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왕·만독불침
잔월은 당한백과 다른 곳에서 제비를 뽑았다.
"시험이라고 해서 아주 분위기가 딱딱할 줄 알았는데."
잔월의 혼잣말에 시험관이 히죽 웃었다.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이거 질리면 제비뽑기 말고 새로운 방식 만들 거요."
"이거 무슨 글자요?"
요즘 안 쓰는 옛날 글자 하나 있었다.
"염라탕(閻羅湯)이오. 그냥 포기하는 게 나을 텐데."
"포기하면 어떻게 되는 거요?"
"보름 뒤에 다시 도전할 수 있소."
"그냥 도전하겠소. 어떻게 하면 되오?"
시험관은 잔월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내 집에 자네만 한 아들이 있네. 그래서 특별히 말해주는 거요. 이 염라탕은 지금까지 도전해서 살아남은 자가 딱 한 명이오. 혀끝을 대서 맛보다가 쓰러진 걸 약왕이 고생해서 겨우 살렸지. 남은 놈들은 후루룩 삼키다가 후다닥 가버렸소."
"괜찮소. 내가 소싯적부터 독 좀 먹어본 놈이오."
시험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곁에 있는 자에게 염라탕 가져오라고 시켰다.
"독고 소협. 시험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저 안에서 꼭 해결해야 할 일이 있소."
"약왕은 죽은 자도 살릴 정도로 의술이 고명하오. 그러나 염라탕 마신 자를 하나도 살리지 못했소. 혀끝만 댄 자를 겨우 살린 게 최선이오."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자신도 있소."
운룡곡주와 제갈속은 고개를 저으며 물러났다.
당한백이 네 번째 봉우리를 떠나 다섯 번째 봉우리로 출발할 때 즈음하여 시험관이 염라탕을 담은 사발을 잔월에게 건넸다. 무시무시한 이름과 달리 운룡곡에 흐르는 냇물처럼 맑았다.
잔월은 염라탕을 단숨에 마셨다. 염라탕은 마치 성질이 순한 독주 같았다. 입을 지나 배에 갈 때까지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배는 물론 목과 입안까지 불에 덴 듯 화끈한 느낌을 받았다.
호흡구양(呼翕九陽) 포일함원(抱一含元) 인신토고(引新吐故) 운음노찬(雲飮露飡).
구양진경 첫 구결이다. 호흡구양은 순양의 기운만 남기라는 뜻이고 포일함원은 정기신이 늘 몸에 충만하게 하라는 뜻이다. 인신토고는 낡은 기운을 뱉어내고 새 기운을 들이라는 뜻이고 운음노찬은 탁기를 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아주 당연한 구결이지만, 구양진경의 경지를 높이는 데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이기도 하다. 구양진경이 장삼풍에게 최고로 평가받은 건 이러한 기본을 엄격히 지켜야 대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순양이 극에 달하면 쇠하기 마련이고, 순양이 쇠하면 소음이 살아난다. 소음이 극음이 되었다가 다시 순음이 되고 순음이 쇠하면 소양이 생긴다.'
구양진경은 순양의 내공을 얻고 다루는 방법만 적혔다. 이는 순양을 얻을 수 있다면 순음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극양과 극음이 순양과 순음이 되면 서로 배척 없이 섞일 수 있다. 그러면 삼태극이 아닌 음양태극을 이룰 수 있고 힘만 충분하면 무극인으로 갈 수 있다.'
염라탕은 순음에 가까운 독이었다. 구양신공으로 순음의 기운에 저항하면서 잔월은 의도치 않게 구양진경과 무극인에 관한 깨달음을 얻었다.
아예 모르던 걸 깨달은 건 아니지만, 아주 중요한 부분을 확실히 했기에 내공에 관한 성취가 빠르게 올랐다.
'여덟 인을 따라 기운을 움직이면 기운의 성질이 변한다. 음에 속하는 세 인으로 순음을 만들고 양에 속하는 세 인으로 순양을 만든 다음 음양인과 양음인으로 둘을 적절하게 섞으면 무극인이 된다.'
잔월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었다. 훌륭한 깨달음을 얻으며 몸의 기운이 정리되는 과정이었다.
'양의심공.'
잔월은 양의심공으로 마음을 나눴다. 하나는 구양신공에 따라 순양의 기운을 돌리는 데 열중하고 하나는 구양신공을 변형하여 순음의 기운을 얻었다.
두 가지 기운을 돌리며 불필요한 기운을 천천히 몸 밖으로 내보냈다.
