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행·이장
묘운계와 묘운구 그리고 잔월은 눈물의 이별을 했다. 삼 년 가까운 기간 잔월과 깊은 정을 쌓은 운계와 운구는 이별이 슬펐다. 그러나 잔월은 종아리를 더는 안 맞아도 된다는 기쁨이 이별의 슬픔보다 훨씬 컸다.
"아빠. 나 흑표 데리고 갈 거야."
공손완아의 말에 공손무기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럼 잔월도 데려가야 하는데? 잔월이 흑표를 데리고 도망치면 어떡하려고?"
무극환허인 구결을 전부 얻어낸 후 흑표는 공손완아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무 영문도 모르는 공손완아는 흑표의 변심에 오랫동안 슬픔에 잠겼다.
"잔월에게 독을 먹이면 도망치지 못할 거야."
"죄 없는 자에게 어찌 함부로 독을 먹인단 말이냐!"
공손완아는 가주의 호통에 찔끔 놀랐다. 옥녀소수공을 익히고 무극환허인 하편을 암기하는 몇 년 사이 공손완아가 원하는 걸 다 들어줬다. 그러나 죽이라는 것도 아니고 도망 못 가게 독을 먹이라는 말에 이렇게까지 화낼 줄은 몰랐다.
"그럼 나 안가."
공손무기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동 파파에게 맡겼더니 오냐오냐 키워서 안하무인이 되었다. 형들도 가주인 공손무기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버릇을 단단히 고쳐놔야 이후 가주의 위엄을 범하지 못하리란 생각에 손을 허리춤의 검으로 가져갔다.
"가주, 잔월을 함께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홍야차가 황급히 나섰다. 공손무기의 심성을 잘 아는 홍야차는 공손완아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나섰다.
"왜?"
급하니 머리가 잘 돌아갔다.
"무극존자는 아씨를 경계할 겁니다. 이번에 대대적으로 제자를 받는 것도 분명히 꿍꿍이가 있습니다. 내공을 익힐 수 없을 뿐, 잔월은 다른 방면에서 모두 뛰어납니다. 어쩌면 무극존자가 잔월을 진짜라고 여기고 아씨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할지도 모릅니다."
공손무기는 홍야차를 보며 반성했다.
'저 아둔한 놈도 생각하는 걸 내가 놓치다니. 다 욕심이 눈을 가려서다. 천하도 욕심나고 절세 무공도 욕심나고. 이러다 욕심 때문에 일을 그르칠지도 모른다.'
"공손완아."
공손무기의 목소리는 무척 차가웠다.
"네, 가주."
공손완아는 눈치껏 몸을 사렸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음부터 이런 식으로 떼를 쓰면 네 성을 바꿔버리겠다."
공손완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공손의 성을 못 쓰게 한다는 건 무곡산장에서 쫓아낸다는 뜻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도 공손무기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공손완아를 내보냈다.
"잔월을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은데 좋은 생각 있느냐?"
"오독교에 부탁해 독을 먹이면 됩니다. 정기적으로 해독약을 먹어야만 한다면 감히 도망치지 못할 겁니다."
"완아 모르게 처리해라."
"네."
공손완아가 옥녀소수공을 입문했다. 게다가 마침 무극존자가 제자를 받는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모든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져서 공손무기는 하늘이 자신을 천자로 점지했다고 생각했다.
오독교 소교주 일행은 이미 떠났고 혹시 옥녀소수공에 문제가 생길까 봐 장로 두 명을 남겼다. 해독은 물론 의술에도 일가견이 있어 꽤 도움이 되는 자들이었다.
둘은 무곡산장 밖의 공터에 허름한 집을 짓고 살았다.
"어서 오시게."
두 장로는 늑대 이빨을 귀와 코 그리고 눈두덩이에 꽂고 금속 환으로 입술을 꿴 요란한 모습을 했다.
독곡에서 온갖 기괴한 사람을 봐온 두 장로는 홍야차의 흉측한 외모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홍야차가 사정을 간략히 설명하자 장로는 바로 짐을 뒤적였다.
"이건 독이고, 이건 해약이오. 그리고 이건 독이 발작하게 하는 약이오."
