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심여해
비록 잔월이 쉬지 않고 뛰었지만, 왕복에 총 닷새가 걸렸다. 노의원 편작이 살던 집에 도착하니 마침 무극존자가 있었다.
"가슴은 어찌 된 거냐?"
상처는 거의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아물었지만, 검에 베인 옷은 그대로였다.
"불이검이라는 이상한 놈에게 공격받았습니다. 반격하려 했는데 이상하게 손이 안 나가더군요."
무극존자가 잔월을 위아래로 훑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헤어져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별 전에 조언 하나 건네마."
그간 정이 들어 이별이 꽤 아쉬웠다.
"너는 내 말을 잘 의심하지 않았다. 조금 의심하더라도 내 지시에 곧잘 따랐고."
잔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선이 앞장서서 뭔가 하면 다들 잘 따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심령제압이다. 쥐가 고양이 앞에서 도망도 못 치는 것처럼, 네 마음이 내게 눌려서 그런 거다. 나도 의식하고 그런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더구나."
"저를 조종하고 그랬다는 말인가요?"
"아니다. 그 불이검이란 놈에게 반격하려 했는데 손이 안 나갔다고 했지? 그것도 심령제압이다. 불이검의 기세에 위축해 공격하지 못한 거다."
정확히는 불이검이 싸우기 싫어하는 느낌을 잔월이 감지하고 그 뜻에 따른 것이었다. 기세에서 우위를 차지한 불이검의 마음이 잔월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
진선도 분위기를 만들고 주도하는 데 능하다. 진선이 하려는 일은 반대가 적었다. 타인을 자기 의사대로 움직이는 능력을 극대화한 게 심령제압이라고 잔월은 받아들였다.
"안 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목적이 확실하거나 세상 두려운 게 없을 정도로 강해져라."
"조언 감사합니다. 제 사부와 의부모 행방을 가르쳐 주십시오."
무극존자는 잔월 표정을 보고 뭔가 단서를 찾았음을 알아챘다.
"좋은 결과가 있은 모양이구나. 예전에 함께 살았던 곳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달라더라. 어딘지는 모른다."
편작은 나이가 칠순이다. 나이를 먹은 편작은 약초 캐는 게 귀찮아서 모옥 주변에 밭을 일궈 직접 키웠다. 약초는 땅의 기운을 잘 빨아먹기에 자주 거름을 주고 물을 줘야 했다.
그런데 그 약초밭이 완전히 헤집어졌다. 낮 내내 풍기던 약초 달이는 냄새나 생즙 짜면서 나는 알싸한 냄새도 옅어졌고 집 주변에서만 생활하는 편작의 모습도 안 보였다.
"편작 어르신은 어디 가셨나요? 작별 인사를 올려야 할 텐데."
"네가 가고 이튿날에 떠났다."
"철부지 치료가 아직 안 끝났잖아요."
"철부지라. 너 참 통찰력이 대단하구나."
그러고 보니 임완아도 보이지 않았다.
"네가 떠난 날 글자로 된 무극환허인 상편을 주고 외우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쌀이랑 고기 사러 자리를 비운 사이 조카가 종적을 감췄다."
"무곡산장에 이곳을 들킨 건가요?"
"들키긴 했지만, 철부지가 제 발로 떠났다."
'뭐지?'
불이검 때문에 받은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다. 다짜고짜 공격한 것도 그렇고, 한 번에 죽이지 못하면 다신 안 공격한다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심장에서 나오는 뜨거운 피를 마셔 무공을 완성한다는 것도 잔월에겐 큰 충격이었다. 책에는 물론 그 어떤 어른도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 없었다.
색다른 강호에 놀란 가슴이 채 진정하지도 않았는데 돌아오니 마찬가지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조카는 임완아보단 공손완아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말이 돼요?"
"십수 년을 함께 살았는데 정이 전혀 없을 리 없지. 십수 년 곱게 자랐는데 나랑 함께 무공 수련하고 기억에도 없는 가족 복수를 한답시고 사람 죽이며 다니는 것도 싫었겠지. 허영심이 큰 아이여서 다시 딸로 받아준다는 유혹에 쉽게 넘어갔을 거다."