"제갈. 내가 지금 환각을 보는 건 아니지?"
어느새 시험을 통과한 당한백이었다.
"나도 믿기지 않는다. 염라탕의 독 기운을 내공으로 바꾸고 있어."
운룡곡주는 내공도 강하고 무공도 강하지만, 식견은 부족한 편이었다.
"독도 어찌 보면 영약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소. 독 기운을 내공으로 바꾸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오?"
"약은 사람 몸에 좋은 기운이오. 과하면 해를 끼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필요한 기운을 담고 있소. 독은 사람 몸에 해로운 기운이오. 적으면 적절한 자극으로 병을 치료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론 인체가 필요로 하지 않는 기운이오."
"그러니까 저 소협은 지금 돌을 만두처럼 삼키는 거란 말이군."
운룡곡주의 비유는 꽤 적절했다. 사람에게 돌이나 다름없는 염라탕을 잔월은 지금 만두처럼 맛있게 먹어치우고 있다.
"염라탕 버텨내는 놈이 세상에 있을 줄은 몰랐다."
제갈속은 잔월 몸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흐름을 파악하는 걸 포기했다. 운기가 너무 빠르고 수많은 기운이 동시에 움직여 선후와 인과 관계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오독교 독왕 삼독사도 버텨냈는데 뭘."
"염라탕이 독성은 삼독사보다 부족할지 몰라도 해독하기는 더 어려울 거야."
그때 염소수염을 기른 노인이 어설픈 경공을 펼쳐 달려왔다.
"곡주.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니오? 염라탕 도전자가 생기면 날 부르기로 했잖소."
"미안하오. 중요한 손님이 있어서 내가 정신이 없었소. 여기 흑룡곡 당 대협이오. 당 대협, 여긴 약왕 어르신이오."
약왕은 당한백의 멀쩡한 얼굴을 보고 아주 기뻐했다.
"아직 도전하지 않은 거요?"
"약왕의 위명은 궁벽한 흑룡곡에서도 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도전자는 제가 아니라 일행입니다. 아마 곧 끝낼 것 같습니다."
약왕은 당한백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잔월!"
수양이 얕지 않은 셋도 약왕의 갑작스러운 고함에 깜짝 놀랐다.
"충맥(沖脈)과 대맥(帶脈)을 잊지 마. 기성해 흐름에 충맥과 대맥을 넣으면 만독불침 완성이야."
약왕이 바로 단무전이었다. 단무전은 음양탕을 먹은 사람이 잔월임을 알아보고 급한 나머지 상황을 살피기도 전에 고함부터 질렀다.
충맥은 포중을 중심으로 상하로 움직이는 기운 흐름이고 대맥은 허리를 따라 도는 흐름이다. 둘 다 기경팔맥에 속하며 임독양맥 다음으로 타통해야 하는 경맥이다.
충맥과 대맥을 타통하는 길은 이미 막혔지만, 타통을 못한다뿐이지 충맥과 대맥으로 내공을 보내는 건 가능했다.
마음이 움직이자(心動) 생각이 움직이고(念動), 생각이 움직이니 내공이 움직였다(氣動). 내공이 움직이자 정과 신이 그에 따라 변화했다(精動 神動).
기성해의 흐름에 충맥과 대맥이 포함되었다. 십이경맥과 달리 충맥과 대맥은 독이 흘러도 전혀 손상이 없다.
잔월은 강한 내공과 빠른 순환 그리고 음양무계와 기성해로 독에 저항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만독불침에 입문했다.
"어르신이 가르친 기성해에 충맥과 대맥 흐름을 결합하면 만독불침이 된다는 말이오?"
운룡곡주의 질문에 단무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무지 놀랐지만, 조금 살피니 잔월이 염라탕 독을 아주 잘 해결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충맥과 대맥에 안정적으로 내공이 흐르게 하려면 임독양맥을 타통해야 하오."
제갈속이 운룡곡주에게 귀띔했다. 그리고 생각 없이 말을 꺼낸 제갈속도 남은 셋과 함께 놀랐다.
"저 소협이 임독양맥을 타통했다고?"
"만독불침이 뭡니까? 흑 장로는 오독교의 삼독사 독도 버텨냈습니다. 그 정도면 이미 만독불침이 아닙니까?"
"지금까진 그냥 독이 들어오면 해결하는 거요. 만독불침이란 독 기운에 아무 영향도 안 받는 걸 말하오. 독 기운이 몸에 들어와도 그저 그러려니 하는 게 만독불침이지."
