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급·보관소
"제갈속. 지금까지 무공 모르는 척 속인 거야?"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빠르게 이동해야 할 때마다 경공이 가장 뛰어나다는 이유로 제갈속을 업고 달렸던 편담 기분이 가장 더러웠다.
"꼬리 여럿 달린 하오문 문주 신임을 얻으려면 어쩔 수 없지."
"아니. 그렇게 강한 무공이 있으면서 왜."
면도의 말에 제갈속이 피식 웃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힘이 강하다고 원하는 걸 다 이룰 수 없다고. 귀곡은 힘이 약해서 멸문했어? 현무관이나 칠성문도 그렇고."
팽영옥 제자들은 무곡산장의 힘에 밀렸기에 언급하지 않았다.
"힘을 숨겨서라도 꼭 이루려는 게 뭐야?"
"팔진도해. 세상의 운명이 달렸다고 할까. 내가 팔진도해 못 찾으면 큰일 나."
제갈속이 평소에도 허풍이 심한 성격이기에 다들 믿지 않았다.
"편담. 넌 현무창법 비급을 원할 거고. 면도는 귀곡의 무영비도 비급이 필요하겠지? 포자 너는 팽영옥의 절기인 고산종일 테고. 포주는 칠성검법하고 북두심법이겠지?"
"언제 우리 조사를 다 했지?"
"내가 한 게 아니라 너희 그 여우 문주가 한 거야. 난 그저 몰래 훔쳐봤을 뿐이지."
"밖에 죽은 자들. 문주 편이다."
제갈속의 말에 넷 모두 깜짝 놀랐다.
"너희는 문주가 양물 자른 환관인 것도 모르지? 가짜 수염 붙이고 다니는 것도."
"우린 장로 밑이다."
"장로도 문주 편이야. 일부러 문주와 적대하면서 문제가 될만한 놈들을 끌어모으는 거지. 저들은 자신이 장로에게 충성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질적으론 문주에게 충성하는 거야."
"그런데 왜 황실에 적대하는 계획을 세웠지?"
"완안덕명이랑 계파가 다르니까. 양물 자른 놈들도 편 가르고 서로 싸우더라고. 그리고 무극환허인을 문주가 얻었다고 생각해 봐. 하오문 버리고 바로 황궁에 가서 황제 총애를 받으며 대신과 장군을 손가락 하나로 부릴 수 있어. 개국공신 대우를 받을 수 있지. 같은 편이라도 뒤통수 때리고 싶지 않을까?"
넷 모두 상상 밖의 일이어서 말문이 막혔다.
"멍청한 놈들. 하오문 따위가 어떻게 무곡산장에 첩자 들이고 황실에서 파견한 무리에 사람 셋이나 심었겠어? 문주가 황궁 출신이니까 그런 거지. 황궁에도 사람 넣는 하오문이 다른 문파나 세가에 사람 하나 못 넣을 때 눈치챘어야지."
하오문 대화를 엿들으면서 그러려니 했던 잔월도 부끄러움을 느꼈다. 독심호리까지 갈 일도 없이 천희연 정도만 돼도 이상한 부분을 눈치챘을 것이다.
"저들 목표는 딱 둘이야. 무극환허인을 얻거나 완안덕명도 못 얻게 방해하는 거. 그래서 내가 진법 돌면서 저들을 제거한 거야. 저것들이 살아 돌아가서 장로한테 쫑알쫑알하면 한 글자도 안 틀리고 문주 귓구멍에 박힐 테니까."
"무극환허인 얻어야 원 황실이 살아나는 거 아닌가?"
"권력을 두고 싸우다 보면 가끔 왜 싸우는지도 잊을 때가 많아. 권력에 삼켜진 인간은 멍청해지지. 너희보다 훨씬 말이야."
"우릴 살려줄 거지?"
면도가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무영비도의 비급이 거의 코앞으로 왔는데 죽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했다.
"나 나쁜 사람 아니야. 세상을 위해 힘쓰는 사람이라고."
"널 믿어도 될까?"
"믿어도 될까가 아니라 믿어야 돼. 내가 왼손만 써도 너희 넷 다 죽이는 데 열 초식 안 쓴다."
"새끼. 너 왼손잡이잖아."
그때 아지랑이처럼 아물거리며 사람 모습이 허공에 천천히 빚어졌다. 제갈속을 압습하려고 준비하던 포자가 밀대를 잡은 손에서 힘을 뺐다. 새로 나타난 자도 제갈속 못지않은 고수로 보였다.
"서로 돕고 살면 세상이 아름다워지지. 제갈속, 찾아야 할 비급 정리해 줘."
