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람·중산소
"무슨 수로?"
"화약이요."
공손평천은 황궁 곳곳에 몰래 화약을 숨겼다. 호법 장로가 천주봉을 무너뜨리려던 화약이었다. 황궁 밖에 있는 반대파 무인들이 대전으로 들어오면 화약을 터뜨리려 했다. 무림맹 주력과 멸세교 반대 세력 그리고 주원장까지 해치울 좋은 기회다.
가장 좋은 건, 원 황제가 화약을 터뜨렸다고 모함하여 공손평천 자신은 발을 뺄 수 있다. 자신이 천마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고 충성하는 자들을 이끌어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도 되고 주원장 세력을 삼켜도 된다.
응천부에 있는 대신들은 주원장이 천한 출신이라고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중원인이 조상으로 모시는 헌원의 직계 후손이고 오랜 세월 명문으로 살아온 공손가의 공손평천이 황제가 되겠다고 하면 지지하고 나설 자들이 많다.
"미리 황궁에 들어와서 화약 위치 전부 확인했고, 천마무가 시작한 다음 불붙이려고 대기하던 자들 모두 제압하고 화약에 물을 뿌렸습니다."
"하하, 하하하."
공손평천의 웃음에 대전이 부르르 떨렸다. 멸세교에서 손을 섞은 지 일 년 반 정도 흘렀는데 공손평천의 내공은 감히 깊이를 재기 두려울 정도로 늘었다.
"세상에 나만 머리 달린 건 아니겠지.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라. 힘이 부족해서 머리를 쓴 게 아니다. 귀찮음을 덜려고 머리 썼던 거야. 혼자 힘만으로도 황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난 천마다."
"차륜전 갑시다."
무극존자나 취접 그리고 백원선사는 누구와 힘을 합친 적이 없었다. 장군보는 다섯 사제와 연수합격을 수련한 적 있지만, 넷 중에 셋이 제멋대로 놀면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없다.
차륜전으로 공손평천을 지치게 해야 하고, 적과 아군을 동시에 파악해야 한다.
"나이 먹은 나부터 시작하지."
백원선사가 공손평천을 덮쳤다. 장군보는 뒤로 슬쩍 물러나 주원장을 지켰다.
"폐하, 물러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유백온의 말에 주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위험한 자다. 내가 여기 있어야 저자가 도망치지 못한다."
남궁창룡은 남궁가에서 고르고 고른 영민한 자다. 그러나 정치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소신이 불민하여 의문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남고 저자가 도망가면 난 곧 천하에 소문낼 것이다. 주원장과 공손평천이 대도의 황궁에서 싸웠는데 공손평천이 도망쳤다고. 그럼 저자는 황제가 못 된다. 이후 기회가 닿아 나를 죽인다고 해도 황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공손평천이 자신을 천마라 여기고 세상을 파멸하려 했다면 주원장을 죽이고 원 황제를 죽인 다음 천하를 수많은 세력으로 갈라놓고 서로 싸우게 해야 했다.
그러나 황제가 될 욕심에 주원장 세력을 삼킬 계획을 세웠다. 주원장은 암살이 아닌 대도 황궁에서 원 황제 혜종의 음모로 죽어야 하고 공손평천은 그 음모를 힘으로 이긴 영웅이 되어야 한다.
비록 잔월의 개입으로 계획이 망가졌지만, 다 죽인 다음 화약을 터뜨려도 된다. 그러려면 주원장이 도망가지 말아야 한다. 주원장이 돌아가면 오늘 음모는 실패이기에 공손평천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다.
주원장은 진우량 상대로 직접 전장에 나섰던 것처럼, 공손평천을 상대하는 작은 전장에서도 목숨을 걸었다. 오늘 공손평천을 없애지 못하면 두고두고 화근이 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고수 싸움이라고 해서 특별할 줄 알았는데."
유백온이 보기엔 병사들이 가끔 하는 씨름이나 격투 놀이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둘 다 크게 움직이지 않고 가까운 거리에서 주먹을 주고받았다. 그저 속도가 너무 빨라 무슨 초식인지 구분 가지 않을 뿐이었다.
"반박귀진입니다. 서로 속임수가 먹히지 않기에 적당한 힘과 속도로 상대를 소모하는 겁니다. 먼저 지치는 자가 지는 것이지요."
