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살잔월홍

붕산권·무계

한대붕은 잔월에게 변명할 기회도 안 주고 다짜고짜 공격했다. 공령환허를 펼쳤는데 아무 소용없었다. 한대붕이 하수인가보다 생각하며 잔월은 공령환허를 거두고 섬전도 해시신루를 펼쳤다.

"소용없어. 내 무공엔 눈속임이 먹히지 않아."

해시신루는 눈과 감각 모두 속이는 방식이다. 고수한테만 먹히는 공령환허의 결함을 메우려고 독고경천이 만들어낸 방식으로 하수한테는 무척 효과적이었다.

고수한테도 잘 먹히는 편이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

"내 붕산권은 타를 버리고 아만 남긴 무공이야."

타(他)를 버리고 아(我)만 남기는 건 불교 계열의 무공에 자주 보인다. 나를 대우주 일부로 보고 소통하려는 도교와 반대로, 불교는 개개인의 소우주는 규모만 빼면 대우주와 같다고 본다.

불교는 외부와 단절한 상태에서 자신을 완성하는 걸 목표로 수련한다. 이를 무공에 적용하여 상대 허실에 속지 않고 자기 무공을 순수하게 펼쳤다.

한대붕은 잔월이 뭘 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 무공만 펼쳤다.

'공간을 제압하는 무공이다. 월영도법에도 상극이구나.'

허실로 상대를 속여 내가 원하는 반응을 끌어낸 후 반격하는 방식이 월영도법의 요체다. 그런데 한대붕은 잔월의 허실을 구분하지 않고 무작정 공격만 해댔다.

웬만한 무공이면 헛손질뿐이겠지만, 붕산권은 붕권을 기반으로 한 공간을 제압하는 무공이었다. 머리가 단순하고 동자공을 익혀 내공이 심후한 한대붕에게 꼭 알맞았다.

'이러면 힘으로 맞붙어야 하는데, 한꺼번에 다루는 내공 양이 너무 차이가 난다.'

전체적인 내공도 잔월이 훨씬 적지만, 싸우면서 내공을 회복하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에 움직일 수 있는 내공의 양이 제한되어 힘으로 상대와 싸우기엔 부담이 되었다.

'나는 술잔으로 마시는데 저놈은 항아리째 들이붓는 셈이니까.'

"너 왜 피하기만 해? 재미없잖아."

한대붕은 도발의 의도가 없이 순수하게 궁금이 일어 질문했다.

'환속승.'

덕분에 잔월은 환속승과 무극존자의 대결이 생각났다. 무극존자는 무혈지체로 내공을 제한 없이 쏟아냈다. 환속승은 뛰어난 운기로 무극존자의 공격을 분해하여 흘렸다.

잔월은 신형을 멈추고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한대붕의 붕산권이 잔월의 손바닥에 적중했다. 잔월은 한대붕이 때리는 힘을 빌려 뒤로 몸을 날렸다.

'마지막에 빨라지는 주먹이라니.'

마지막에 전조도 없이 갑자기 빨라지는 바람에 내공이 밀려들어 오는 순간을 예측하지 못했다. 잔월이 음양무계의 수법을 펼쳤을 때 한대붕의 내력은 이미 어깨를 지났다.

'전부 양기구나. 어떡하지?'

음양무계는 상대의 기운을 음과 양으로 분리하여 전신 혈도로 분산하는 방식이다. 양의 기운은 양의 혈도로, 음의 기운은 음의 혈도로 보내 피해를 최소화한다.

하지만 동자공을 익힌 한대붕은 비록 극양인에 미치진 못하더라도 꽤 순수한 양의 기운을 띄었다. 이렇게 되면 음양무계 효과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환속승이라면 절반 이하 효과로도 한대붕 내공을 넉넉히 소화했을 테지만, 미숙한 잔월은 아니었다. 음양무계로 기운을 각 혈도로 분산하자마자 다시 기성해를 펼쳐 밖으로 배출했다.

"왜 또 피해? 방금 재밌었는데."

한대붕의 공격을 열 번 정도 피하고 나니 침투한 상대 내공을 전부 해소했다.

'다시 해보자.'

잔월은 다시 손바닥으로 한대붕의 공격을 받았다. 이번엔 상대 내공이 팔꿈치를 넘기 전에 기성해를 멈추고 음양무계를 펼쳤다.

'왜 음양분계가 아니라 음양무계인 걸까?'

갑자기 이상한 의문이 머리에 떠올랐다. 음과 양의 기운을 구분해서 각 혈도로 보내는 방식이니 음양무계(無界)가 아닌 음양분계(分界)여야 한다. 무계는 서로 경계가 없다는 뜻이니 음양을 구분하는 방식에 어울리지 않는다.

"너 괜찮아? 막 속이 울렁거리지 않아?"

전력에 가까운 공격을 두 번이나 받아낸 잔월이 멀쩡해 보이자 한대붕이 의문을 표했다. 장성천이라면 기괴한 방식으로 자신의 내공을 해소했을 테고 광명우사라면 심후한 내공으로 없애버렸을 거다. 그러나 눈앞의 어린 소년이 장성천이나 광명우사 수준이라고 상상하는 건 한대붕이 아니어도 힘든 일이었다.