오독교 장로가 준 독약은 홍야차가 알던 것과 다른 방식이었다. 독을 먹어도 아무 해가 없다. 해약을 먹으면 독이 사라지고, 다른 독을 사용하면 기존에 먹은 독이 발작한다.
"감사합니다."
'기해혈이 생겼으면 가주의 제자나 양자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구나.'
순진무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잔월에게 연민을 느꼈다.
홍야차는 잔월에게 독이라고 알려주며 먹였다. 음식에 넣어서 속여 먹이는 건 홍야차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이건 아무 해도 되지 않는 독이다. 그러나 다른 독과 합쳐지면 바로 목숨을 끊는 극독이 된다. 해약은 가주께 있으니 네가 다시 무곡산장에 돌아오면 그때 줄 것이다. 똑똑한 아이니 허튼짓은 하지 않고 아씨에게 해가 되는 언행도 삼가리라 믿는다."
"진짜네?"
잔월은 홍야차가 거짓말로 자신을 어르는 게 아님을 알았다. 말 못 하는 흑표와 함께 자라면서 표정이나 자세로 감정을 읽어내는 데 익숙했다. 더구나 홍야차가 심계가 깊은 자가 아니어서 판단이 어렵지 않았다.
"봉황산에 가서 뭐하면 되나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그저 아씨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철부지가 무공 제대로 못 익히면 내가 종아리 맞아야 하나요?"
딱히 아프거나 하진 않았지만, 종아리 맞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종아리를 때리는 행위가 품은 벌을 준다는 의미가 잔월은 이가 갈리도록 싫었다.
"나도 모른다."
잔월은 현재 열 살이고 공손완아는 열한 살이다. 그러나 홍야차도 그렇고 동 파파도 잔월이 공손완아를 철부지라고 부르는 데 대해 아무 반발이 없었다. 공손완아에 비교하면 잔월은 어른이 아니라 늙은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았다.
홍야차는 잔월이 똑똑한 아이니 절대 도망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잔월은 독에 대한 두려움 자체가 없는 아이였다. 봉황산에 도착한 후 기회를 봐서 도망칠 궁리가 벌써 머리에 가득 찼다.
늦가을이 되어 누렇던 벌판이 까맣게 변할 때, 잔월과 흑표 그리고 공손완아가 마차를 타고 무곡산장을 떠났다.
호위는 홍야차와 동 파파 그리고 수십 명의 병사가 맡았다.
"아씨. 면양 진우량이라고 합니다."
병사를 이끄는 자는 홍건군 서수휘의 수하인 진우량이었다. 서수휘는 한양을 수도로 하고 국호는 천완이라 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서수휘는 허수아비 왕이었고 실질적 권력은 진우량과 예문준이 나눴다. 이 년 전에 예문준이 반란을 시도하다 진우량 손에 죽은 후 진우량이 천완의 실세가 되었다.
"여기는 견자 진선입니다."
진선은 열대여섯 정도 나이로 보였고, 덩치는 웬만한 어른보다 더 컸다. 등허리가 곰처럼 실해서 얼핏 봐도 힘이 장사일 것 같았다.
"선위사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공손완아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마차가 출발하자 잔월은 바로 드러누웠다. 이틀이나 잠도 안 자고 무극환허인 구결을 외웠다. 진짜 구결을 외운 게 아니라 파자한 구결을 외웠다. 어차피 진짜 구결이든 파자한 후든 의미를 모르는 게 똑같기에 어느 걸 외워도 상관없었다.
이미 외워뒀지만, 확실하게 하려고 이틀을 투자했다.
구결을 외운 후 그간 파자를 적어뒀던 종이를 전부 태웠다. 봄에 무공을 훔쳐 배우다가 들킨 자가 배를 가르는 형벌로 죽은 걸 봤기에 이 기회에 증거를 없앴다.
잔월이 깊은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점심 저녁 다 거르고 잠만 잤기에 배가 고팠다. 흑표를 안고 조심조심 마차를 나오니 바로 곁에 객잔이 보였다.
