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강·설유강
'쌍둥이를 버리면 나랑 천 소저는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천 소저라도 살리는 게 협일까? 두 동생을 버리고 도망간 천 소저가 평생 불행하게 살면 오히려 잘못 아닐까?'
호흡 몇 번 쉬는 짧은 사이에 잔월은 수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혼자서라도 도망가는 게 맞는지 목숨 걸고 저들과 싸워 끝까지 천희연과 쌍둥이를 지키는 게 맞는지 너무 고민되었다.
'외숙공도 찾아야 하고 부모 복수도 끝내지 못했는데. 협을 지킨다고 효를 버리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효도 일종의 협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어느 협이 더 큰 걸까? 당장 눈앞의 협을 지키는 게 맞는 걸까?'
"공손 대협. 아미 천희연입니다. 여기 두 아이는 제 동생인 천희영과 천희웅입니다."
공손용기가 홍야차를 바라봤다. 홍야차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걸 보니 전음을 보내는 듯했다.
"아미 제자가 여긴 웬일이시오?"
공손용기 표정을 보니 천희연에 관해 전혀 들은 바 없는 듯했다.
"백원선사께서 제 증조공 되십니다."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깝다는 말은 못 들어보셨소?"
공손용기는 백원선사를 언급하는 천희연이 우습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여기 두 아이를 조금 살피시겠습니까?"
온통 무극환허인 구결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공손용기는 그제야 두 쌍둥이를 유심히 살폈다. 살필수록 입꼬리가 조금씩 내려가더니 얼굴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백원선사께선 무극존자와 평수를 이룬 후 큰 깨달음을 얻으시고 십여 년 동안 폐관하셨습니다. 한 달 전에 출관하셔서 두 아이를 직접 가르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아이는 통배권만 평생 익힐 것입니다."
아미는 장문인을 차례로 물려주는 문파가 아니다. 두 꼬맹이가 통배권을 제대로 익혀내면 백원선사 다음으로 장문 직을 맡을 수 있다.
'저들을 죽이면 아미파가 가만있지 않겠구나.'
어린 나이에 경맥을 다섯이나 타통한 두 아이다. 무곡산장이어도 어떤 대가를 치르든 흉수에게 최소 열 배로 갚을 것이다.
"밖에 있어서 소식을 못 들었소? 멸세교가 아미파로 향했다던데."
"편지를 받아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잔월 공자를 어렵게 모시는 겁니다."
천희연이 잔월 곁으로 가서 팔짱을 꼈다. 너무 대담한 행동에 잔월은 물론 공손용기와 그 수하들도 깜짝 놀랐다.
혼인한 사이어도 사람이 많은 장소에선 손조차 잡지 않는다. 강호의 호걸이 세속의 예법에 구애를 덜 받는다고 해도, 혼인도 안 한 여자가 남자 팔짱을 끼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홍야차가 전음을 보냈다. 공손용기가 이마를 찌푸리며 손을 뻗어 홍야차 손에 들린 광명패가 가져갔다. 내공을 느끼는 잔월도 공손용기가 어떤 수법을 사용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광명패를 확인한 공손용기가 홍야차에게 손짓했다. 홍야차는 몸을 일으켜 공손용기 곁으로 갔다. 홍야차 맥문을 잡은 공손용기의 이마 주름이 점점 깊어졌다.
"광명우사와는 무슨 사이요?"
"취접과는 면식이 있는 정돕니다."
잔월은 자신의 수법이 저들에게 취접장으로 오해받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말했다. 그런데 솔직한 대답이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자기 절기를 전수한 걸 보면 암흑교 소법왕이 틀림없구나. 광명우사는 한림아도 별로 내켜 하지 않는다지.'
멸세교는 기괴한 고수가 많다. 강호에 알려진 자들도 꽤 있지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자도 무척 많다. 멸세교 다 합쳐 수백 명밖에 안 되지만, 그중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전부 고수다. 그냥 무공이 일정 경지에 이르러 고수라 호칭하는 수준이 아니라 강호 어디에 가도 적수가 몇 없을 진정한 고수다.
광명교는 교도가 백만이 넘는다. 게다가 광명우사라는 어마어마한 고수도 있다. 교주인 한림아와 호법인 유복통이 사이가 안 좋은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양측 모두 더 많은 공을 세우려고 무분별하게 확장하다가 식량 부족으로 군사만 잃고 세력은 오히려 위축되었다.