"그럼 영약도 소용없는 거 아닙니까?"
"임독양맥을 타통하고 만독불침을 이뤘는데 영약을 어디에 쓰겠소."
"임독양맥을 타통하지 않고 만독불침을 이룰 방법은 없습니까?"
당한백 눈이 활활 타올랐다.
"연구 중이오. 이론을 만들긴 했는데 아직 해보진 못했소."
"흑룡곡이 어르신을 돕겠습니다."
"끝난 것 같소."
잔월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과 코로 탁기를 계속 토해냈다. 빵빵하게 부풀었던 잔월의 배와 가슴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배와 가슴이 평소 상태로 돌아오자마자 잔월이 사라졌다.
"외숙공."
어느새 넷 사이에 나타난 잔월이 약왕을 꼭 끌어안았다. 단무전이 눈물을 글썽이며 잔월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이고. 어느새 이렇게 커버렸어?"
"두 분 모두 시험을 통과했음을 정식으로 통보하오. 오늘은 늦었으니 쉬고 내일 심마해로 들어가시오."
일행은 운룡곡주 거처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당한백은 제갈속 거처로 갔고 잔월은 단무전의 거처로 갔다.
"그래.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 좀 해줘."
잔월은 그간 있었던 일을 쭉 얘기했다. 아미파에 가서 음산육걸을 만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단무전이 욕설을 퍼부었다.
"이 잡놈들이. 내게 아무 말도 안 하더니."
"음산육걸이랑 아는 사이예요?"
"응. 그놈들 때문에 네가 태어난 거다."
"얘기 좀 해주세요."
"아니야. 네 이야기 먼저 듣자. 여기 얼마나 심심한 곳인지 모르지? 여기 사는 놈들은 비밀투성이여서 대화도 길게 안 해. 멸세교 놈들은 말이 통하는 놈이 몇 없고."
잔월은 서천주를 치료하고 대륜법왕 일에 말려든 것도 얘기했다. 소림의 숭계자정과 개방 이야기 그리고 무당에서 장삼풍 만난 이야기 등을 흥미롭게 풀었다.
무곡산장에 침입해 비급을 얻고 무곡진을 깬 이야기도 했고 오독교에 있었던 일도 자세히 얘기했다.
"잘 죽였다. 네 외조모가 죽은 걸 연향이 탓이라고 어찌나 구박하던지. 내가 아니었으면 연향이가 학대받아 죽었을지도 몰라. 오죽했으면 내가 연향이를 데리고 살았겠느냐. 그 소교주라는 놈도 연향이랑 배다른 놈이니 죽어도 싸다."
단무전의 요청에 잔월은 완안덕명을 이기고 거세하게 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했다. 단무전은 잔월이 복수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잘했다. 시원하게 죽이는 것보다 두고두고 괴롭히는 게 진짜 복수지."
"외숙공은 그때 왜 떠난 거예요?"
"내게 병이 있었다. 약만으로 못 고치고 내공 치료도 받아야 하는 조금 특별한 병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내공으로 날 치료해줄 만한 자는 음산육걸의 맏이밖에 없었다. 게다가 내가 그놈들과 약속을 어긴 것도 있지. 그런데 병 치료도 오래 걸리고 약속 지키는 것도 오래 걸렸다. 약속은 이미 다 지켰고 병은 약을 몇 달 더 먹으면 된다."
藥王 약왕 단무전의 가르침으로
萬毒不侵 만독불침을 이루다
- 작가의말
단무전의 요청에 잔월은 완안덕명을 이기고 거세하게 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했다.
“덕명을 아냐고요? 내가 아는 환관 중 최고였어요.”
잔월의 눈이 깊이 침잠했다.
“동작 그만. 고환 빼기냐?”
완안덕명 눈이 불탔다.
“넌 내게 고환을 닮은 명월을 줬을 것이여. 그리고 정 마담한텐 꽃사슴 십땡을 줬지. 그래서 나를 한판에 끝내려는 거 아니었어?”
잔월이 버럭 화냈다.
“네 패가 명월이 아니라는 거에 내 돈 모두와 고환 두 개 건다. 쫄리면 뒈지시든지.”
“이 씨발놈이, 어디서 비아그라 팔아.”
“천하의 덕명이 왜 이리 혓바닥이 길어? 후달리냐?”
“후달려? 오냐, 나도 내 돈하고 고환 두 개 건다. 불알 묶어.”
검선이 화투패를 뒤집었다. 펼쳐진 화투패에는 달이 있었다. 단, 명월이 아닌 잔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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