'철부지가 날 그냥 마차에 두라고 한 모양이구나.'
"흑표, 가서 먹을 거 좀 구해."
흑표는 객잔과 가까운 작은 산으로 달려갔다. 잔월은 두레박을 내려 우물물을 길어 마셨다. 갈증이 풀리자 불을 피울만한 곳을 찾아 객잔 주변을 돌아다녔다. 늦가을이어서 실수하면 산불이 날 수도 있다. 바람도 가늠해야 하고 가까운 곳에 물이 있어 불이 퍼져도 바로 끌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건 대총관에게 들은 이야기다. 불 피우기 좋은 위치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자신한텐 불 피울 부싯돌조차 없다는 생각에 다시 객잔으로 돌아갔다. 마구간 지붕에 기어 올라가 달을 바라보며 흑표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아무래도 객잔 부엌에 불씨가 남아있길 바라야 했다.
"부친. 소자는 공손 소저가 마음에 안 듭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잔월은 귀를 쫑긋 세웠다.
"네 마음에 드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진선과 진우량 부자의 대화였다.
"사내대장부라면 응당 자기 힘만으로 천하를 쟁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우량의 호흡이 거칠게 변했다. 진우량은 애써 화를 가라앉힌 후 꾹 눌린 소리로 진선에게 말했다.
"한림아 곁에는 유복통과 명교 세력이 있다. 장사성 곁에는 강남의 기인이사가 넘쳐난다. 서수휘 곁엔 팽영옥 땡중의 제자들이 있지."
"하지만, 숙부 백부들도 일당백의 용사 아닙니까."
"만부부당의 용사라도 무림 고수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다. 궁수만 아니면 무림 고수를 막을 방법이 아예 없다. 궁수도 경공마저 훌륭한 고수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무곡산장의 공손 가문은 강호에 유명하지 않습니다."
"공손 가문의 무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홍야차라는 놈만 해도 몸에 창칼이 박히지 않는다. 동 파파라는 노복도 마음만 먹으면 우리 일행을 전부 죽일 수 있다. 저런 자들이 노복을 자처하게 하는 게 공손 가문이다."
진선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진우량은 혀를 쯧쯧 찼다.
"무곡산장과 연합하면 서수휘를 해치울 수 있다. 그럼 내가 왕이 되고 넌 태자가 된다. 장사정과 한림아를 해치우면 난 황제가 되고 넌 황태자다. 네가 따로 마음에 둔 여인이 있음은 알지만, 천하를 위해 여자 하나 못 버리겠느냐?"
"소자 부친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한림아는 농사꾼 출신이고 장사성은 소금 나르던 천한 놈이다. 이 아비도 어부의 자식이다. 이제까지 천한 신분이 황제가 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존귀한 혈통을 이어온 무곡산장의 도움을 받아야만 황위에 등극할 수 있느니라."
"소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일 마차에 앉은 동자를 말에 태우고 네가 마차에 타거라. 고작 열한 살인 계집이다. 네 학문과 견식 그리고 타고난 성품이면 충분히 계집을 홀릴 수 있다."
'진선 저 못생긴 놈이 철부지를 많이 괴롭혀 줬으면 좋겠어.'
잔월이 훔쳐 듣는 줄도 모르고 쑥덕거리던 진우량 부자가 객잔에 돌아갔다. 그러고도 한참 더 기다려서야 흑표가 새 두 마리를 입에 물고 나타났다. 늦가을이라 살이 통통해 무척 맛있을 것 같았다.
잔월이 털만 뽑고 배를 가르고 내장 뽑는 건 흑표가 했다. 한 마리는 흑표가 생으로 먹고, 한 마리는 부엌의 불씨를 살려 노릇노릇 맛있게 구워 소금에 찍어 먹었다.
'내일은 말을 타야 하니 푹 자둬야지.'
晩秋行 늦가을 여행
離莊 산장을 떠나다
- 작가의말
진우량은 의천도룡기에서 몹시 나쁜 놈으로 나왔죠. 주원장을 이기고 황제가 됐으면 그럴 일이 전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긴 놈은 왕이 되고 진 놈이 역적이 되는 거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이기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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