"그냥 입 다물고 싸우면 안 될까?"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하여 잔월은 무척 예민해졌다. 신난 얼굴로 공격하던 한대붕은 잔월이 정색하자 시무룩한 얼굴로 공격했다.

하지만 타를 버리고 아만 취한 특별한 무공답게 표정만 바뀌고 무공 위력은 똑같았다.

'양의 기운은 순류로 양의 혈도에, 음의 기운은 역류로 음의 혈도에.'

잔월이 음양무계를 사용한 적은 몇 번 안 된다. 다행히 거의 무아지경으로 구경했던 무극존자와 환속승의 싸움이 떠올랐다.

'그날 둘이 이런 식으로 싸웠구나.'

지금까지 봉황내의 초식이 다른 기억을 꾹 누르고 있었다. 그날 싸움을 떠올리면 봉황내의만 기억났다. 그러나 음양무계에 관한 고민을 거듭하자 구석에 처박혔던 환속승에 관한 기억이 슬며시 수면으로 떠 올랐다.

'환속승은 내가 두천처럼 피를 토하며 쓰러질까 봐 일부러 얘기해주지 않은 건가? 내가 역류를 억지로 하다가 위험할까 봐 걱정된 걸 수도 있겠구나.'

양의 기운은 순류로 양의 혈도로 보내고 음의 기운은 역류로 음의 혈도로 보내는 게 음양무계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내공 대부분이 양의 기운이 훨씬 많기에 환속승은 어린 잔월에게 굳이 음의 기운은 역류해야 함을 알려주지 않았다. 소량의 음기는 그냥 순류로 음의 혈도로 보내도 큰 상관이 없었다.

'내가 음의 혈도와 양의 혈도 사이에 순류와 역류의 순환을 이뤄버리면?'

오른팔과 오른손 혈도 사이에 복잡한 순환이 이뤄졌다. 가까운 양의 혈도와 음의 혈도가 서로 순류와 역류로 이어졌다.

두 손으로 공격을 받던 잔월이 하나만 내밀자 한대붕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화난 건 화난 거고 한대붕의 붕산권은 전과 다름없는 속도와 힘으로 잔월 손바닥을 때렸다.

잔월 손과 팔에 가득한 음양의 고리를 지나며 한대붕의 내공은 빠르게 사라졌다. 잔월의 혈도를 많이 거칠수록 일부 기운이 역류에 휩쓸려 음기로 변했다. 음양의 기운이 비슷해지니 음양무계의 효과가 배 이상 되며 기운을 빠르게 해소했다.

'음양무계는 기운을 분류하여 나눠주는 방식이구나.'

기운이 많은 혈도는 기운이 적은 혈도에 기운을 보낸다. 기운이 적은 혈도는 기운이 많은 혈도로부터 기운을 빼앗으려 한다.

그냥 혈도가 알아서 하면 상대 기운은 순식간에 전신 혈도로 퍼져 잔월을 공격한다.

그러나 음양무계의 방식으로 양의 기운은 순류로 양의 혈도로 보내고 음의 기운은 역류로 음의 혈도로 보내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타인의 기운이어도 순리를 따르는 흐름에 잔월을 바로 공격하진 않는다.

침투한 기운을 전신에 분산하여 덜 적대적으로 만들고 혈도가 알아서 해소하는 게 음양무계의 기본이었다.

'여기에 기성해를 합쳐 몇 개 혈도 사이에서 순류와 역류가 계속 흐르게 한다.'

계속 순류와 역류를 따라 흐르다 보면 상대 기운이 내 기운처럼 변한다. 그러나 남의 기운은 결국 남의 기운이다. 환속승은 자기 기운처럼 길들인 무극존자의 내공을 용천혈로 쏴서 무극존자를 공격하는 데 이용했다.

잔월은 다시 두 손으로 한대붕의 공격을 받았다. 다른 무인이라면 몇 번 때려도 효과 없으면 그만뒀을 테지만, 붕산권은 상대 반응은 상관하지 않고 자기 것만 펼치는 특이한 무공이었다. 게다가 한대붕은 좋게 말하면 우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미련하기 그지없는 놈이었다.

손바닥으로 들어온 한대붕 내공은 잔월이 음양환(陰陽環)이라 이름 지은 수법에 따라 순양에서 음양이 섞인 기운으로 바뀌었다. 기성해 수법으로 한대붕의 내공을 제압한 잔월은 손바닥의 노궁혈로 내공을 한대붕에게 돌려보냈다.

아주 복잡한 과정이지만, 한대붕의 주먹이 잔월의 손바닥에서 채 떨어지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광명우사, 장성천. 여기 교주 무공 훔친 놈이 있다."

순식간에 자기 기운에 당한 한대붕이 공격을 멈추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뒤에서 덮쳐오는 강대한 기운에 잔월은 섬전도의 신법으로 피했다.

"제길. 너무 빨라 어떻게 운기 했는지 느끼지 못했어."

