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양기
잔월은 서두르지 않았다. 무극존자와 나눈 마지막 대화를 곱씹으며 천천히 달렸다.
'서두름은 빠른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조급한 마음에 하려는 일이 통제에서 벗어날 정도로 다그치는 걸 말하는 거다.'
힘센 사람이 하루에 장작 열 단을 패는 건 서두르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은 장작 열 단 패고도 멀쩡할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약한 사람이 조만간 비가 올 것 같다는 걱정에 무리하여 장작 다섯 단을 패고 대엿새 드러눕는다면 그건 서두른 거다. 장작 다섯 단 패느라 몸이 힘들어 대엿새 쉬면서 오히려 일을 망친다.
'부친 생사를 확인한다. 살아계신다면 어떻게든 찾아내고, 아니라면 힘을 키워 천천히 복수한다. 외숙공 찾는 일이 더 시급하다.'
잔월은 달리면서 자신을 설득했다. 책 좀 읽고 견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머리로 아는 지식은 많다. 그러나 그걸 마음에 새기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드물다. 복수를 서두를 필요가 없음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치미는 조급함에 일을 망칠 가능성이 크다.
'무극존자는 복수를 십 년이나 준비했고 이제 몇 년 더 참을 작정이다. 천하제일도 복수를 힘들게 하는데 나는 서두를 자격도 없다.'
'죽은 사람 복수도 중요하지만, 산 사람이 더 중요하다. 복수에만 전념하며 주변을 돌보지 않으면 또 소중한 사람을 잃고 복수해야 한다. 평생 복수만 하며 살 순 없다.'
'과욕은 금물이다. 무곡산장이 무극환허인을 탐내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궁지에 몰리진 않았고 무극존자의 올가미에 걸리지도 않았다. 공손완아가 무곡산장에서 누리던 것들을 잊었다면 다시 불구덩이로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림도 다 보고 글로 된 비급도 외웠을 테니 무극환허인을 익힐 게 뻔하다.'
생각이 공손완아에 이르자 마음이 울적해졌다. 잔월은 달리던 것을 멈추고 바위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여름의 따가운 태양이 알뜰하게 덥힌 바위가 잔월의 몸을 뜨겁게 지졌다.
공손완아에 대한 미움은 많이 희석되었다.
오히려 불쌍하기만 했다. 호의호식이라지만, 어려서부터 원수 손에 키워졌다. 본인은 모르지만, 숙부인 무극존자에게 복수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생각이 완청에게로 이어졌다. 이젠 공손완청이라고 불러야 할 정혼자.
'설마. 완청하고 맺어준 건 나를 복수에 끌어들이기 위함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무극존자는 십 년이 넘은 기간 복수를 준비하면서 많이 지쳤다. 당연히 누군가 함께 복수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완청의 무공 자질이 평범하여 잔월에게 생각이 미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잔월을 아껴 곁에 두고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다. 강릉으로 가는 일도 본인이 나섰고 잔월 가족을 찾는 일도 무척 열성적으로 도왔다.
'이제 나랑 완청은 어떻게 되는 거지? 완청에게 나랑 함께 떠나자고 하면, 무곡산장의 부귀영화와 혈육을 뿌리치고 떠나줄까?'
아예 눈을 감고 낮잠을 자버렸다. 주황색 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일 때야 잔월은 다시 눈을 떴다.
'개운하다. 뭔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은 정해진 것 같구나.'
고민은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다. 고민은 답이 아닌 것들을 배제하는 과정이다. 무수한 가능성이 상상 속에서 부딪히며 부서진다. 그러고 남은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걸 답이라고 여긴다.
푹 자고 일어나니 마음이 시원했다. 명확히 모르지만, 잔월 마음은 정해졌다. 고민하던 일에 맞닥뜨렸을 때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면 된다.
예전에 무공을 수련하며 지냈던 곳은 편작의 거처에서 반나절 좀 더 걸리는 거리였다. 잔월은 토실토실 살찐 놈이 보이면 사냥하기도 하며 새벽에 맞춰 도착했다.