"고산종, 무영비도, 현무창법, 칠성검법, 북두심법, 팔진도해. 넌 독초백과(毒艸百科)하고 독물백선(毒物百選) 맞지?"
신기한 방법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다듬은 수염이나 흑룡이 암문으로 수 놓인 비단 장포만 봐도 평범한 출신은 아닌 것 같았다.
"누구시오?"
"팽영옥 관문 제자시군. 난 당한백이라고 하오. 우리 가문은 조용히 숨어서 살기에 강호에 아는 자가 극히 드물 것이오."
"설마, 흑룡곡의 당문?"
당한백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자. 사람이 다 모였으니 문을 열겠다."
제갈속이 품에서 돌인지 나무인지 애매한 구슬들을 꺼냈다. 묵직하니 돌 같은데 나무처럼 굴곡진 무늬가 촘촘했다.
"네 분. 부디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내 손은 누구보다 빠르오. 나쁜 마음을 품지 않더라도 과한 움직임은 오해를 사서 저승행 도장을 찍을 수 있다오."
당한백의 경고에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딱히 내공을 움직이는 기척은 없는데 넷 모두 무형의 거미줄에 묶인 것처럼 함부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제갈속은 등을 무방비로 내놓고 작은 구슬을 여기에 놨다 저기로 옮겼다 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딱히 무거워 보이지도 않는데 겨드랑이가 흥건하게 젖었다.
"우릴 살려준다고 약속하시오."
편담의 말에 당한백이 코웃음 쳤다.
"어차피 죽이려면 벌써 죽였지. 죽일 힘이 없거나 쓸모가 있어서 살려둔 줄 아시오?"
"쓸모가 없다면 왜 깔끔하게 죽이지 않는 거요?"
이번엔 면도가 따지고 들었다.
"귀곡은 쓸모없으면 그냥 죽이는가 보지? 힘을 가진 자가 원칙 없이 살면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법이오. 가진 자일수록 그 힘에 무너지지 않게 조심해야 하오. 귀곡이 당한 것도 가진 힘을 믿고 원칙을 잃었기 때문 아니오?"
당한백의 말에 면도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귀곡을 무너뜨린 자들도 나쁜 놈들이지만, 귀곡 역시 착하게 살진 않았다.
"우리 칠성문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소."
"칠성문은 귀곡과 반대요. 칠성검법이나 북두심법을 갖춘 문파가 그렇게 약하면 어쩌자는 거요? 자식이나 데릴사위한테만 심법을 가르치니 그 꼴이지. 그리고 왕중양의 북두검법과 연관 있다고 자랑은 왜 하고 다니오? 죽으려고 안달 난 거로밖에 안 보이오."
'강호는 단순한 듯 복잡하구나.'
잔월은 문파나 가문을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힘이 아무리 세도 원하는 대로 이루기엔 세상이 너무 복잡했다.
"제길. 내공을 너무 오래 봉인했다. 이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제갈속이 허리를 세우고 기지개를 켰다. 겨드랑이는 물론 옆구리까지 흥건했다.
"이번엔 네 차례다."
당한백이 작은 금속 망치를 꺼내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꼼꼼하게 두드리고 나서 오른손 검지로 왼손 손바닥에 글씨를 쓰며 중얼거렸다.
"그냥 여는 건 힘들다. 기관을 파괴해야겠어."
"흔적을 최대한 안 남기는 게 좋은데."
"귀찮은 게 아니라 진짜 내 능력 밖이야. 내공이 세 배는 되어야 안 들키고 열 수 있어."
제갈속은 당한백 눈을 빤히 쳐다봤다. 당한백 역시 당당하게 제갈속과 눈을 마주쳤다.
"진짜구나. 네가 내공이 부족하다니. 천하에 이 기관을 멀쩡하게 열 사람이 없다는 말이잖아."
"모르지. 세상은 넓고 이상한 놈은 많으니까. 무극존자라면 이거 힘으로 열지도 몰라."
당한백은 망치 대신 길이가 일 척이나 되는 송곳을 꺼냈다. 뾰족한 송곳 끝에 미세한 열기가 피어오르더니 어느새 맑은 기운이 영롱하게 맺혔다.
"이기성강."
포주가 깜짝 놀라 외쳤다. 모든 무기 중 날에 내공을 쌓아 강기를 맺기 가장 쉬운 무기가 창과 검이다. 흔히 만병지왕을 평할 때 창이냐 검이냐 자주 싸우는 이유다.
송곳은 창날과 닮았기에 이기성강 중에서도 쉬운 편이다. 그러나 이기성강 자체가 엄청난 일이어서 송곳으로 펼쳤다고 폄하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던 당한백이 바닥을 향해 연속 송곳을 찔렀다. 당한백이 송곳을 거두자 면도가 귀신에게 홀린 듯 다가가서 송곳으로 찌른 곳들을 만졌다.
