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대환단
천희연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잔월 얼굴이 확 붉어졌다. 부모 안배에 따라 얼굴도 모르고 혼인하는 게 일상인 세상이다.
가끔 글 좀 읽은 선비들이 술 먹고 시를 읊어 여자한테 고백하기도 하지만, 그 대상은 보통 기녀다.
여자가 먼저 남자에게 마음을 드러내는 일은 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잔월은 심장이 날뛰는 소리가 천희연에게 들킬까 봐 손을 들어 가슴에 댔다.
"제가 곧 죽을지도 모르는 몸이어서 싫은 건 아니죠?"
"절대 아닙니다."
천희연이 오해할까 봐 다급히 말했다.
"그러나 혼인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강하게 주장하면 돼요."
"만약 천 소저 가문에서 단 공자와 혼약을 맺어줬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꽤 오랜 기간 묻어뒀던 완청이 떠올랐다. 완청은 잔월과 정혼 한 상태에서도 부모의 명을 거역하지 못했다.
"천 씨 성을 버리겠어요. 양육의 은혜는 어떻게든 갚으면 되죠."
천희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둘은 일반적인 남녀 관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잔월이 내상으로 말도 못 하던 한 달이 넘은 기간 천희연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잔월을 돌봤다. 요새는 몸이 불편한 천희연을 잔월이 돌봤다. 그 과정에 이뤄진 신체 접촉은 부부도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그게 아니어도 천희연은 잔월이 너무 좋았다. 처음 봤을 때는 아무 느낌이 없었으나 쌍둥이를 구할 때 보여준 단단한 모습에 마음이 확 끌렸다.
잔월은 말없이 손을 내밀어 천희연 손을 잡았다. 더 빨개질 여지가 없을 것 같던 천희연 얼굴이 한겨울의 화로처럼 달아올랐다.
"꼭 낫게 할 겁니다. 희연."
'나는 화산파와 사부와 의부모를 버릴 수 있을까?'
천희연의 고백으로 둘의 사이는 좀 더 스스럼없게 변했다. 온천에서 몸을 깨끗하게 씻고 옷도 깨끗하게 빨았다. 내공으로 말린 옷을 갖춰 입고 천희연을 등에 업은 잔월은 경공을 펼쳐 동남쪽으로 달렸다.
'희연과 의리를 지키는 게 협일까? 아니면 세속의 관습에 따라 문파와 사부 그리고 의부모에 대한 효를 지키는 게 협일까? 도대체 협이란 건 무엇인가?'
화산파에서 다른 혼처를 정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니 너무 막막했다.
"가가, 무작정 찾아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좋은 생각이 있소?"
"이렇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잔월은 천희연 생각에 따르기로 했다.
잔월은 천희연을 업고 닷새를 달려 소실봉 밑 등봉현에 도착했다. 객잔에 방 하나 잡은 잔월은 천희연에게 채소 죽을 먹였다.
"제가 먹을게요."
그러나 잔월은 고집을 부려 불어서 식힌 죽을 천희연 입에 직접 넣어줬다. 배불리 먹은 천희연이 쌔근쌔근 잠들자 그제야 식사했다.
식사를 마친 잔월은 다리를 꼬고 허리를 쭉 편 다음 구양진경을 수련했다. 통혈지신을 이룬 잔월이기에 운기 속도가 웬만한 고수의 열 배는 훌쩍 넘었다. 수련한 기간이 짧고 깨달음도 깊다고 할 순 없지만, 옥녀공을 대성한 튼튼한 몸에 통혈지신까지 이뤄 심법 효과는 무척 좋았다.
밤이 깊어 벌레 소리만 요란했다. 잔월은 천희연을 깨운 다음 운기를 도왔다. 여섯 경맥이 끊어져 순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무공을 수련한 덕분에 다른 혈도를 통해 기운이 움직여줬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경맥 하나 망가져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을 것이다.
일각 정도 운기를 하니 천희연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짐을 챙긴 잔월은 천희연을 등에 업고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가가. 외기와 순환을 이뤄야죠."
잔월이 지나면 벌레들이 울음을 멈췄다. 예전에 천부전이 쌍둥이를 업은 채 기척을 전혀 안 들키고 접근한 적 있다. 소림사에 몰래 들어가려고 등봉현까지 오는 내내 기척 감추는 수련을 열심히 했다.
"마음이 나뉘지 않소."
양의심공에 실패했다. 천희연이 익힌 기척 숨기는 법은 아미파 연남비(燕南飛)의 경공에 포함된 방식이다. 잔월이 익힌 섬전도와는 잘 섞이지 않았다.
양의심공으로 마음을 나눠 하나는 섬전도의 경공에 하나는 기척 숨기는 법에 신경 써야 한다. 그런데 양의심공이 안 되어 기척 숨기는 데 실패했다.
"섬전도에도 기척 숨기는 법이 있지 않을까요?"