"두천."
"오랜만이네. 어서 와."
두천이 살갑게 다가와 잔월 손에 들린 사냥감을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작은 칼을 꺼내 손질을 시작했다.
"공손완아 무극존자 조카라며? 원래 다른 곳으로 가려 했는데 대사부가 고집을 부려 이곳에 왔어."
두천의 말에 잔월은 마음이 아팠다. 사부는 정이 많은 사람이다. 일부러 완청도 아는 이곳으로 옮긴 것은, 완청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함이다.
다른 곳으로 갔다면 완청이 이곳을 무곡산장에 알려줬는지 알 방법이 없다. 이곳에 있으면 위험하긴 하지만, 무곡산장의 방문 여부를 통해 완청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때 한자강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튼튼한 몸을 믿고 바깥 평상에서 자던 한자강은 둘의 대화에 잠을 깼다.
"잔월, 드디어 왔구나."
"자강 형. 벌써 고비구나."
"의모께서 이번 고비만 넘으면 두천만큼 빠르게 달릴 수 있다고 하셨어."
짧은 기간이지만, 상관소혜한테 배운 자강은 외공 성취를 빠르게 올렸다. 종남에서 자라며 어릴 적부터 제대로 배웠고, 거기에 총명하다곤 할 수 없는 혁중을 가르친 경험도 있어 자강의 수련에 큰 도움을 줬다.
예전에 셋이 함께 자던 집은 상관소혜와 혁중이 차지했다. 두천이 굽는 맛있는 고기 냄새에 홀린 상관소혜와 혁중도 옷을 차려입고 나왔다. 월영고랑까지 일어나자 잔월은 셋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사부, 의부, 의모. 독고잔월이 돌아왔습니다."
상관소혜와 혁중의 눈이 동녘에 뜨는 태양보다 더 동그랗게 떠졌다.
"큰 외숙공을 찾았습니다. 제 어머니는 묘연향이고 강릉에서 반년 정도 살았습니다. 그전까지는 다른 곳에서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외숙공의 행방을 묻는 편지를 받아 답신한 적 있는데, 그때 편지를 전한 표국이 서안에서 편지를 의뢰받았다고 했답니다."
잔월은 내공을 움직여 섬전도의 경공을 펼쳤다. 갑자기 사라진 잔월이 평상 위에 나타나자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다 합쳐도 상관소혜와 혁중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제 부친이 남긴 경공입니다. 이름은 섬전도라고 하는데, 의부와 의모께선 혹시 아시는지요?"
"글로 남겼겠지? 대사형 필체가 맞는지 좀 보자."
'일찍 보여드릴걸.'
부친의 무공은 자신만 알고 있으려는 '욕심'에 필체를 확인받을 생각은 아예 떠올리지 못했다.
"으앙. 혁중, 나 대사형 보고 싶어."
섬전도의 구결을 몇 글자만 확인하고 상관소혜는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얼굴을 혁중 가슴에 묻은 채 대사형을 외치며 목놓아 울었다. 담두천도 한자강도 몸을 돌리고 어깨를 들썩였다. 월영고랑도 사별한 부인과 완청이 생각나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한바탕 울고 나니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상관소혜야 원래부터 말이나 행동이나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성격이어서 괜찮은데, 눈과 코가 아침노을보다 더 빨갛게 물든 다섯 남자는 서로 보기 부끄러웠다.
어색한 가운데 고기가 구워지고 술이 올라왔다.
"잔월. 내 어머니는 독고경천 대협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다고 들었다. 아니었으면 난 태어나지조차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은혜를 너를 통해서라도 갚고 싶구나."
"두천, 부친은 우리가 장래에 의형제가 될 걸 알고 미리 도움 주신 거야."
"내가 뭐랬어. 대사형처럼 잘생긴 사람이 둘 있을 수 없다고 했잖아. 분명히 대사형 아들이라고 내가 했어 안 했어?"