'그 광명교가 무너졌다.'
문제는 여기 있었다. 장사성이 박주를 포위했을 때 유복통은 주원장에게 구원을 명했다. 주원장은 군사를 보내 한림아와 유복통을 구해 응천부로 데려갔다.
일부 교도는 교주를 따라 응천부로 갔으나 대부분 교도는 고향을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고수 대부분은 암흑교로 투신했다. 명교 일반 무인도 절반 이상이 암흑교 대법왕 휘하로 들어가며 암흑교 위상이 일약 소림이나 아미와 비슷해졌다.
'아미와 암흑교가 손을 잡는다? 이거 큰일인데?'
광명우사가 암흑교로 투신해 암흑우사가 되었다. 광명좌사를 제외한 고수 대부분 광명우사를 따라 암흑교 대법왕 밑으로 들어갔다.
광명파라고 적힌 광명패와 멸세교의 칠신병 그리고 홍야차를 쓰러뜨린 다소 어설픈 취접장의 첩경으로 오해가 쌓여 잔월을 암흑교 소법왕으로 여기게 했다.
"저희를 죽이시고 데려온 수하 모두 입막음하면 누구도 모르겠죠."
공손용기가 심한 갈등을 겪고 있을 때 천희연이 결정타를 날렸다. 공손용기를 따라온 자들의 낯빛이 하나같이 침중하게 변했다.
'영악한 아이구나.'
입막음은 재물로 할 수도 있지만, 최선은 뭐라 해도 죽이는 것이다. 아미와 암흑교 두 세력과 척지기 싫으면 넷을 죽인 다음 목격자를 전부 죽여 입막음을 철저히 해야 한다.
아마 공손용기가 넷을 죽이라고 지시하거나 직접 손을 쓰면 바로 도망가는 자가 스물은 될 것이다. 그 스물은 자기가 살겠다고 무곡산장이 아미파와 암흑교 사람을 죽였다고 널리 소문낼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게다가 소법왕 저놈은 실력을 가늠하기 어렵고.'
내공이 전보다 훨씬 많아졌지만, 공손용기 정도의 고수가 보기엔 여전히 부족하다. 그런데 부족함이 오히려 의혹을 키웠다. 취접장을 익히고 홍야차를 다치게 하기엔 잔월한테서 느껴지는 내공이 꽤 부족했다. 실력을 숨긴 게 아닌지 의심되었다.
'하긴, 무극존자도 저 나이에 이미 무혈지체를 이뤘지.'
봉황산장 놀러 갈 때마다 무극존자에게 얻어맞았다. 맞은 것도 억울하지만, 공손무기를 비롯한 몇몇 동생과 달리 공손용기는 무극존자보다 형이었다.
무극존자를 떠올리자 공손용기는 기세가 팍 죽었다. 공손완아가 어렵게 토해낸 구결이 가짜라고 여겨 잔월에게 확인받았는데 구결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구결에 문제 있다면 잔월의 구결로 다시 해석하면 되는데, 구결에 문제가 없다면 지금까지 해석을 버리고 다시 연구해야 한다. 이것만 해도 공손용기 마음엔 큰 타격이었다.
무극존자 외에도 아미와 암흑교라는 두 적이 추가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득했다. 상황이 달랐으면 천희연 협박에 콧방귀 뀌었을 수도 있지만, 공손용기는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어서 마음을 독하게 먹을 수 없었다.
"재자가인이라.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오. 이건 두 분의 앞길에 비단길이 깔리기를 기원하며 드리는 내 작은 선물이오."
공손용기는 품에서 황옥을 다듬어 만든 반지 두 개를 꺼내 잔월에게 던졌다.
반지를 받자마자 잔월 몸으로 어마어마한 내공이 몰려들었다. 마지막 미련을 떨쳐내지 못한 공손용기가 반지에 내공을 가득 심었다.
그러나 미리 준비한 잔월은 음양환으로 반지에 실린 내공을 제압하고 손바닥 노궁혈로 내보냈다. 회초리가 허공을 가르는 듯한 소리가 연신 울렸다.