백원선사는 양팔로 다른 초식을 펼쳤다. 비록 육체적인 힘은 부족하나 깊은 내공으로 구십 년 가까이 수련한 초식을 빠르고 정확하게 풀어냈다.
반면, 공손평천은 오른손을 뒷짐 지고 왼손으로 백원선사를 상대했다. 두 초식으로 상대의 왼팔만 상대하는데도 백원선사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주먹을 공손평천 왼손과 연신 부딪친 백원선사가 비칠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자리를 취접이 잽싸게 들어갔다.
백원선사는 바로 정좌하여 운기 했다.
"저 노인 머리에서 왜 김이 나는 거요?"
유백온은 궁금한 게 많았다.
"내상입니다. 빨리 치료하느라 무리하면 김이 나옵니다."
장군보가 친절하게 대답했다.
한참 지나 백원선사가 검은 핏덩이를 울컥 뱉어냈다.
"내상보다 열 배는 어렵소. 다들 조심하시게."
"다 나으셨습니까?"
장군보가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했다.
"이상한 기운이 남았소. 그래도 무공 펼치는 덴 지장이 없을 거요."
취접과 공손평천의 대결은 백원선사와 벌였던 것보다 훨씬 격렬했다. 백원선사는 통비권의 무수한 초식으로 이득을 보며 충돌을 최소화했다. 그러나 취접은 지금까지 내공으로 이득을 취했기에 하던 방식을 고수했다.
공손평천은 여전히 왼손만 사용했다. 둘의 손바닥이 부딪힐 때마다 얼음과 얼음이 부딪히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백원선사와는 기술과 힘의 충돌이었지만, 취접과는 힘과 힘의 충둘이었다. 둘 다 내공을 전혀 허비하지 않고 손에 꼭꼭 뭉쳐뒀기에 최소한의 충돌음만 대전에 울려 퍼졌다.
"내 차례다."
무극존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와 동시에 취접이 주먹에 가슴을 맞고 뒤로 날았다. 잔월이 경공을 펼쳐 취접을 받았다.
"약, 가슴에. 예전에 네게 줬던 약."
잔월은 예전에 흑표한테 먹였던 것과 같은 단약을 찾아 취접 입에 넣었다. 약은 입에 넣자마자 녹아 사라졌다. 복용하고 숨 몇 번 쉴 겨를이 지나고 취접은 바로 피를 토했다.
"제길, 저 암캐와 접 붙어먹을 새낀 내공이 얼마나 많은 거야?"
소매로 피를 쓱 닦은 취접이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일그러진 얼굴과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이 취접의 분한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무극존자가 천하제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주원장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공손평천은 멸세교의 마공을 익혔습니다. 짧은 기간에 강해지는 무공을 마공이라고 합니다."
"그런 위험한 무공은 없애야 하는 거 아닌가?"
장군보는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듯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저기 옥면금강이 이미 없앴습니다."
"교대!"
무극존자의 외침에는 억울함과 분통함 그리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도 섞였다. 무극존자 상대로도 공손평천은 왼손만 썼다.
장군보가 어깨를 으쓱하며 신형을 날렸다.
"잔월, 여길 부탁해."
무극존자는 뒤로 물러서서 정자세를 취하고 운기 했다. 무혈지체를 이룬 무극존자는 공손평천의 괴이한 내공이 침투해도 어렵지 않게 해소했다.
그러나 다른 자와 싸울 때보다 내공 움직이는 게 어려워 쉽게 지쳤다. 내공이 생각대로 잘 움직여주지 않아서 뒤로 물러나 운기로 내공을 다스리고 감각을 조정했다.
"오행이구나. 들쑥날쑥 제멋대로여서 오히려 상대하기 힘들어."
장군보는 자신이 느낀 바를 다른 사람에게 알렸다.
"이놈도 오래 못 갈 것 같아. 오늘은 죽이는 게 힘드니까 지치게 해서 쫓아내자."
그때 공손평천이 피식 웃었다.
"너는 부드러움이구나. 그럼 공공공으로 상대하면 되겠어."
공손평천은 오행신공을 거두고 물의 공공공만 펼쳤다. 장군보와 마찬가지로 부드럽지만, 내공이 훨씬 많아 세찬 홍수 같았다.
다른 사람과 달리 장군보는 수비에 능하고 기운 다스리는 능력이 출중하다. 장군보가 오래 버텨주면 다른 자들이 충분히 휴식할 것이기에 공손평천은 천하에 위명이 자자한 고수들 상대로 우월감을 느끼는 걸 중단하고 속전속결을 결심했다.