장성천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타나는 잔월의 신법이 무척 탐났지만, 운기를 토막 내서 하는 잔월이기에 선후가 분명하지 않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저놈이, 저놈이 건곤대나이를 펼쳤어. 심지어 교주보다 더 잘해."

"멍청이, 소리 낮춰."

장성천이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책망했다.

[저놈이 건곤대나이를 펼쳤어.]

[건곤대나이를 아는 건 교주랑 대법왕 뿐인데?]

광명교는 교주라 불렀고 암흑교는 대법왕이라 불렀다. 사실 대법왕이 적법한 교주지만, 백만 교도를 거느린 광명교의 기세에 눌려 순순히 건곤대나이를 한림아에게 가르쳤다.

[내가 다시 공격할게. 네가 잘 살펴.]

말을 마친 한대붕이 잔월을 공격했다. 잔월 역시 새로 깨달은 음양환의 장단점을 파악할 필요가 있기에 한대붕의 공격이 반가웠다.

[맞지? 내 내공에 자기 기운을 합쳐 나한테 보냈어. 건곤대나이가 틀림없어.]

"아니야."

"왜 아닌데?"

"쟤 나이가 대나이를 이해할 나이야?"

"쟤 천재야."

"그럼 더 공격해 봐. 내가 잘 살필게."

한대붕은 자신의 수많은 단점을 장점으로 보유한 잔월을 향한 질투심을 전투력으로 화했다. 그러나 붕산권의 특성상 평소 수준 그대로 펼쳐졌다. 아직 수련이 부족하여 타를 무시하려면 아도 무시해야 한다. 타를 무시하면서도 아의 필요에 따라 무공 위력을 제어할 수 있는 경지는 한대붕에게 요원했다.

"제길. 뭐가 뭐인 거야?"

장성천은 한대붕과 잔월의 대결을 통해 건곤대나이와 흡사한 수법을 훔치려 했다. 그런데 운기가 너무 빠르고 복잡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져서 멀미하는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어때?"

상대를 공격하면 그 힘이 돌아온다. 그걸 해소하고 다시 공격하면 또 그 힘이 돌아온다. 무극존자는 봉황내의라는 어마어마한 초식으로 돌파구를 찾았지만, 한대붕은 붕천권만 익혔다.

"제길. 대나이는 아닌데 수법이 너무 복잡해 훔칠 수 없어. 저것만 훔치면 광명우사를."

갑자기 한대붕 눈알이 좌우로 격렬하게 흔들렸다. 장성천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광명우사 뒤꿈치 수준에 미칠 수 있을 텐데. 난 언제쯤이면 광명우사처럼 훌륭한 무인이 될 수 있을까."

"날 이기려면 태어나서부터 무공을 수련해야 할 거야."

崩山拳 붕산권을 상대한 덕분에

無界 무계의 뜻을 깨닫다

작가의말

한대붕은 동자공에 붕천권 그리고 외공만 익혔습니다. 방어는 외공과 동자공을 믿고 신경 쓰지 않습니다. 붕권으로 공간 자체를 공격하며 상대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잔월이 익힌 공령환허, 섬전도, 월영도법에는 상극인 놈입니다. 눈속임, 감각 속임에 넘어가지 않고 월영도법의 허실도 무시합니다.

그래서 결정했습니다. 익힌 무공이 적어 궁지로 몰리는 일 없도록 잔월에게 더 많은 무공을 안겨주기로.

글쇠는 이때 미처 몰랐다. 이 사소한 결정으로 예정에 없던 에피소드를 몇 개나 더 만들어야 했는지를.

[海印.]

작가님 코멘트 막줄이 ㅎㅎㅎㅎ

[글쇠]

멋있죠?

[하늘라늘]

ㅋㅋㅋㄲ 추천글보고 재밌게봤어요 간만에 재밌는 무협봅니다!

[글쇠]

감사합니다. 끝까지 힘 잃지 않고 마무리하겠습니다.

[한사]

좋습니다....

[글쇠]

감사합니다.

[마키블루]

글보다 한줄평이 더 재미지다능...

[글쇠]

글보다 작가의말이 훨씬 잘 써진다능...

[박싸장]

그땐 몰랐다.

댓글이 안써지는 날이 있을 줄은.

[글쇠]

드립력이 바닥난 건가요?

[레몬캔디]

조흔 결정이군요

[왑썹브로]

장무기 치트키 건곤대나이 김용소설보면 주인공들이 난관을 헤쳐나갈 치트키 하나씩 있죠 곽정은 좌우호박 단예는 능파비보 위소보는 구라신공과 신행백변 그냥 강한무공이 아닌 치트키 꼭 필요하죠

[왑썹브로]

잔월이쯤 되면 치트키 3개는 장착하겠죠 물론 작가님이 고생만 하신다면...

[글쇠]

다양한 상대에 대응할 수 있도록 다양한 치트키 만들겠습니다.

[학교]

81++++++++++++++++

[수훈TM]

이화접목과도 비슷한 거 같네요
잘 보고 갑니다

[글쇠]

맞습니다. 건곤대나이나 이화접목이나 두전성이나 사량발천근. 비슷한 무공인데 문파나 사용자가 달라서 이름을 다르게 지은 거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