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접·첩경
얼굴은 분 바른 듯 하얗고 입술은 인주를 찍은 듯 붉었다. 시원하게 뻗은 눈썹 덕분에 게슴츠레한 눈도 멋있게 보였다.
"광명우사를 뵙습니다."
"이 아이가 교주 무공을 훔쳤다고? 교주보다 더 센데?"
"훔쳐서 더 세진 게 아닐까요?"
"그럼 몇 살 때 훔쳤을까?"
"열 살은 되어야 훔쳤겠죠."
광명우사가 주먹을 쥐고 한대붕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열대여섯 되는 아이인데 고작 몇 년 수련해서 건곤대나이를 교주보다 더 잘 익혔다고?"
"그럼 여섯 살 즈음에 훔친 게 아닐까요?"
"넌 여섯 살 때 똥오줌이나 가렸어?"
"가렸는데요."
의외의 대답에 광명우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어 광명우사 눈길을 받은 장성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광명우사와 눈을 마주친 잔월도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기랄."
광명우사가 슬픈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장성천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을 한껏 찡그렸고 한대붕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몰라 머리를 긁적였다.
"내 취접장(醉蝶掌)을 받아내면 그대로 보내주겠다."
"못 받으면요?"
"나랑 함께 박주로 가서 신문을 받아야지. 진실만 말하는 약을 먹으면 네가 건곤대나이를 훔쳐 배웠는지 바로 판명 날 거야."
광명우사가 손을 나비처럼 나풀거렸다. 월영도법을 익힐 때 환의 무리를 깨우치느라 나비를 가두는 수련을 했던 잔월이지만, 광명우사 손이 훨씬 표홀했다.
'손으로 막아야 한다.'
아직 양팔을 제외한 곳에선 음양환을 만들지 못했다. 게다가 단전을 비롯한 요혈과 거리가 먼 손으로 받아야 상대 기운을 해소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 수 있다.
"종남의 육합권 같은데."
광명우사가 중얼거리며 잔월의 손바닥을 가격했다. 원하는 대로 손바닥으로 상대 공격을 받아내긴 했지만, 해일처럼 밀려오는 내공에 정신 차리기 어려웠다.
"첩경이다."
아교로 붙인 것처럼 둘의 손바닥이 떨어지지 않았다. 잔월이 어렵게 돌려준 내공은 상대의 파도처럼 밀려오는 내공에 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공에도 성질이 있구나.'
대결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잔월은 광명우사의 내공에 당하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무극존자의 내공은 부수는 성질이고 상소룡의 내공은 찢는 성질이었으며 한대붕의 내공은 울리는 성질이었다. 광명우사의 내공은 무극존자와 비슷했다.
'환속승은 어떻게 해냈을까.'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광명우사의 내공이 잔월 몸에서 날뛰었다. 그걸로 끝이면 어떻게든 해볼 텐데, 맞붙은 손바닥에서 웅혼한 기운이 계속 몰려왔다.
잔월은 광명우사의 광포한 기운에 집중하기보단 회상에 빠졌다. 그날 환속승이 뭘 어떻게 했는지 기억해내려고 일심을 모았다.
"이 새끼 이거 어떻게 해냈지?"
광명우사의 질문에 장성천과 한대붕은 입을 뻐금거리기만 했다. 내공을 느끼는 재주가 탁월한 장성천마저 잔월이 어떻게 했는지 알지 못했다.
쿨럭거리며 피를 잔뜩 토해낸 탓에 잔월 앞가슴이 붉게 물들었다. 비틀비틀하던 잔월은 끝내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내상약 없어?"
"없습니다."
한대붕이나 장성천이나 내상약이 필요치 않다. 장성천은 내공 다루는 솜씨가 탁월하여 직접 운기 해 회복하는 게 빠르고, 한대붕은 동자공을 익혔기에 내상약을 먹으면 안 된다.
"이건 정말 아까운 건데."
광명우사는 잔월이 취접장의 첩경을 어떻게 해소했는지 알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러나 광명우사는 내공으로 사람 치료할 줄 모른다.
잔월은 광명우사가 건네는 약을 받아들었지만, 입에 넣지 못했다. 욕지기가 치밀어 피를 한바탕 게워내니 숨통이 트여 말할 수 있었다.
