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마해·마흔
잔월과 당한백은 한사코 들러붙는 사내들을 뿌리쳤다.
"흑 장로. 일단 작은놈부터 찾는 게 좋겠소."
둘은 무극환허인과 무형지독의 행방이 주요 목표다. 공손평천 관련한 부탁은 상황을 봐가며 결정할 일이다.
"저기가 천주봉(天柱峰)인 거 같소."
잔월과 당한백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둘을 제외하고도 얼굴 가린 자가 많아서 딱히 의심스럽진 않았다. 천주봉에 도착하니 몸이 불편한 자들이 가득했다.
제갈속의 말에 따르면 무공을 익히다 실패했으나 용케 목숨 구한 자들이라고 한다. 시험을 보고 밖으로 나갈 능력도 없거니와, 과일 맛에 중독되어 심마해를 떠날 수도 없다.
"조언이 필요한가?"
팔 하나 다리 하나 없는 노인이 당한백과 잔월이 다가오자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까 들러붙던 자들은 그나마 팔다리 성한 놈이다. 천주봉에 있는 자들은 몸이 불편한 자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낯선 무인을 관찰하여 각 세력에 추천하는 거로 생계를 유지한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 익히기에 좋은 무공은 뭐요?"
"질문 수준 하고는. 사람 체질에 따라 다르고 익힌 무공과 수준에 따라 다른 거지."
"그럼 공손평천이 익힌 무공은 뭐요?"
"유명현덕공(幽冥玄德功)."
잔월과 당한백은 유명현덕공이 적힌 바위로 향했다.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오. 도가 만물을 만드나 소유하지 않고 덕이 만물을 키우지만 지배하지 않는다. 현덕은 만물을 키우는 덕 중에서도 최고의 덕을 가리키오. 현덕이 유명에서 나왔다고 여기는 자가 많지. 유명은 지옥이 아니라 깊은 어둠을 말하는 것이오.]
잔월도 무당에서 도덕경을 배우긴 했지만, 도덕경의 수백 글자가 월영도법 삼만 자 구결보다도 더 어려웠다.
[흉험한 무공에 붙을 이름 같지 않소.]
[흉험한 게 아니라 익히기 힘든 무공일 수도 있소.]
둘은 유명현덕공 구결을 쭉 훑으면서도 주변을 살피는 걸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무턱대고 찾아다니는 것보다 멸세교 무공이 적힌 천주봉에서 공손무기를 찾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다. 공손무기를 찾지 못하더라도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어서 소문도 빨리 들을 수 있다.
'반박귀진?'
잔월은 기습에 대비했다. 그러나 접근한 자는 내공이 거의 없다시피 한 절름발이였다.
"혹시 구결 풀이 필요하시오?"
절름발이 어깨에는 주먹 두 개 크기의 붉은 털 고양이가 얌전히 앉아있었다.
"무슨 구결 풀이?"
"내가 유명현덕공 익히려다가 실패해서 병신이 되었소. 오기로 계속 구결을 연구했소. 공손평천도 내 구결 풀이를 듣고 유명현덕공을 익혀냈소."
"원하는 게 뭐요?"
"내 어깨에 있는 혈수라 먹이요. 혈수라는 덩치가 작아서 사냥할 수 없소. 난 나이도 먹었고 다리마저 불편하오."
"아무거나 잘 먹소?"
"마흔이 있는 곳에 가면 꼬리 짧은 쥐가 있소. 세 마리에 구결 하나."
"혹시 우리 외에도 당신과 거래한 사람이 있소?"
"그럼. 여럿이오. 공손평천 아들이라는 자도 있지."
"마흔 위치를 알려주시오."
"초짜들이었군. 마흔은 저기 있소."
잔월과 당한백은 경공을 펼쳐 마흔이 있는 곳으로 갔다. 마흔이 어디 있는지는 굳이 공들여 찾을 필요가 없었다. 사람 수십 명이 마흔 주변에 모여있었다.
잔월과 당한백은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공손무기가 있는지 살폈다. 안타깝게도 수십 명 중에 공손무기가 없었다.
[사람 발자국이 아닌 것 같소.]
마흔(魔痕)은 커다란 발자국이었다. 단단한 바위에 한 뼘 깊이로 새겨진 발자국으로 길이가 잔월 키 절반은 되었다.
"이게 멸세교 창시자가 남긴 흔적이라는 게 사실이오?"
누군가 입을 열어 옆 사람에게 질문했다.
"그래. 우린 이걸 천마보 혹은 군림보라고 부른다."
"이런 흔적을 남긴 자가 천마를 찾아다녔다고? 그럼 천마는 도대체 얼마나 강해야 하는 거요?"
