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돌기
무림대회가 며칠 남았지만, 용문파 일행은 고개를 숙인 채 안경을 떠났다. 완안덕명은 고통이 심한지 창피가 심한지 말 대신 마차를 탔다.
"검선 사숙 그리고 독심호리 사형께 인사 올립니다."
용호파 육대 전수자를 자처하던 용호도인은 사실 팔대 전수자였다. 나이가 한 살 어려서 같은 배분인 독심호리를 사형으로 불렀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완안덕명은 왜 살려둔 겁니까?"
용호도인의 질문에 독심호리가 대답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소. 나를 비롯해 여기 구 사매나 막내 사제는 종남파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졌소. 그러나 사부께선 죽은 거로 되어 명부에 이름이 남아있소. 잔월은 대사형 자식이지만, 우리 종남파와 아무 관련이 없소. 종남파 장문인인 완안덕명을 잔월이 죽인다면 어떻게든 말이 나올 것이오. 사부께서 손을 쓰는 것도 보기에 안 좋소."
잔월이 복수 명목으로 완안덕명을 이겼다. 그러나 수천 명이 보는 곳에서 잔월이 종남파와 전진용문파, 나아가선 전진교 장문인 완안덕명을 죽이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다. 잔월뿐 아니라 검선 일행도 욕먹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고 잔월이 쓰러뜨린 완안덕명을 검선이 죽이는 것도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자칫 검선이 외부인의 손을 빌려 장문인을 해치운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며칠 전 의혈맹 맹주 목을 잘랐소. 강호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혈맹 맹주는 완안덕명의 외동아들이오. 어려서부터 방탕하게 지냈는데 무슨 문제인지 자식은 없었소."
"그럼 이젠 대가 완전히 끊기는 것이군요."
"완안덕명 성격에 외동아들 죽은 걸 알면 피를 토하고 기절할지도 모르오."
"그래도 완안덕명이 한 짓을 생각하면 여전히 이가 갈립니다."
"완안덕명 거처를 털었소. 비급과 잘 만든 병장기 그리고 황금과 은을 빼냈고 남은 건 불태웠소. 황금과 은원보가 너무 많아 일부는 연무장에 뿌렸는데, 글쎄 용문파 제자들이 황금과 은에 홀려 태을전에 불을 질러버리고 도망가는 게 아니겠소."
"집도 사라지고 비급도 사라지고 재물도 다 사라졌군요. 아마 곁에 남을 제자가 얼마 없겠습니다."
"그리고 완안덕명 죽이는 건 사부께서 직접 하는 게 맞소. 잔월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쇄심침을 없애겠다고 아직 무공을 회복하진 못했지만, 무공만 회복하면 완안덕명 모가지 자르는 거 일도 아니지 않겠소."
진우량 부탁으로 무림대회에 참석한 용호도인은 검선 지시를 받고 사숙인 척 연기하며 회의 내내 완안덕명이 하는 일을 훼방했다.
독심호리 예상대로 완안덕명은 다급한 마음에 비무대회에 상소룡을 내보냈다. 만약 상소룡이 체면을 생각해 비무에 나서지 않았다면 좀 더 어렵고 복잡한 계획을 진행해야 했다.
용호도인이 완안덕명 마음을 흔들고 은근히 압박한 덕분에 복수가 가장 쉬운 방식으로 끝났다.
"그나저나 그냥 담소를 나누려고 모인 건 아닌 듯합니다."
용호도인의 말에 독심호리가 기꺼운 웃음을 지었다.
"그렇소. 지금 강호를 보면 언제보다 큰 세력이 많이 태동했소. 아미와 소림은 물론 무곡산장도 있고 남궁세가도 있소. 무당이라는 곳도 젊은 제자들 실력이 만만치 않다고 소문났소. 우리도 문호를 따로 세우는 게 맞는 것 같소."
"전진교 장문인 자리는 포기하는 겁니까?"
용호도인의 말에 검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진교는 먹여야 할 입이 너무 많다. 그리고 순수한 무공 문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문인은 그럼 검선께서 맡으실 겁니까?"
"장문인은 무공이 강한 자가 아니라 문파를 잘 관리하는 자가 맡아야 한다."
검선 대답에 용호도인은 독심호리 눈치를 봤다. 검선이 말하는 역할에 어울리는 자는 독심호리뿐이라고 생각되었다.
"저기 종리형이 장문을 맡을 거요."