"나도, 모릅니다. 어떻게 했는지. 그냥, 하니까 되더군요."
잔월의 몸에는 수많은 음양환이 펼쳐졌다. 예전엔 음양이 바뀌는 데 시간이 필요해 몇 개 혈도를 하나로 이어 순환을 이뤘다. 그러나 지금은 세 개나 두 개 혈도 사이에서도 순류와 역류가 오가며 순환을 이뤘다.
'음양무계. 음과 양의 구분이 사라지면 굳이 신경 안 써도 상대 기운을 해소할 수 있겠구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방향은 확실히 알았다. 음양이 그저 공존하는 게 아니라 음양의 구분을 없애 같은 기운으로 인식하는 게 음양무계가 추구하는 오의였다.
"나는 취접이다."
광명우사가 자기 별호를 잔월에게 알려주자 한대붕이 입을 크게 벌렸다. 장성천 정도 천재도 바보 취급하며 알고 지낸 지 삼 년이 지나서야 별호를 알려줬다.
타인에게 들어서 아는 것과 광명우사 입으로 직접 듣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이건 광명패. 갖고 다니다가 위험하면 이걸 보여줘라. 그러고도 화를 당하면 운 나쁜 거고. 그냥 자기 복이라고 생각해. 복수는 내가 반드시 해줄 테니 눈은 편히 감아도 된다."
평범한 잡철로 빚은 손바닥 크기의 패였다. 손가락으로 눌러 쓴 세 글자가 아니었으면 대장간에 가져다가 철로 녹였을지도 몰랐다.
"저기. 패(牌)를 파(派)로 잘못 적었는데요."
"명심해라. 사소한 걸 자꾸 따지면 나처럼 훌륭한 고수가 되기 어렵다."
훈계를 끝으로 취접은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해해서 미안하다."
한대붕이 사과했다.
"저기, 나이 보니 아직 제자 안 받은 거 같은데. 내가 사부로 모시면 방금 그 수법 가르쳐줄 수 있어?"
장성천은 한술 더 떠서 제자가 되겠다고 했다.
"어떻게 했는지 몰라요. 그냥 급하니까 된 거예요."
"그럼 약속하자. 방금 수법을 제대로 깨우치면 날 제자로 받고 전수하는 거야."
마흔은 되어 보이는 장성천이 자꾸 제자로 받아달라고 하자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생각해 보죠. 그전에 더 나은 수법을 본인이 찾아낼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 왜 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가능하다는 걸 알았으니 마음 다잡고 방법을 찾아야지. 내가 좋은 무공 만들어내면 보답으로 네게도 가르쳐 줄게."
장성천과 한대붕은 포권으로 작별하고 떠났다. 정신없게 굴던 셋이 사라지니 조금 안정된 느낌이었다.
흥 하고 코에 고인 피를 뿜어낸 잔월은 내공을 움직이지 않고 그저 달렸다. 어느새 음양환이 멈추고 기성해의 운기법이 돌아갔다.
'옥녀공 대성한 게 의미 없다.'
내공의 절대적 양이 부족하여 옥녀공 효과가 미미했다. 일부 혈도에만 내공을 집중해 옥녀공의 효과를 받게 하면 나아질 수 있으나, 잔월은 옥녀공에 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깨달음을 담은 구결이 있는 구인류나 섬전도와 달리 묘연향이 남긴 옥녀소수공은 운기 경로와 방법만 적혀있었다.
"수상한 자다."
명교 무사들이 막아서자 잔월은 광명파라고 적힌 광명패를 꺼냈다. 광명패를 확인한 명교 무사들은 차라리 절하는 게 편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렇게 안경을 벗어나 나루터로 가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아미파예요."
"아미파 엄청 세요. 아저씨들 자꾸 그러면 혼나요."
명교 무사들이 아미파 일행을 잡아두고 수색한다고 난리를 피웠다. 아미파는 사람이 몇 없고 명교에는 고수가 없어 대치가 풀리지 않았다.
"짐만 수색하게 하면 보내준다니까."
"아미의 짐을 명교가 함부로 수색했다는 소문이 강호에 퍼지면 어떻게 될까? 이 정도 생각을 할 수 있는 급의 책임자를 불러와라. 소림이 만만하다고 아미까지 만만해 보여?"