잔월은 소림사로 향하면서 섬전도 구결을 떠올렸다. 구결을 여러 번 반복해 떠올리다 보니 어느새 잔월이 지나가도 벌레들이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되긴 했는데 어떻게 한 건지 도무지 모르겠소."
기척을 숨기는 데 성공했지만, 어떻게 한 건지 감이 안 잡혔다. 뭔가 알 것 같으면 근질근질 괴로운 느낌이 들 텐데, 전혀 그런 게 없었다.
소실봉 아래 작은 숲에 지어진 소림사는 세월이 흐르며 그 크기를 천천히 불려갔다. 현재는 수천 명 스님이 사는 큰 규모를 이뤘다. 무공을 익히는 무승보다는 불경을 외우고 불사를 하는 불승이 더 많다. 손발이 부족해 장경각을 비롯한 몇 곳을 제외하면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방장이 있는 곳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소림 정도 규모와 역사를 갖추면 방장 권한이 그리 대단치 않게 된다. 그리고 예전의 열 명 가까운 방장은 대부분 원 황실이 지목한 불승이지만, 이번에 방장을 맡은 숭계자정은 무공이 뛰어났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갖고 온 나한인가. 아니면 지옥의 번뇌를 갖고 온 야차인가."
벌레들도 감지하지 못한 잔월의 기척이다. 그러나 숭계자정을 속이진 못했다.
"선의로 찾아온 손님입니다."
"그렇다면 어서 들어오지 않고 뭐 하는 것이오."
방장실에 들어가니 숭계자정은 이미 이부자리를 걷고 가사까지 차려입었다. 훨씬 먼 거리에서 잔월 기척을 감지했고 자신을 찾아왔음도 짐작한 거였다.
"늦은 시간이어서 차는 없소."
"괜찮습니다."
잔월은 품에서 불경 여섯 권을 꺼내 숭계자정에게 건넸다. 내용을 꼼꼼히 읽은 숭계자정은 불경을 순서대로 차곡차곡 정리했다.
"소림 낙관이 있긴 하지만, 장경각주가 밖으로 내보냈다는 표식도 찍혀있소. 주인은 아마 따로 있을 것이오."
숭계자정은 소림의 물건이 아니라며 잔월에게 불경을 돌려줬다.
"구양진경입니다."
숭계자정은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오?"
잔월은 숨을 한 번 가다듬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자(內子 - 아내)가 경맥 여섯이 끊어졌습니다. 대환단은 끊어진 경맥도 잇고 잘린 팔도 자라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숭계자정은 천희연을 몇 번 훑어봤다.
"대수인에 당한 것 같소."
타고난 감각과 경험을 결합해야 부릴 수 있는 재주로, 기초가 부실한 잔월은 얻기 힘든 능력이었다.
"목숨이 위험한 걸 구해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더군요."
원수나 다름없는 대륜법왕을 해독했는데 고마움은커녕 해코지만 당했다.
"궁지에 몰리면 부처 가르침도 잊히는 법이오."
턱에 난 짧은 수염을 쓰다듬던 숭계자정이 질문했다.
"대환단과 구양진경을 교환하길 원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 불경이 구양진경이라는 걸 안 믿는 겁니까?"
보물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에겐 옥도 그냥 돌멩이다.
"구양진경인 건 알고 있었소."
숭계자정의 반응이 너무 밋밋하여 안 믿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소림의 절기를 회수하고 사람 목숨도 구하는 일입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잔월이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안타깝지만, 소림엔 대환단이 없소. 실질적으로 대환단이라는 약을 만든 적도 없소."
잔월과 천희연은 의심이 듬뿍 담긴 눈으로 서로 바라보았다.
"그럼 강호의 소문은 뭡니까?"
잔월이 화가 조금 실린 말투로 추궁했다.
"짐승은 강한 적을 만나면 몸을 부풀린다오. 소림이 약할 때 강하게 보이려고 의도적으로 퍼뜨린 헛소문이요. 소환단은 몇 개 있지만, 부인에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오."
숭계자정이 부끄러움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방장 스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실낱같은 기대가 무너지자 잔월은 눈앞이 캄캄했다.
"불경은 다시 거둬가시오."
"불경 드릴 테니 제발 도와주십시오."
더한 것을 달라고 해도 내놓을 용의가 있었다.
"남은 하나는 밖에 숨겼습니다. 바로 찾아서 드리겠습니다."
숭계자정이 반장을 하자 여섯 권의 불경이 날아서 잔월 앞에 차곡차곡 쌓였다.
"불경을 밖으로 내보낸 전대 장경각주가 내 사부요. 소림과 인연이 다한 불경이오. 억지로 품고 있으면 오히려 화가 되오. 그 인연의 끝이 시주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소림과는 인연이 다했소."
"저는 화산파 제자이고 내자는 아미파 제자입니다. 화산과 아미가 구양진경을 익혀도 괜찮다는 말씀입니까?"