'저 어린 나이에 건곤대나이까지? 무기 말에 따르면 옥녀공과 그에 버금가는 섬전도라는 무공도 익혔다던데. 최근 완안덕명을 무형지기로 쓰러뜨리기도 했고, 거기에 취접장도 익혔다. 시간만 넉넉히 주면 무극존자도 발아래 둘 놈이구나.'
무극존자는 너무 어린 나이에 무혈지체가 되었기에 이립이 지난 후부터 쭉 무공이 정체되었다. 그 정체된 무공이 천하제일을 논할 때 가장 첫 자리에 언급된다는 게 무곡산장으로선 무척 애석한 일이긴 했지만.
"광명패도 돌려드려야지."
공손용기는 아무 수작도 부리지 않고 광명패를 던졌다. 광명패를 품에 넣은 잔월은 공손용기에게 포권했다.
"감사합니다."
무곡산장 사람들은 공손용기를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 상대 기척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야 잔월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저, 이거 어떻게 할까요?"
천희연이 화들짝 놀라며 팔짱을 풀었다. 잔월 얼굴 보기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더니 쌍둥이의 초롱초롱한 눈과 마주쳤다. 평소랑 똑같은 눈빛인데 왠지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하나씩 가지도록 하죠. 오늘 황천길 앞에서 돌아온 기념으로 하자고요."
말을 마친 천희연은 반지 하나만 받아 손수건에 싸서 품에 소중히 간직했다. 무공을 익히느라 반지나 팔찌는 물론 귀걸이도 못 했다. 또래 아이들이 한껏 치장하고 뽐낼 때 무척이나 선망했는데 반지 하나로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이젠 귀찮게 구는 추격자도 없으니 숨어다닐 필욘 없겠네요?"
[저는 무슨 교랑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혹시 들통나면 죽이려 할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가까운 종남에 갈까요?]
[아닙니다. 아미부터 가는 게 좋겠습니다.]
잔월은 천희연과 쌍둥이를 아미까지 안전하게 보내고 화산에 가기로 했다. 무공이야 천희연도 만만치 않지만, 독이나 여러 저급한 수단에 당할 것 같았다.
혹시 무곡산장이 지켜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행은 여행하듯 풍경을 즐기며 천천히 움직였다. 가을이어서 맛난 과일도 많고 토실토실 살찐 짐승도 많았다. 천희연은 여전히 육식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잔월과 두 쌍둥이는 입술에 기름 마를 새 없었다.
[여기서 상대를 떨궈버리죠.]
누가 쫓아오는지 확실치 않지만, 잔월과 천희연은 달이 어두운 밤에 움직여 감시를 완전히 벗기로 했다. 쌍둥이를 업고 경공을 펼쳐 넓은 강을 건너고 험한 산 두 개를 넘었다.
"아미로 가는 길은 몇 개 없습니다. 길목을 지킬지도 모르니 길은 피하고 산으로 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아이들 입을 옷 좀 구해오겠습니다."
잔월은 깊은 밤에 도시에 들어가 포목점을 방문했다. 내공으로 안에 걸린 빗장을 열고 들어가 쌍둥이가 입을만한 옷을 찾았다.
겨울을 대비해 부잣집 아이들이 옷을 장만하는 시기여서 포목점에는 이미 완성된 옷이 꽤 많았다. 잔월은 쌍둥이 몸에 알맞은 옷 네 벌을 챙긴 후 은자를 넉넉히 남겨뒀다.
일행은 아미와 며칠 거리를 둔 험한 산에서 첫눈을 맞이했다. 쌍둥이는 자기들 생일이라고 우기다가 천희연에게 엉덩이를 맞았다. 천희연은 끝까지 해마다 첫눈 내리는 날이 다르다는 걸 쌍둥이에게 이해시키지 못했다.
刀强 칼도 강하지만
舌愈强 혀가 더 강하다
- 작가의말
재벌가 망나니 공손용기가 ‘여, 그림 좋은데.’ 대사를 읊었습니다.
악덕 재벌 무곡산장 직계 공손용기에게 천희연이 ‘나 글로벌 기업 직계고 내 동생 상속 1위야, 이 *만한 *새야. 눈깔아.’라고 협박했습니다.
그리고 ‘쳐 봐, 쳐 보라고. 너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으면 한 대 치라고.’라며 추가타도 날렸습니다.
잔월이 헌혈로 돈 모아 맞춘 짭에 속은 공손용기가 용기를 잃고 비굴하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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