살짝 뜨거운 구멍은 무른 진흙에 꽂은 것처럼 시원하게 뚫렸고, 주변에 깨지거나 금이 간 흔적이 전혀 없었다. 꽂은 그대로 뽑았다는 뜻인데, 내공 다루는 솜씨뿐 아니라 송곳 다루는 재주도 등봉조극에 이른 게 틀림없었다.
당한백이 흡기공으로 두꺼운 석판을 치웠다. 석판 밑에 있는 철판에 난 구멍을 본 하오문 무인들은 경외에 찬 눈빛으로 당한백을 바라봤다.
"안에 사람은 없다."
철판에 귀를 대고 한참 기척을 듣던 제갈속이 말했다.
"포자. 흡기공 되지?"
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하나씩 맡아."
석판 밑에 철판으로 된 문은 두짝문이었다. 그것도 하나만 들어 올리려면 반대편에 걸려서 둘 동시에 들어올려야 했다.
호흡이 맞지 않아 몇 번이나 실패하고 나서야 포자와 당한백이 철판으로 된 문을 열었다.
오랜 기간 여는 사람이 없었는지 경첩이 끽하고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경첩 때문에 철문은 일정 각도 이상으로 들어 올릴 수 없었다. 포자는 물론 당한백까지도 철문 무게에 진땀을 흘렸다.
"내가 신호 주면 들어와. 진법이나 기관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제갈속이 안으로 들어가고 당한백과 포자는 철문을 내려놓았다. 호흡이 쉬이 가라앉지 않아 헐떡이는데 제갈속이 신호를 보냈다.
"밑은 안전하다고 하오. 나랑 팽영옥 고제자가 철문을 열면 세 분 내려가시오. 우리 둘은 마지막에 내려가겠소."
셋을 내려보낸 다음 당한백과 포자는 밑으로 내려갈 방법을 상의했다.
"당 대협. 내가 남겠소. 문을 열어줄 테니 당신이 내려가시오."
"나가는 길은 따로 있소. 내가 격공섭물로 둘을 동시에 들어 올리겠소. 들어 올릴 때 들어가시오. 명심하시오. 들어 올릴 때 당신이 들어가고 다 들어 올리면 난 힘을 거두고 안으로 들어갈 거요. 들어 올릴 때 못 들어가면 당신은 여기 갇히는 거요. 내게도 쉬운 일이 아니니 당신이 성공했는지 살필 겨를도 없소. 그러니 꼭 문이 열릴 때 밑으로 뛰어내리시오."
충분한 휴식으로 호흡을 안정하고 내공도 가다듬은 당한백이 격공으로 흡기공을 펼쳤다. 문이 경첩이 허락하는 높이까지 올라간 다음 당한백은 힘을 거두고 경공을 펼쳤다.
그때 엄청 강한 힘이 당한백 가슴을 때렸다. 당한백은 고민할 겨를도 없이 백화만개(百花滿開)의 수법으로 전신 혈도를 개방했다. 혈도를 개방해 몸에 들어온 상대 내공을 자신의 내공과 함께 허공에 풀어버렸다.
그러나 창졸간에 어설프게 펼친 바람에 입으로 피를 연신 게웠다.
"강호엔 안 알려졌지만, 당문 암기는 천하일절이고 독은 오독교에 비견한다고 들었다. 일부러 크게 다친 척 날 유인하려는 거면 헛수고다."
"쥐새끼가 대가리는 잘 굴리는구나."
당한백이 몸을 일으켜 바닥에 앉았다.
"그래도 무곡신공으로 펼친 고산종 절기가 만만한 건 아니지. 괜찮은 척 허세 부리느라 힘 빼지도 말아라."
"제길. 그냥 쥐새끼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쥐새끼였네."
당한백이 다시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秘笈 비급을 숨긴
保管所 보관소
- 작가의말
“제길. 내공을 너무 오래 봉인했다. 이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제갈속이 허리를 세우고 기지개를 켰다. 겨드랑이는 물론 옆구리까지 흥건했다.
“제갈속. 그런데 사타구니는 왜 젖은 거야?”
“쌌어.”
“왜?”
“진법 해체하면서 글쇠 글을 읽었거든. 당문 관련한 글을 읽다가 쌌어.”
“멍청한 놈. 글쇠 글을 읽으면서 팬티 여섯 장 정도는 미리 준비했어야지.”
“성인 기저귀 찼거든. 그거면 될 줄 알았지. 내 오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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