무곡산장엔 노복이 수천 명 있었다. 시중드는 하녀도 무척 많았다. 하녀와 노복 모두 공손완아를 공주처럼 떠받들었다.
"뭐, 복수하려고 일부러 다시 무곡산장에 들어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차라리 내게서 무극환허인을 배워 고수가 되는 게 복수하기에 훨씬 나을 것이다. 그 알량한 머리와 무공으론 무곡산장에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
"구결만 알아내고 버릴 수 있잖아요. 그 정도 생각할 머리조차 없진 않을 텐데요."
"비급 마지막 몇 장을 찢어내 외운 후 불에 태웠다. 둔한 아이는 아니더라."
"그냥 지켜보신 겁니까?"
"뱀이 굴에 숨으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뱀을 놀래줘 굴에서 나오게 하는 거고, 다른 하나는 기척을 숨겨 내가 사라진 거로 오해하게 하여 뱀이 자발적으로 나오게 하는 거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무극존자의 동문서답에 잔월이 속으로 한탄했다. 솔직히 무곡산장과 엮이고 나서 정상적인 일이 얼마 없었다. 그러나 근래처럼 충격이 큰 적도 없었다.
'잠깐. 이게 심령제압이구나. 무극존자의 심령제압은 자연스러운 거여서 딱히 내게 악영향이 없었지만, 불이검이라는 미친놈은 아직도 나를 괴롭히고 있구나.'
잔월을 불현듯 깨달았다. 편작이 사라진 일이나 임완아가 다시 공손완아가 된 일은 잔월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잔월은 일희일비하며 무척 크게 반응했다.
"조언 고맙습니다."
뜬금없는 잔월의 감사에 무극존자는 애석한 웃음을 지었다. 복수고 뭐고 다 미루고 몇 년만 가르치고 싶었다.
심령제압은 걸기도 어렵지만, 벗어나기는 건 더욱더 힘들다.
"너도 경위가 대강 짐작 가지?"
"또 가짜 비급을 넘긴 겁니까? 자의는 아니지만, 공손완아 복수 참 열심히 하는군요."
"그간 사람 시켜서 가짜 비급을 만들면서도 내가 꾸민 계책이 실패하길 바랐다. 내가 조카에 관한 판단이 틀렸기를 바랐다. 복수로는 최고의 상태가 되었는데 그저 슬프기만 하구나."
무극존자가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공손완아가 다른 마음을 품은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공손완아는 널 좋아한다."
잔월은 속이 울렁였다. 공손완아가 싫은 마음은 아주 어릴 때부터 차곡차곡 쌓였기에 미움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엔 흑표를 핑계로 널 납치했을 것이다. 그리고 넌 모르지만, 봉황산장에서 애들 사이에 공손완아가 널 좋아하는 게 아니냐는 견해가 퍼지기도 했다. 비급을 훔친 후에도 널 독살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때 나는 왜 비급을 갖고 도망치지 않나 했는데, 원래 계획이 너를 죽여서 덤터기 씌우는 거라 계속 망설였던 것 같다."
무극존자의 말은 잔월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그런데 내가 무극환허인을 언급하면서 너랑 혼인을 맺으라고 할 때 공손완아는 강하게 반항했다. 비수로 자기 머리를 자를 정도로 격렬하게 나왔다."
"갑자기 제가 싫어진 건 아닐까요?"
"네 칼을 막아 널 보호할 때까진 좋아하는 마음이 컸을 거다. 그런데 정작 나랑 함께 무곡산장을 적대해야 하는 현실이 되니 어린 나이에 당황한 거겠지. 널 싫어한 게 아니라 무곡산장에 칼을 겨눠야 하는 게 싫어서 반발한 거다."
공손완아가 잔월을 시종일관 쌀쌀맞게 대한 건 그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잔월과 혼인하면 함께 무극환허인을 익힌 다음 무곡산장 사람을 죽여야 한다. 공손완아는 그게 무척 싫었다.
"공손완아 자신도 자기 마음을 제대로 몰랐을 거다. 난 공손완아가 머리까지 자르며 널 거부하는 걸 보고 눈치챘다. 그저 싫다고만 해도 되는데 너무 과하게 반응했지. 그래서 장계취계(將計就計 - 상황에 따라 계책을 세우다)해서 일부러 틈을 보였다."
