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월영·축기
단무전과 잔월이 머무는 별채는 누구도 접근하지 않았다. 흑표가 접근하는 사람에게 이빨과 발톱을 보이며 적대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경고를 무시하고 접근하다가 중독된 사람이 생긴 후부터 모두 조심했다.
왕 원외는 심장의 한기를 단번에 뽑아낸 관계로 차도가 빨랐다. 단무전이 주는 환약을 먹으며 치료 과정에 상한 몸을 추스르기만 하면 되었다.
왕 원외의 외동아들은 폐가 굳는 병에 걸렸다. 단무전도 병명을 모르는 괴질이었다. 다행히 단무전은 치료 방법을 알았다. 실제로 효과를 본 적 없는 이론뿐이지만, 단무전은 이론 면에선 지금까지 완벽한 모습만 보였다.
왕 공자는 약으로 원기를 보충한 후 내공으로 치료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환자의 몸이 허약하여 치료를 서두르면 오히려 몸이 상했다. 왕 원외는 자연 발생한 병이 아니어서 단번에 치료해야 했지만, 왕 원외의 아들은 누군가 해코지한 게 아니기에 천천히 치료해도 괜찮았다.
왕 공자가 보약으로 몸을 추스르는 사이, 단무전은 잔월을 만독불침과 금강불괴로 만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외숙공, 눈 밑이 까매요."
"느낌이 왔다. 넌 지금 고비다. 이 고비만 넘으면 내가 더 해줄 게 없다."
수련은 때가 있다. 잔월은 타의로 탯줄을 떼기 전부터 수련했다. 과유불급이라고, 과한 수련은 오히려 방해된다. 단무전은 내공과 약을 제외한 부분에선 무지한 편이지만, 얼른 고비를 넘겨야 함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금강불괴와 만독불침을 일정 경지에 올린 후 몇 년 수련을 쉬어야 한다. 쉬면서 때가 되기를 기다려 벽을 허물고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
만약 이번에 고비를 넘지 못하면, 지금까지 했던 수련이 높고 두꺼운 벽이 되어 평생 잔월을 괴롭힐 수 있다.
'다 약초가 너무 훌륭한 탓이야.'
단무전이 화산에서 직접 캔 약초들과 달리, 왕가장 대총관은 최상급 약초만 구해왔다. 덕분에 수련 효과가 무척 좋았고 고비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왔다.
왕 공자 치료로 무척 피곤한데도 단무전이 서두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잔월은 약물에 둥둥 떠 있는 자신이 신기했다. 예전엔 전혀 뜨지 못했는데, 외숙공이 시키는 대로 몸에서 힘을 빼니 오히려 물에 잘 떴다. 물에 뜨려고 몸에 힘줬을 땐 되려 가라앉기만 했었다.
덕분에 등에까지 침을 빼곡히 박을 수 있었다. 예전에 화산에 살 때는 약초의 양이 적어 감히 꿈도 못 꾼 호사였다.
게다가 기해혈을 비롯한 몇 개 혈도를 빼고 대부분 혈도가 자리를 잡은 덕분에 단무전이 할 일도 줄었다. 예전엔 열 손가락으로 내공을 내보내고 받아들이며 분주했는데, 이젠 손가락 몇 개만 필요하니 여유가 넘쳤다.
"내공이 흐르는 위치와 순서를 기억해라. 혈도 이름은 어차피 중요한 게 아니다. 위치와 순서가 중요하다."
기성해가 관건인 만독불침과 달리 옥녀공은 약물이 중요했다. 내공 흐름은 수련 초반엔 단무전 의지대로 옥녀공 운기 경로를 따라 흐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약물 자극으로 제멋대로 바뀐다.
내공의 강약과 흐르는 순서는 잔월만 기억할 수 있다. 아직 만으로 네 살도 채 안 된 잔월이 그 복잡한 흐름과 미묘한 강약의 차이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지 모르지만, 보통 아이와 달리 영특하여 단무전은 혹시나 하는 기대가 꽤 컸다.