"사저. 사저는 대사형이 반로환동하며 기억을 잃었다고 우겼습니다. 대사형 아들이라는 의견은 내가 시종일관 주장했습니다."
"내가 대사형 아들 틀림없다고 하니까 네가 아니라고 했잖아."
"내가 대사형 아들이라고 할 때는 사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 울고 나서 술을 붓고 고기를 뜯었다. 주량이 대단한 둘인데 얼마 안 마시고 취해 대판 싸웠다. 마치 잘난 자식 자기 닮았다고 우기고 못난 자식은 너 닮았다고 싸우는 부모의 모습과 흡사했다.
"이젠 부모가 누군지 알았으니 원수가 누군지도 알겠구나."
"전진용문파겠죠. 그러나 전진용문파의 힘으론 검선은커녕 제 부친도 제압할 힘이 없었다고 하니 분명히 도움을 준 자들이 있을 겁니다. 서두르지 않고 관련자를 전부 색출한 다음 확실히 갚아주겠습니다."
"대사형."
잔월의 단호한 모습에 눈물이 앞을 뿌옇게 가렸다. 어둠이 무서워 자정만 되면 우는 자신을 업고 경공으로 종남산을 누비며 달래던 소년 시절의 대사형이 생각났다.
"당장 서안으로 가자."
혁중의 말에 상관소혜가 반대했다.
"저 얼굴로 서안에 가면 누가 봐도 대사형 핏줄인데."
"사저, 우리조차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당시 사건을 제대로 조사할 적기입니다."
"왜?"
"지금 남궁세가가 안경에서 무림대회를 열었습니다. 소림의 허울뿐인 무림대회가 아니라 미리 청첩장을 돌려 천하의 군웅을 전부 불러모은 무림대회라고 합니다. 완안덕명을 비롯한 수뇌들이 종남을 비운 지금이 적기가 아니면 언제가 적기겠습니까?"
"남궁세가라면 주원장하고 손잡은 놈들이잖아."
"그때 주원장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달라고 했는데. 가서 완안덕명을 죽여달라고 하는 건 무리겠죠?"
"그런 빈말을 곧이곧대로 믿냐? 그리고 그 말은 우리한테 한 게 아니라 대사형한테 한 거야. 우리가 찾아가면 문전박대나 당하겠지."
점심이 되기 전에 여행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마지막 난관이 남았다.
"사부. 함께 서안으로 가심이 나을 것 같습니다."
"무공도 못 펼치는 내가 함께 가면 짐만 된다. 여기는 무척 안전하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거라. 요즘 실마리를 잡은 게 있는데 당분간 거기에 집중하고 싶기도 하고."
설득에 실패한 잔월은 사부를 남겨두고 서안으로 떠났다. 내공을 제대로 못 써도 웬만한 맹수는 대처할 수 있기에 무곡산장만 아니면 걱정할 일도 없었다.
'완청을 믿자. 사부님 거처를 누설하는 일은 없을 거야.'
"독고잔월."
"네, 의모."
"그냥 불러봤어. 이름이 너무 멋있어서."
"의모, 제 이름도 좀 불러주세요."
"담두천."
두천이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역시 독고잔월보단 못해."
한동안 전력에 가깝게 달린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여기서 전력은 한자강 기준이었다. 넷은 달리며 대화하는데 한자강만 입을 헤 벌리고 숨을 들이키고 내쉬느라 한마디도 못 했다.
"종남에는 옥현공이라는 대단한 외공이 있다. 그걸 익히면 자강도 이립 전에 고수 소리 들을 거야. 외공만 따지면 대사형보다도 나은 것 같으니까."
숨을 헐떡이던 한자강이 상관소혜의 말에 벌떡 일어나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뭐 없어요?"
"천양기공이 있지."
"나 그거 구결 아는데. 무극존자가 비급 줘서 다 외웠어."
"소사부!"
담두천이 무릎을 꿇고 넙죽 절을 올렸다.
天賜 하늘이 내린
良機 최고의 기회
- 작가의말
빈집털이 갑니다. GG 안 받고 섬멸전 가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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