"사실 네 외숙공의 형제 정보는 그 전에 알아냈다. 그러나 완벽한 틈을 만들려고 계속 기다렸지. 아니나 다를까. 무곡산장이 공손완아에게 연락했다. 공손완아는 상대가 화살로 쏜 천을 들고 나를 찾아오는 대신 화살을 버리고 천은 훼손했다."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구나.'
"천을 훼손해 무곡산장을 안심시킨 후 내게 사정을 얘기했어도 됐는데, 내가 무극환허인을 줄 때도 전혀 언급이 없었다."
"이번 비급을 익히면 더 빨리 죽습니까?"
"아니. 오히려 좀 더 느리게 죽도록 조절했다. 완벽한 복수를 위해선 인내가 필요한 법."
무극존자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자기 복수 계획이 잘 진행되는지 계산하는 듯했다.
"너 멸세교라고 들어봤느냐?"
"네. 불이검이라는 놈이 멸세교 소속이었습니다."
"네게 상처를 남길 정도면 멸세교에서도 꽤 고수겠구나."
"멸세교의 미친놈들은 자기들을 이끌 절대 고수를 찾는다. 자질이 훌륭한 아이가 보이면 납치하거나 잘 구슬려 데려가 무공을 익히게 한다. 제자나 다름없지만, 자신보다 더 강해지면 윗사람으로 모신다."
잔월은 불이검이 새끼 거지를 끌고 가던 일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새끼 거지의 자질이 탐났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절대 고수를 천마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나타난 적 없지만, 언젠가는 꼭 나타나리라 믿지. 천마로 인정받으려면 몇 개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중 하나가 뜨거운 용암을 헤치며 걷는 것이다."
책에서 용암은 강철도 녹이는 뜨거운 불로 이뤄진 물이라고 했다.
"어찌 보면 네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대머리가 내 봉황내의를 흘리던 수법에서 영감을 받았다. 용암의 뜨거운 열기에 해를 입지 않을 방법이 생겼다."
무극존자는 자기 손을 아궁이에 집어넣었다. 손이 멀쩡한 건 전혀 놀랍지 않았는데, 소매도 아무 일 없었다.
환속승에게 영감을 준 게 잔월이니 어쩌면 삼 할 정도의 공이 있었다.
"멸세교로 갈 작정인가요?"
"그래. 멸세교를 장악하면 어마어마한 무력을 손에 넣는다. 천마로 인정받기만 하면 저들은 내가 죽으라면 진짜로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천마가 되려고 노력하는 몇 년 동안 비틀린 무극환허인을 익힌 무곡산장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겠지."
"곧 강호에 무극존자가 멸세교에 잡혔다고 소문나겠네요?"
"하하. 내 수법을 이미 다 간파했구나."
잔월과 무극존자는 서로 바라보며 즐겁게 웃었다.
"너는 같은 나이 때의 나보다 훨씬 강하다. 그리고 갑자기 불쑥불쑥 강해져서 원래부터 숨긴 실력을 꺼내는 게 아닌지 의심할 정도다. 굳이 강함에 집착하지 말고 모자람 없이 무공을 다양하게 익히도록 해라. 나는 천하제일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아무 초식이나 마구 익히면서 그냥 살았다. 덕분에 천하제일 소리도 듣는 거다."
"좋은 말씀 매일같이 되새기겠습니다."
무극존자와 잔월은 입을 다문 채 함께 노을을 바라봤다. 어쩌다 보니 생긴 끈끈한 정이 곧 이별해야 하는 두 사람의 발걸음을 잡아뒀다.
"복수 끝내면 다시 찾으마."
"그날을 애타게 기다리겠습니다."
江湖 강호는
深如海 바다처럼 깊다
- 작가의말
강과 호수는 바다보다 깊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의 강호 버전입니다. 제가 이런 유형의 언어유희를 좋아합니다.
과연, 무극이 멸세교에 가서 관문을 통과하고 천마가 될 것인지. 아니면 실패하여 용암에 타서 한 줌 재가 될 것인지. 궁금하면 계속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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