단무전의 엄지 소상혈에서 출발한 내공이 잔월의 기해혈 위치를 지나 전신을 돌아다녔다. 정해진 흐름에 반응한 약물이 혈도를 자극했다. 자극을 받은 혈도가 내공을 끌어왔고, 그러한 흐름들이 엉켜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무질서하던 흐름이 어느새 질서를 찾아갔다. 단무전은 잔월에게 내공 흐름을 잘 기억하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자신 역시 세찬 흐름에 휘말려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 시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 단무전의 내공이 고갈되었다. 서서히 내공 주입을 멈춘 단무전이 손을 뗐지만, 잔월의 몸에서 내공 흐름이 멈추지 않았다.
'이런 기사가 있나?'
만독불침을 이루기 위해 단무전이 해주던 기성해의 운기법이 옥녀공에 합류했다. 주입되는 내공이 없음에도 기성해의 운기법으로 옥녀공의 투로를 따라 내공이 계속 흘렀다. 기해혈도 없는 잔월이어서 저번까진 단무전이 손을 떼는 순간 내공이 서서히 흩어졌다. 그런데 이번엔 내공이 흩어지지 않고 옥녀공을 계속 수련했다.
툭툭.
잔월의 혈도에 꽂힌 침이 하나둘 밖으로 뽑혔다. 대부분은 약물에 잠겼지만, 일부는 대야 밖으로 튀어 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평소 자식처럼 소중히 여기는 침이건만, 단무전은 바닥에 떨어진 침을 알은체도 안 하고 모든 정신을 잔월에게 집중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토납법으로 호흡하며 내공을 모았다. 혹여 차질이 생기면 원기를 끌어내서라도 잔월을 살릴 작정이었다.
단무전의 예상과 달리 잔월은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탯줄을 끊기도 전부터 추궁과혈을 받았고, 약식이나마 옥녀공 수련을 시작했다.
만독불침을 이루겠다고 부독액에 넣어 수련하면서 혈도가 크게 자극받았다. 내공은 인체에 무해하기에 혈도에 큰 자극을 주는 편이 아니다. 그러나 부독액은 독과 영약이 섞인 강한 기운이어서 잔월의 혈도를 세게 자극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혈도가 발달했는데 어린 몸이어서 깨끗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주기적으로 주입 받으며 단무전의 내공에 대한 거부감도 전혀 없었다.
여기에 옥녀공이라는 절학이 결합하니 단무전의 타는 속과는 달리 무척 안전했다. 단무전의 걱정은 두부에 박은 머리를 걱정하는 기우나 다름없었다.
내공 흐름이 점점 빨라지더니 잔월의 배에 하얀 서광이 서렸다가 서서히 전신으로 퍼졌다. 서광이 사라질 때 잔월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입을 크게 벌린 잔월이 핏덩이를 왈칵 토했다.
정신이 돌아온 잔월은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는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평소와 다른 결과에 불안을 느꼈다.
급히 잔월을 안아 든 단무전은 맥을 짚었다. 아이는 어른보다 맥이 활발하다. 그런데 잔월의 맥은 노인의 것처럼 느렸다. 다행히 느리지만 힘차서 어디 아프거나 한 건 아닌 듯했다.
잔월의 울음소리에 놀란 흑표가 밖에서 발톱으로 문을 긁었다.
"괜찮아. 조금 놀랐을 뿐이야."
단무전의 말에 흑표는 문을 긁는 걸 멈췄다. 그러나 걱정이 가시지 않은 듯 문밖에서 서성거렸다.
평소 수련이 끝나면 몸이 가뿐하고 활력이 넘쳤는데 이번은 여러모로 특이했다. 약물을 닦아내고 옷을 입은 잔월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바로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마음을 안정하고 토납법으로 내공을 회복한 단무전은 잠든 잔월 손목에 침을 꽂고 내공을 흘렸다. 전신 혈도로 내공을 보내 확인하고 옥녀소수공 구결을 꺼내 거듭 읽었다.