"그래서 우리가 공손평천을 인정하지 않는 거야. 공손평천은 마흔을 남긴 자보다도 약하거든."
"뭐라고? 감히 천마존의 속세 존함을 함부로 부르다니."
"이 무식한 새끼야. 천마의 존함 혹은 천마존의 이름. 존을 두 번 쓰는 건 어디에서 배워먹은 거야?"
"뭐? 무식? 칼 들고 사람 잡는 새끼가 글 배워 뭐 하려고?"
"구결을 풀이할 정도 머리는 있어야 할 거 아냐. 설마 너 무식하게 외공만 익힌 멍청이야?"
챙 소리와 함께 검이 뽑혔다. 무식하다고 욕먹은 사내는 예상과 달리 중병기가 아닌 얄팍한 검을 무기로 사용했다.
"싸울 거면 다른 데 가서 싸워. 마흔에 피 한 방울이라도 튀면 둘 다 기름에 튀긴다."
누군가가 으름장을 놓자 언쟁이 붙은 두 사내는 서로 노려보며 자리를 옮겼다.
[당 대협. 일단 쥐부터 잡읍시다.]
[해가 저물 때까지 공손무기 찾고, 못 찾으면 쥐 세 마리 잡아 절름발이를 찾아가서 공손무기 정보를 캐보려고 하오.]
[많이 잡아야 하는 거 아니오? 열심히 하는 척해야 의심을 덜 받을 거 같은데.]
[마흔도 모르는 신입이라는 걸 알았으니 우리 둘 실력이 궁금할 거요. 많이 잡으면 우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여길 거요. 그렇게 되면 각 무리 수장 귀에 우리 소식이 들어갈 가능성이 크오.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진 최대한 숨기는 게 좋소.]
잔월과 당한백은 흩어지지 않고 함께 다녔다. 공손무기를 발견하면 빠르게 제압해야 한다. 잔월이나 당한백이나 공손무기를 내려다볼 정도 실력이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하려면 힘을 합쳐야 한다.
"진짜 천마 조건에 부합하는 존재가 있을까? 흑 장로는 어찌 생각하오?"
"있을지도 모르오."
잔월은 장삼풍을 떠올렸다. 만약 장삼풍이 세상을 없앨 악한 마음을 먹는다면 천마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달마나 왕중양도 그렇고. 이들이 강함만 추구했다면 훨씬 대단한 무인이 되고 훨씬 강했을지도 모른다.'
[흑 장로. 저자가 혹시 공손무기 아니오?]
잔월이 공손무기를 본 건 왕가장에서 처음이고 공손완아와 임완청의 성이 바뀔 때가 마지막이었다. 호북의 무곡산장에 있을 땐 오히려 공손무기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몇 년 사이에 훌쩍 늙었지만, 잔월은 공손무기 얼굴을 알아봤다. 아쉽게도 공손무기는 혼자가 아니었다.
[곁에 있는 놈들 수준이 어느 정도요?]
잔월은 상대 실력을 가늠하는 재주가 부족하다. 단계별로 천천히 강해진 게 아니어서 상대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탓이다.
[공손무기와 비슷한 수준이오. 기습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소.]
이미 독곡에서 남궁가 무인들을 속이려고 손발을 맞춰본 적이 있는 둘이다. 굳이 연습하지 않고 전음으로 상의해도 실수 없이 해낼 자신이 있었다.
[곁에 자들은 죽이고 공손무기는 다리를 끊은 다음 점혈해서 저기로 가는 게 좋겠소.]
당한백이 가리킨 곳은 짙은 안개가 자욱한 곳이었다. 온천 증기라고 하기엔 너무 짙어 당한백은 유황 증기라고 추측했다.
잔월과 당한백이 갑자기 빠르게 움직이자 공손무기와 함께 움직이는 자들이 고리눈을 부릅뜨고 둘을 쏘아봤다. 그러나 둘이 꼬리 짧은 쥐를 향해 몸을 날리는 걸 보고 긴장을 풀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
당한백의 전음이 귀를 때릴 때 잔월의 두 팔이 이미 뒤로 날개처럼 펼쳐졌다. 집채 크기의 흑표가 나타나 공손무기와 주변 사내들을 공격했다. 동시에 당한백 소매에서 '∞' 모양의 암기들이 뛰쳐나와 나비처럼 펄럭이며 날아갔다.
암기를 던진 당한백은 놀지 않고 바로 경공을 펼쳐 일행을 덮쳤다. 가장 먼저 송곳으로 공손무기의 오금을 깊이 찔렀다. 박아 넣은 송곳을 통해 내부에서 내공을 터뜨려 무릎을 망가뜨렸다.
원래는 다리를 끊기로 했는데 당한백이 마음이 급하여 내공을 제대로 주입하지 못한 탓에 무릎만 망가졌다.