독심호리의 말에 용호도인은 깜짝 놀랐다. 종리형도 장문인 자리가 달갑지 않은지 고개를 젖혀 천장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내공 문제를 해결하여 종리형은 무공이 강하오. 그리고 이해득실만 따지는 나와 달리 협의를 중요시하오. 문파의 중심을 잡기엔 종리형만 한 인물도 없소."
종리형은 꾀쟁이로 불릴 정도로 영민했고 상관소혜가 저지른 잘못을 뒤집어쓸 정도로 의리가 있었다. 계산적으로 사형제들과 잘 지내는 독심호리와 달리 종리형은 진심으로 사문의 모두를 좋아했다.
"종리형이 장문을 맡고 사부님과 저기 두 분이 태상 장로를 맡을 것이오. 나는 내총관을 맡고 용호 사제가 외총관을 맡아 대소사를 처리하면 되오."
"외총관이요? 제가 세상 물정에 많이 어두운 편입니다."
용호도인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시키는 일은 필요 이상으로 잘하지만, 뭘 책임지고 알아서 하기엔 부족함이 많았다.
"외총관은 문파의 대외적인 사무를 처리하면 되오. 무력이 필요한 직책이지만, 되도록 안 싸우고 해결하는 걸 원칙으로 해야 하오. 무공이나 언변이나 여러모로 따지면 용호 사제가 최고 인선이오."
해야 할 일이 명확하자 용호도인도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여기 일곱 분과 용호 사제, 그리고 우리 사형제 여섯까지 총 열넷이 문파를 지탱해야 하오. 잔월과 자강 그리고 두천은 사부 허락을 받아야 하니 당분간은 제자가 없는 셈이오."
"독고 소협을 대제자로 삼고 재력이 허락하는 만큼 어린 제자를 받으면 문파를 부흥하는 데 얼마 안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둥지는 어디에 틀려는 겁니까?"
"내가 전진교 대총관을 하며 서안에 많은 친구를 사귀어 두었소. 그렇다고 종남에 자리를 잡긴 어려울 것 같고, 화산에 문패를 달까 하오."
용호도인은 탁자 한쪽에 수북이 쌓인 초대장을 바라봤다. 잔월이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완안덕명을 물리친 이튿날인데 벌써 초대장이 오십 개 넘었다.
'검선에 어마어마한 실력을 보인 독고잔월까지 있으니 다들 친분 쌓으려고 혈안이 되었구나.'
'무극존자, 명교 광명우사, 검선, 아미 백원선사.'
실제로 대단한 고수가 더 있겠지만, 천하에 이름을 떨친 사람은 이 정도였다.
'독고 대사형이 살아있으면 저들과 이름을 나란히 했을 텐데.'
독고경천의 가르침으로 무공이 일취월장한 용호도인이었다. 최근 또 벽에 막히니 독고경천이 무척 그리웠다.
"용호 사제만 동의하면 되오. 우리끼리는 미리 다 얘기가 되었소."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남궁가와 가까운 황산에서 나는 모첨차는 처음엔 쓰지만 계속 마시면 달게 느껴진다. 최상급 모첨차의 향을 즐기며 일행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남궁가 무인이 들어왔다. 아무리 일행이 손님이어도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오는 건 실례다. 그러나 남궁가 무인은 예의를 따질 정신이 없었다.
"명교입니다. 명교 무인 삼천 명이 왔습니다."
"싸우러 온 건가?"
검선이 질문했다.
"광명우사와 세 호법이 함께 왔습니다."
싸울 생각이 아니라면 유복통만 오면 된다. 싸움밖에 모르는 광명우사와 남은 두 호법까지 왔다는 건, 싸우겠다는 말이다.
"누굴 목표로 하는 건가? 남궁가는 명교랑 같은 편으로 아는데."
"장사성과 진우량을 돕는 자들을 처단한다고 하는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힘듭니다."
"남궁가주의 전언이 있는가?"
"네. 손님을 받을 상황이 아니어서 미안하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고맙네."
남궁영언은 검선 일행의 힘을 빌리기보단 이번 시비에 휘말리지 않도록 떠나보내는 결정을 내렸다. 괜히 손을 빌려 빚을 지는 것보단 작은 호의를 베푸는 게 훨씬 나았다.
검선이 아직 쇄심침을 제거하지 않았고 일행 중에 싸울 수 없는 자가 태반이다.
