪쳐 폭발했다. 눈엔 보이지 않지만, 꽤 격렬한 폭발에 두 팔괘를 이은 내공 줄기가 흔들렸다.
장성천도 무극존자가 내공을 날려 폭발시킨 원리를 파악하느라 눈알이 팽글팽글 돌아갔다. 내공을 느낄 수 있는 장성천에게 무극존자는 걸어 다니는 비급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성질의 내공을 부딪쳐 폭발하게 했다. 분명히 성질에 따라 폭발 범위나 위력이 달라진다. 직접 알아내려면 몇 년을 허비해야 할지 모른다. 어떻게든 오늘 무극존자로부터 단서를 얻어야 한다.'
장성천은 침 몇 개를 뽑아 자기 혈도에 꽂았다. 무극존자한테만 집중하려고 일부 감각을 차단했다. 일이 끝나면 한대붕이 알아서 침을 뽑아줄 것이기에 걱정 없었다.
반면, 잔월은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감상하기만 했다. 무극존자의 운기법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은 떠올리지조차 않았다.
장내의 대부분 사람은 무극존자가 공격을 몇 번이나 한 사실조차 몰랐다. 내공이 폭발할 때 소리가 나는 것도 아니어서 무극존자가 어슬렁거리기만 하는데 소림사 중들이 당황하며 막 움직이는 모습밖에 보지 못했다.
"고수들은 눈으로 싸운대."
"눈에서 내공이 나가는 거야?"
"아니. 눈으로 상대 빈틈을 보는 거야. 상대도 수준 높은 고수니까 자기 빈틈이 들킨 걸 알지. 그럼 그 빈틈을 메우는 거야. 그럼 다른 빈틈이 생길 거고. 눈으로 상대 빈틈을 찾고 들킨 빈틈은 가리는 거야. 못 버티는 쪽이 지는 거지."
"지금 그런 상황인 거야?"
"장담할 수 있어."
이런 식의 추측성 대화가 오갔다.
"안타깝군. 이 진법엔 큰 약점이 여럿 있소. 차라리 백팔나한진의 끈끈함이 대처하기 훨씬 어려웠소."
말을 마친 무극존자는 오른손을 태양혈에 붙이고 왼손으로 심장을 가렸다. 오줌 참는 사람처럼 몸을 한껏 움츠린 채 미동도 하지 않고 기회를 엿봤다.
'작심했구나.'
굳이 봉황내의 초식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극존자는 사람들이 자기 비급을 찾느라고 무곡산장을 못살게 굴길 바라면서 봉황내의 초식을 꺼내 들었다.
"저거 뭐야?"
경인 스님이 놀라서 체통도 잊고 벌떡 일어나 소리 질렀다. 무극존자의 모습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닭인지 매인지 올빼민지 모호한 새 머리가 나타났다.
"봉황내의. 무극존자의 절초입니다."
정신이 온통 무극존자에게 빨린 잔월은 경인 스님의 말에 성실히 대답했다. 예전에 봉황산장에서 장군보와 무극존자의 전투를 보던 때와 마찬가지로, 웬만한 질문에는 그대로 대답하는 상태가 되었다.
봉황이 사라지고 무극존자의 모습이 드러나자 잔월은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깨어났다. 봉황내의가 주는 여운에 취해 눈꼬리에 이슬이 맺혔다.
[너 갑자기 왜 이래?]
한대붕은 황급히 장성천의 혈도에 꽂힌 침을 제거했다. 봉황내의 초식을 바라보던 장성천이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새로운 무공을 연구할 때마다 침을 꽂았던 장성천이고, 지금까지 문제가 생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죽다 살았다. 무의식적으로 따라 하다가 몸이 터질 뻔했어.]
겨우 정신을 수습한 장성천이 가까스로 대답했다. 다행히 장성천이 호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드물어 체면 구길 일은 없었다. 장성천의 신분을 알만한 사람은 모두 연무장 중심에 정신이 팔려 거품 물고 버둥대는 추태를 보지 못했다.
"존자의 불살지은(不殺之恩 - 살려 둔 은혜)에 거듭 감사드리오."
해등 법사가 스님들의 대표로 나서서 무극존자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무극존자는 봉황내의를 자랑해 사람들이 무곡산장의 종적을 찾는 일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해등 법사는 무극존자가 강한 힘으로 순식간에 제압하여 동귀어진을 시도조차 못 하게 했다고 여겼다. 비록 십일 년 전에 백팔나한진을 깨고 방장 멱살을 잡은 채 질질 끌고 다니며 수모를 줬지만, 그때도 인명을 전혀 해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들의 목숨을 보전하려고 일부러 강한 초식을 사용했다고 오해했다.
"그럼 명교는 약속을 지키기 바라오. 석 달 안에 내가 찾아가리다. 그리고 누구든 내 비급을 찾아 돌려준다면 제자로 삼아 내 필생 무공을 전수하겠소."
무극존자와 눈을 마주쳤지만, 잔월은 그저 우연이라고 여겼다.
말을 마친 무극존자가 너울너울 하늘을 날아서 떠났다. 수백 장 거리를 땅에 발 한 번 닿지 않고 날아가는 모습에 낯빛이 변하지 않는 자가 드물었다.
장성천은 또 거품을 물고 쓰러질까 봐 일부러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분산했다. 무극존자가 보인 경공의 한 수는 실전에 크게 효과는 없지만, 봉황내의 초식 못지않은 경지였다. 함부로 엿보다가 무슨 낭패를 볼지 모를 일이다.
[이대로 끝내면 좀 아쉽지 않아?]
한대붕의 전음에 장성천은 머리를 싸맸다.