당한백은 한발로 공손무기 등을 꾹 밟고 바닥에 쓰러진 자들 머리로 십자정(十字釘) 하나씩 던졌다. 이마 혹은 뒤통수에 십자정이 박힌 자들은 꿈틀거릴 시간도 없이 즉사했다.
채화봉(採花蜂) 수법으로 공손무기 혈도를 여럿 짚은 당한백은 바로 어깨에 메고 경공을 펼쳐 안개가 자욱한 곳으로 몸을 던졌다. 잔월 역시 경공을 펼쳐 당한백 뒤를 따르며 주변을 살폈다.
"없소."
공손무기 몸을 수색한 당한백이 이마를 찌푸렸다.
"공손평천이 무곡신공 익히면 어떻게 되는 거요?"
"불이검과 비슷한 체질이라면 무시무시할지도 모르오."
불이검은 원기를 건드리는 무공을 익히고도 멀쩡한 괴물이었다. 무극존자를 이겼다는 공손평천이 무곡신공을 익혀 위력을 증폭하면 진짜 천마로 인정받을지도 모른다.
"미혼단을 먹이겠소."
당한백은 하구혈을 눌러 입을 벌린 다음 회색 단약 하나 집어넣었다. 안 삼키려고 버티는 공손무기의 지창혈을 꾹 눌러 강제로 단약을 삼키게 했다.
당한백은 작은 송곳을 꺼내 공손무기 몸을 쿡쿡 찔렀다.
"고통을 받으면 약효가 빨리 퍼지오."
잔월은 단한백의 독한 손속을 보며 반성했다.
'군자는 작은 흠을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협을 지키려면 손속이 과감해야 한다. 옳은 일을 함에 수단이 나쁘다고 주저하는 건 협객이 아니다. 큰 협을 위해서 가끔 올바르지 않은 일도 해야 한다.'
"공손무기. 무형지독은 어떻게 했느냐?"
"몇 년 전에 독편복에게 줬다. 독편복이 절반을 갖고 절반은 부친에게 넘겼다."
"설마, 공손평천이 무극존자를 이긴 게 무형지독 덕분이야?"
"그렇다. 함께 중독되었지만, 미리 해독단을 먹은 부친이 이겼다."
최근에 공손평천이 무극존자를 이긴 건 무형지독을 사용한 덕분이었다.
"무극환허인 상편은?"
"부친이 태웠다. 가짜라고 하면서."
"남은 가족은 어디에 있지?"
공손무기 형제는 다 죽었지만, 그들의 자식은 모두 살아있다.
"커, 컥."
갑자기 공손무기가 빨간 피를 연신 쏟아내더니 눈알을 뒤집고 죽어버렸다.
"삭초제근 하려고 했는데. 가족 아끼는 마음은 나쁜 놈도 다르지 않은가 보오."
당한백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굳이 다 죽일 필요가 있겠소? 이미 힘을 다 잃은 가문인데."
무곡신공을 익힌 무인은 일부 곤륜의 무곡산장에서 죽었고 일부는 잔월의 광풍살 때문에 신공이 깨졌다. 공손용기와 함께 도망친 자들은 당문이 독과 암기로 전부 해치웠다. 시체마저 독으로 녹이거나 불로 태워 단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오독교의 교주와 소교주 그리고 장로까지 다 죽었기에 약물 만드는 방법도 사라졌다.
유일하게 걱정인 건 그림으로 된 무극환허인이었다.
"만약 이들이 언젠가 힘을 얻으면 또 똑같은 짓을 벌일 거요. 이건 사람의 문제가 아니오. 무곡산장이라는 괴물을 죽여야 하오."
당한백이 공손무기 몸에 송곳을 꽂고 독을 주입했다. 공손무기 시체가 빠르게 녹아 머리카락을 비롯한 털만 남았다.
"포위된 것 같소."
당한백이 사방에서 조여오는 기척을 감지했다.
"놈들이 저기 있다."
어떻게 찾았는지 수십 명 무인이 둘을 향해 달려왔다.
尋魔海 마귀 찾는 바다에
魔痕 마귀 흔적이 있다
- 작가의말
심마해가 부릅니다. 마흔 즈음에.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천마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심마해 속엔
천마 흔적 찾을 수 없네.
“남은 가족은 어디에 있지?”
당한백의 질문에 공손무기가 컥컥거리며 피를 토했다.
“캐나다 오타와.”
“너 기러기였어?”
“기레기라니. 말이 심하다. 난 그 정도로 쓰레기 아니다.”
“네가 지금까지 한 짓 생각해 봐.”
“기레기가 지금까지 한 짓 생각해 봐.”
“넌 착한 편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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