싸움을 피하기로 하고 급히 짐을 수습했다. 비급과 황금과 은원보를 들쳐메고 모였는데 잔월이 없었다.
"두천, 잔월은?"
"아까 편지 받고 나갔습니다. 흑표 관련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두천은 흑표가 어떤 존재인지 간략히 설명했다.
"먼저 떠나자. 남궁가에 전언을 부탁하면 된다. 어릴 때 살던 곳으로 오라고 하면 알아서 화산에 올 것이다."
남궁가 총관에게 전언을 부탁하고 일행은 바로 떠났다.
한편.
잔월은 아미파가 머무는 객잔에서 쌍둥이에게 시달렸다.
"사부."
"사부 아냐."
"사부. 무공 가르쳐줘."
"무슨 무공?"
"가만히 서서 피 토하게 하는 무공."
다행히 천희연이 차를 들고 들어와서 잔월을 위기에서 건졌다.
"독고 소협을 사부로 모시면 통배권 잊어버려야 해. 너희 통배권 안 배울 거야?"
아미에서 누구나 익히지만, 정작 통배권으로 고수가 된 사람은 적었다. 익히는 자의 자질에 따라 성취가 달라지는 특별한 무공이었다. 경맥이 다섯씩이나 뚫린 쌍둥이는 백원선사 뒤를 이을 아미파의 보물이었다.
"저기, 흑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최근 태공께서 보낸 편지에 치료가 끝났다고 했습니다. 어디에 머무를지 알려주시면 흑표를 보내드릴 수도 있고, 여건이 되신다면 저희와 함께 아미로 가셔도 됩니다."
아무리 영물이라고 해도 잔월이 어디 있으니 알아서 찾아가라고 할 순 없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훨씬 고맙습니다. 소협께선 목숨 둘이나 구하셨잖아요."
이마를 맞대고 즐겁게 수군대는 쌍둥이를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치료가 끝나 흑표 수명이 오십에서 육십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영단이 생기면 더 살 수도 있다고 하는데, 영단을 어떻게 만드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때 아미파 제자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짐 싸라. 명교가 삼천 무사를 거느리고 안경으로 오고 있다. 어서 떠나야 한다."
"소협, 얼른 일행한테 가보세요. 아마 우리처럼 떠나려고 할 겁니다."
"그럼 이만 작별하겠습니다. 조만간 흑표 데리러 아미를 방문하겠습니다."
"사부, 우리도 데려가요."
잔월과 헤어지기 싫다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쌍둥이를 떼어놓고 경공을 펼쳤다. 그러나 남궁가에 도착하니 일행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어디로 간다는 말씀 없었나요?"
"접객당주한테 물어보세요."
잔월은 접객당주를 어렵게 찾아냈다.
"저한테는 언질이 없었습니다. 잠깐 기다려주시면 알아보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총관에게서 전언을 얻어들었다.
'화산에 간다고? 원래는 검선께서 무공을 회복하고 완안덕명을 죽인 후 화산에 가서 문파 세우기로 했는데.'
짐이랄 것도 없어 바로 몸만 가면 되었다. 잔월은 어쩌면 바로 따라잡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경공을 펼쳤다.
그러나 안경을 벗어나자마자 방해를 받았다.
"야, 잘생긴 놈."
잔월은 앞을 가로막는 사내 때문에 급히 신형을 멈췄다.
"너 소림사 편이었지?"
"네?"
"소림사 무림대회에서 소림사 편에 있었잖아."
"아닙니다."
"아니긴. 그날 분명히 널 봤는데."
광명우사나 장성천은 유복통이 다른 꿍꿍이가 있음을 염두에 뒀지만, 한대붕은 장사성과 진우량 편을 드는 무인을 해치운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래서 소림사 편에 섰던 잔월을 발견하고 멈춰 세웠다.
"그때 소림사 수뇌부랑 가까운 곳에 있었잖아."
風雲 풍운이
突起 갑자기 일어나다
- 작가의말
용호도인은 사실 완안덕명 사질이었습니다. 사숙인 척 엿 먹일 때 얼마나 속이 시원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번 글에선 화!산!파!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무당이 소문파 취급당하는 것도 꽤 재밌지 않습니까.명교 호법 한대붕과 만났습니다. 완안덕명 이겼다고 잔월 강한 거 아닙니다. 그리고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라고 어른들이 누누이 말씀하셨죠. 큰마음 먹고 누설합니다. 다음 화에 둘이 싸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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