아미의 인솔자는 키가 작고 몸매가 다부진 사내였다. 멍청한 일반 무사들의 요구에 화가 잔뜩 치밀었다.
아미는 촉의 땅에서 무척 존중받는 문파다. 어데 가서도 짐을 수색당하는 따위의 대접을 받은 적 없다. 명교와 관계를 생각해 손을 쓰진 않았지만, 볼살이 부들부들 떨렸다.
"보내줘."
가까이 다가간 잔월이 광명패를 꺼내자 명교 무사들이 굽신거리며 물러났다. 눈치를 보던 뱃사공은 일행이 배에 타자 급히 묶은 끈을 풀었다.
"독고 소협의 도움에 감사드리오."
"응당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내상이 심한 듯하오."
기성해로 기운이 부지런히 움직이긴 하는데 그 양이 너무 적었다. 게다가 앞가슴이 붉게 물들어 누가 봐도 심하게 당한 모습이었다.
취접이 준 약이 있긴 했지만, 안전한 곳에 가서 조금 복용해보고 결정할 일이다. 누구에겐 약이지만 누구에겐 독일 수도 있다. 취접이 호의로 준 약이 잔월에겐 해가 될 가능성도 있다.
"곧 나을 겁니다. 보기보단 심하지 않습니다."
쌍둥이는 피를 잔뜩 묻힌 잔월 때문에 훌쩍거렸다. 고사리 같은 손을 모으고 부처에게 사부 살려달라고 열심히 빌었다.
"그런데 왜 배가 남쪽으로 갑니까?"
"진우량 영역에 가야 배가 많소. 돌아가는 듯해도 오히려 시간은 훨씬 단축되오."
잔월도 얼마 전에 자강과 두천과 함께 노숙하며 임강부로 간 적이 있었다. 튼튼한 셋도 노숙이 길어지니 피로가 쌓여 힘들었다. 어린 쌍둥이가 피로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훨씬 지체할 수 있으니 배나 마차로 움직이는 게 안정적이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말을 마친 잔월은 그대로 기절해 쓰러졌다.
"야, 물 가져와."
"왜 매번 내가 가야 하는데? 이번엔 네가 해."
"내가 너보다 잘하잖아."
쌍둥이가 다투는 소리에 잔월은 눈을 떴다. 고개를 힘들게 돌리니 쌍둥이가 피 묻은 비단옷을 빨래하고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니 가슴과 명치를 비롯해 통증이 느껴지는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음엔 네가 가는 거다?"
"그건 그때 다시 정해야지. 미리 정하는 게 어딨어."
말다툼에서 진 아이가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맑은 물을 떠서 핏물이 여전히 남은 비단옷을 담그고 손으로 비벼댔다.
'저거 약초 끓인 물 부으면 피가 순식간에 사라지는데.'
핏자국 없애겠다고 비단옷 문지르는 둘에게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둘은 상대보다 더 잘하겠다고 숨차서 빨개진 얼굴로 씩씩거렸다.
'비우자. 머리를 비우자.'
취접의 첩경을 어떻게 해소했는지 생각하자 기운이 난잡하게 움직였다. 잔월은 눈을 감고 억지로 머리를 비웠다.
"누나. 밥 시간이야?"
"응. 죽이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 채소는 조금 오래되어 질기니까 꼭꼭 씹어 삼키고."
쌍둥이는 빨래를 멈추고 후루룩 소리를 내며 죽을 먹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때 잔월 머릿밑으로 베개가 하나 쑥 들어갔다. 부드러운 손이 잔월의 양 볼을 눌러 입을 벌리더니 적당하게 식은 죽을 입에 넣었다.
푹 끓인 죽이어서 씹을 필요도 없이 목구멍을 부드럽게 넘어갔다.
"누나. 사부 좋아해?"
"함부로 얘기하지 마. 아미를 벗어나면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잖아."
"그럼 싫어해?"
"그냥 맞을래?"
醉蝶 술 취한 나비의
疊勁 첩경을 이겨내다
- 작가의말
취접에겐 아주 슬픈 추억이 있습니다. 취접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하여 비밀로 하겠습니다. 눈치챈 분들도 모른 척해주시기 바랍니다.
Comment '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