애원이 먹히지 않자 구양진경을 익힌다고 협박했다.
"구양진경은 총 세 개 있소. 시주의 불경이 첫 구양진경이고 소림에 있는 게 세 번째요. 그리고 두 번째 구양진경은 무당파에 있다오. 수십 년 전에 무당파 장문인이 몰래 장경각에서 훔쳐 갔소."
잔월뿐 아니라 표정 변화가 드문 천희연마저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도둑맞았는데 왜 안 찾아오는 겁니까?"
"무당파 장문이 천하를 위한 일이라고 글을 남겼소. 그게 아니면 우린 도둑맞은 사실조차 몰랐을 거요. 시주의 일곱 권 불경을 소림 밖으로 내보낸 것도 무당파 장문의 조언을 따른 것뿐이지. 참, 이건 비밀로 해야 하오. 이미 원적에 든 사부와 나만 아는 일이오."
잔월은 불경 여섯 권을 주고 대환단을 받은 다음 마지막 한 권을 내놓으려 했다. 굳이 천희연까지 대동한 건, 소림 방장이 대화를 거부하면 협박하기 위함이었다. 늦은 밤에 소림 방장 거처에 묘령의 여인이 발견되는 건 무척이나 난처한 일이다.
그런데 소림사에는 대환단이 아예 없었다. 받으려는 물건은 존재한 적도 없고 주려는 물건은 상대가 강력히 거부했다. 애원도 협박도 전혀 먹히지 않았다.
잔월이나 천희연 모두 머리는 총명하지만, 강호 경험이 적은 관계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했다.
"여기 고심환(固心丸)이네."
숭계자정이 등 뒤 벽에 숨긴 암문(暗門 - 숨겨진 문)을 열고 환약 몇 알을 꺼냈다.
"한 알 먹으면 닷새 정도 평소처럼 움직일 수 있을 거요."
"저희를 믿습니까?"
소중한 물건을 숨기는 곳 같은데 외인에게 함부로 공개하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이거요? 도둑맞으면 인연이 다한 거지. 굳이 숨긴 건 밖에서 온 도둑이 아니라 마음 수양이 부족한 제자들이 흔들릴까 봐 걱정되어서요."
아미파에서 자라면서 스님들의 소탈한 모습을 많이 본 천희연도 숭계자정의 언행에는 적응이 힘들었다.
"이걸 먹고 개봉에 가보시오. 내상도 문제지만, 외상도 치료가 필요하오. 개방에 외상 치료에 무척 좋은 약이 있소."
개봉은 큰 도시다. 잔월과 천희연이 진짜 부부여도 업고 다니는 건 사람들 이목을 끄는 일이다. 숭계자정은 둘이 말로만 부부지 아직 선을 넘지 않았음을 알고 고심환을 건넸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염치없지만, 내상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문제는 아까 이미 답을 준 것 같소."
잔월의 이마 주름이 점점 깊어졌다. 뛰어난 기억력으로 처음부터 했던 대화를 되짚었지만, 언제 말한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방긋 웃는 천희연은 알아들은 듯했다.
"방장 스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고심환을 품에 넣고 잔월과 천희연은 숭계자정에게 큰절을 올렸다. 목숨이 걸려 간절하다고는 하지만, 밤중에 불쑥 찾아와 애원하고 협박하고 온갖 못난 모습을 보였는데도 화조차 내지 않았다. 대가도 없이 고심환이라는 대단한 영약을 내주기도 했다.
숭계자정의 인품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사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대사께 갚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베풀며 살겠습니다."
잔월의 말에 숭계자정이 기꺼운 웃음을 지었다.
"자네처럼 힘이 강한 자가 바르게 살면 세상이 좋아지겠지. 소림사 소유인 고심환을 내주고 내 공덕을 쌓고, 자네가 선행을 펼칠수록 내 공덕이 커지고. 이런 힘 안 들이고 부처께 이쁨받는 일이 자주 있었으면 좋겠소."
홀가분한 마음으로 소림을 떠나는 둘의 귀에 숭계자정의 전음이 울렸다.
[참, 대환단 없다는 거 비밀로 해주시오. 방장 노릇 더 하고 싶으니까.]
少林 소림의
大還丹 대환단은 뻥이었다
- 작가의말
숭계자정은 실존 인물입니다. 하지만, 실존 인물에 대한 고찰 없이 이름만 가져다 썼음을 당당하게 밝힙니다.
완청은 순종적이고 쉽게 수긍하는 저 시대 전형적인 여자.
완아는 욕심이 많고 자기 삶을 주도하려는 의욕이 강한 여자. 웬만한 남자도 완아만큼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시대와 완전히 부합하지 않기에 정상적인 방법으론 그 욕심을 채울 수 없죠. 악역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천희연은 둘 사이입니다. 과한 욕심은 없지만, 본인이 확실히 원하는 걸 위해선 과감히 저항할 수 있는 여자.
Comment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