신중한 고민 끝에 긍정적인 결론을 내린 단무전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 잔월은 전신 혈도가 딱딱하게 굳었는데 건강에는 아무 지장도 없었다. 옥녀소수공을 거듭 읽어서 확인한 결과, 소성에 이르렀을 때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혈도가 훨씬 말랑말랑해져서 내공을 쌓는 데 최상의 신체가 된다고 했다.
원래 혈도가 딱딱해지면 건강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다. 혈도는 혈액을 비롯한 온갖 체액과 내공이나 원기를 비롯한 여러 기운이 교차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 문제가 생기면 몸에 탈이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잔월은 기성해 덕분에 혈도가 딱딱해져도 기운의 흐름이 방해받지 않았다. 심장 박동과 혈류가 느려진 문제점이 있지만, 깊은 내공을 보유한 단무전 역시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아이답지 않게 호흡도 깊고 느렸지만, 이건 오히려 내공을 익히기에 적합하여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일반 의원이 진맥하면 애가 죽는다고 난리를 피우겠지만, 내공과 의술을 모두 익힌 단무전이 보기엔 정말 좋은 현상이었다.
한시름 놓은 단무전은 그제야 침을 수습하고 문과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든 흑표는 잔월이 쌔근쌔근 자는 모습을 확인하고 그제야 곤두세운 털을 눕혔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흑표는 잔월 가슴 위에 누워 이불이 되어주었다. 예전과 달리 잔월이 덩치가 자라서 겨우 상체만 덮어줄 정도였다.
한편, 잔월은 평온한 기색과 달리 악몽에 시달렸다. 단무전의 바람과는 달리 잔월은 무아지경에 빠져 내공의 흐름과 순서 그리고 강약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거듭 당부하던 단무전의 말이 무의식에 남아 잠든 잔월을 괴롭혔다. 푹 쉬어야 하는데 잔월의 머리는 계속 내공 흐름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게 악몽이 되어 잔월을 들볶았다.
뱀 같기도 하고 용 같기도 한 괴물들이 잔월을 쫓았다. 처음 보는 상대건만 잔월은 저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여겨 도망쳤다. 빠르게 달렸는데 바로 괴물에게 잡혔다.
잡히고 끝났으면 좋으련만, 잡히는 순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잔월은 온갖 방법을 써가며 도망쳤으나 계속 잡혔다.
괴물들 괴롭힘에 애탈 때 따뜻한 기운이 잔월에게 흘러들었다. 흑표가 접근하자 체취를 맡은 잔월의 몸이 안정을 찾은 거지만, 꿈인 줄도 모르는 잔월이 이런 사정까지 알 방법은 없었다. 그저 외숙공이 자신을 돕는다고 여겼다.
자신감이 생긴 잔월은 더욱더 빠르게 도망쳤다. 번번이 실패하고 나서야 잔월은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실패가 쌓이면서 가지 말아야 할 방향들을 알아냈다. 그렇게 선택이 하나둘 줄어들면서 마지막엔 하나의 길만 남았다. 그 길을 따라 열심히 도망치니 괴물들이 쫓아오기만 하고 잔월을 물지 못했다.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이다 보니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곳은 화산에 있는 잔월의 집과 무척 닮았다. 다른 점이라면, 든든하기만 하고 외관은 볼품없는 목옥이 아닌 왕 원외 장원에서도 가장 멋진 기와집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번쩍.
잔월은 깊은 잠에서 순식간에 깨어났다. 정기가 철철 넘치는 까만 눈동자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현기가 잠깐 서렸다가 사라졌다.
머리로는 여전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옥녀공의 흐름이 잔월의 몸과 무의식에 새겨졌다. 단무전이 만들어낸 기성해의 운기법이 꿈을 통해 한층 발전했다.
단전이 없는 몸이어서 옥녀공은 멈췄다. 단전이 생기기 전에는 내공이 옥녀공 경로로 움직여주지 않을 것이다. 대신 기성해가 잔잔하게 기운을 움직였다.
"흑표, 우리 놀러 가자."
잠에서 깬 잔월은 활력이 넘쳤다.
殘月嬰 잔월 아기
築基 터를 다지다
- 작가의말
난 네 살 때 겨우 미적분이나 끄적거렸는데. 주인공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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