[무극존자의 절세 무공을 견식 했는데 애새끼들 투덕거리는 게 눈에 들어오기나 할 것 같아? 지금 분위기 좋으니까 괜히 초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다행히 동우현도 현명한 자였다.
"내기는 소림이 진 것이니 아까 약속대로 소림사는 천하를 향해 사죄하고 사람들 목숨을 앗아간 죄를 갚으시오."
"긴나라진을 깬 건 명교가 아닌 무극존자요."
추하다는 걸 알지만, 해인 방장은 방법이 없었다. 무조건 우기라고 귀에 꽂힌 전음만 열 개가 넘었다.
[동 향주. 긴나라진을 다시 펼치라고 하시오.]
한바탕 설전을 벌일 준비를 하던 동우현은 장성천의 전음을 받고 속이 든든해졌다. 장성천은 고승들의 적양공이 깨져서 긴나라진을 다시 못 펼침을 알고 전음을 보낸 거였지만, 동우현은 그새 장 호법이 긴나라진을 깰 방법을 찾아낸 거로 오해했다.
"그렇다면 긴나라진을 다시 펴시오. 우리 명교가 직접 깨겠소."
해인은 속으로 자신더러 우기라고 한 자들이 원망스러웠다. 바르지 못한 일을 행하니 점점 궁지로 몰렸다.
[사형, 가능하겠습니까?]
어떤 대답이 올지 알면서도 해인은 해등 법사에게 전음을 보냈다. 해등 법사가 나서서 자신을 닦달하는 자들을 설득해야 한다.
[긴나라진 대신 백팔나한진을 깨라고 해보시게.]
해인의 기대와 달리, 해등 역시 이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방금 무극존자와 대결하느라 다들 지쳤소. 명교의 영웅들이 남의 위급한 상황을 틈타진 않으리라 믿소. 정 원하시면 백팔나한진을 펼쳐드리겠소."
"하하핫하."
동우현의 웃음에 내공이 한껏 실렸다. 수군거리던 자들 모두 대화를 멈추고 동우현에게 집중했다.
"아까 방장께선 긴나라진을 깨는 걸 조건으로 거셨소. 그런데 갑자기 왜 백팔나한진으로 바꾸는 거요? 저분들이 지쳤다면 다른 분들이 나와서 긴나라진을 펼치면 될 거 아니오."
자초지종은 모르지만, 소림사가 긴나라진을 펼칠 여력이 되지 않음을 눈치채고 강하게 몰아붙였다.
'큰일이다.'
해등 법사는 자신의 경솔한 결정을 후회했다. 그냥 패배를 인정했으면 좋았으련만, 억지를 부리다 보니 긴나라진이 아무나 펼칠 수 없는 진법이라는 걸 들켜버렸다.
비록 무극존자에게 파훼되긴 했지만, 무극존자도 어마어마한 초식을 펼쳐서 긴나라진을 깼다. 어찌 보면 영광스러운 패배인 셈이다.
소림사에 백팔나한진에 버금가는 진법이 생겼는데 고작 열여섯으로 펼쳤다는 소문이 퍼지면 소림의 위명에 도움이 된다. 그런데 패배를 인정하기 싫어 억지를 부리다가 긴나라진의 약점이 들켜버렸다.
아무나 펼칠 수 없는 진법인데 무극존자에게 파훼 당하기까지 했다. 백팔나한진이 위명이 자자한 건, 진법을 숙지하기만 하면 굳이 고수가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개방의 타구진 역시 위력에 비교해 칭찬이 자자한 이유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거지가 섞여도 펼치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행실이 바르지 않다고 부처님이 벌을 주시는 건가?'
위급한 환자는 의원을 극진히 모신다. 의원도 치료할 수 없는 병이면 도사를 청하거나 스님을 청해 법사를 한다.
인간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맞닥뜨리면 초월적인 존재를 찾게 된다. 해등 법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자 부처님이 내린 벌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실질적 일인자 해등의 침묵이 길어지자 해인은 패배를 인정했다.
"출가인이 쓸데없는 호승심으로 호기를 부렸소. 섣부른 행실로 출가인의 본분을 잊고 소림의 위명에 해를 끼친 죄를 인정하고 이만 방장 직을 사임하겠소. 방장 직에서 물러나기 전에 마지막 일을 해야겠소. 소림은 패배를 인정하오."
소림의 스님들이 너나없이 반장을 하고 불호를 세 번 외웠다. 이는 방장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좋은 구경 하러 모여든 군웅들은 시시하게 끝난 무림대회가 아쉽기도 했지만, 천하제일로 불리는 무극존자를 직접 보고 그 무공도 견식 했다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꼈다.
"소림은 부처를 모시는 자들이 수련하는 곳이오. 무림대회는 이제 끝났으니 손님들은 이만 떠나주시기 바라오. 배상 관련하여 상의할 명교 관계자들은 이쪽으로 오시오."
해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종남 일행들이 작별 인사도 없이 바로 떠났다. 원 황실의 편에 선 소림이 패했지만, 완안덕명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젠 용문파가 무림 중심이 되겠구나.'
소림이 받던 지원을 종남이 받는다면 십 년 안에 예전의 성세를 회복할 자신이 있었다. 절세고수는 힘들어도 고수 소리 들을만한 제자를 키워내기엔 넉넉한 시간이었다.
震天脚 진천각이
震天 하늘을 울리다
- 작가의말
왜 진지각 아니고 진천각이냐고. 진지각이 훨씬 간지 나는데.
하는 일이 바르지 않으면 결과가 좋기 힘듭니다. 바르지 않은 행위에 좋은 결과가 따르려면 그만큼 힘이 강해야 합니다.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는 말은, 결국엔 힘없는 대다수는 착하게 살지 않으면 벌 받는다는 뜻을 좋게 표현한 게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