장군보가 뒤로 물러나자 백원선사가 나섰다.
"넌 산과 같구나. 그럼 욕수공으로 상대하지."
금의 욕수공은 묵직하면서도 단단했다. 백원선사의 산처럼 웅장하고 단단한 기운은 더 단단하고 많은 욕수공의 기운에 무너졌다.
"넌 불과 같구나. 그럼 축융공의 맛을 좀 보아라."
취접은 세 합만 겨루고 뒤로 물러났다. 취접의 내공은 불처럼 타오르는 축융공 앞에서 전혀 힘쓰지 못했다.
전칠과 엄복룡이 함께 덤볐다. 전칠은 타구봉법을 펼쳤고 엄복룡은 건곤십팔타를 펼쳤다. 더 강한 엄복룡이 위험한 근접전을 벌이고 상대적으로 약한 전칠이 타구봉으로 보조했다.
"구망공이다."
나무의 구망공은 수비적인 성향이 강했다. 덕분에 두 거지는 때리다 지친다는 말이 뭔지 확실히 체험했다.
구망공으로부터 오는 작은 반탄력이 점점 쌓이면서 공격한 둘이 오히려 내상을 입고 뒤로 물러났다.
무극존자 상대로 공손평천은 후토공을 사용했다. 단단함이 돋보이는 욕수공이나 강하게 몰아치는 축융공, 수비에 강한 구망공이나 부드러우면서 질긴 공공공과 달리 후토공은 균형이 잡혔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고 공격적이면서도 수비가 부실하지 않았다. 다섯을 동시에 펼치는 오행신공을 상대할 때처럼 어렵진 않았지만, 무극존자는 싸우면서 처음 막막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공손평천의 정수리에 닿은 물방울은 누런 김을 뿜어냈다.
"당문의 독이구나. 난 만독불침인데."
오행신공의 다섯 모두 소성을 이룬 공손평천은 웬만한 독이 몸으로 침입하지 못했다. 게다가 무형지독을 버틴 경험이 있어 웬만한 복합독도 순식간에 해결했다.
잔월처럼 독 기운이 몸에 들어와도 아무 해를 받지 않는 진정한 만독불침은 아니지만, 현재 천하에 알려진 독 중에 두려워할 건 하나도 없었다.
"만천화우(漫天花雨) 초흑룡(招黑龍)."
무극존자가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수천 개 암기가 공손평천 몸에 쏟아졌다. 몸으로 파고드는 예(銳)암기, 타격으로 속을 상하게 하는 둔(鈍)암기, 살이나 근육에 꽂혀 움직임을 불편하게 하는 자(刺)암기, 독을 바른 화(花)암기, 내공을 담아 상대를 공격하는 전(傳)암기.
수많은 암기가 각자 특성에 알맞은 수법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그 끝을 장식하는 건 한 마리 흑룡이었다.
당한백이 아끼는 송곳을 삼킨 흑룡이 지금까지 선보인 중에서 가장 큰 덩치로 공손평천을 덮쳤다.
"오행상생(五行相生) 조만물(造萬物)."
공손평천도 당한백의 공격이 버거운지 구결을 읊어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호신강기!"
남궁가 무인이 놀라움에 소리 질렀다. 유형의 강기가 둥그렇게 공손평천 몸을 감쌌다. 작은 암기는 강기막에 부딪힌 그대로 사라졌고 조금 큰 암기는 일부가 사라지고 일부는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수천 개 암기가 다 사라질 무렵, 흑룡이 호신강기를 덮쳤다. 여의주를 덮치는 승천을 앞둔 용 같은 모습이지만, 여의주가 흑룡만큼 컸다.
"오행상극(五行相剋) 즉시공(卽是空)."
느긋함이 엿보이는 이번 구결은 일부러 읊은 게 틀림없었다. 호신강기가 주머니로 변해 흑룡을 가뒀다. 흑룡은 잠시 꿈틀거리다가 그대로 사라졌다.
"아까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다. 내 손녀와 혼인하면 황제 자리를 네게 물려주겠다."
잔월은 당한백 목덜미를 잡아 뒤로 던졌다. 몰래 당한백을 노리던 공손평천의 세 암경은 잔월 몸에 부딪히고 사라졌다.
"우선, 난 황제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소. 황제는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요. 아무나 앉아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자리지."
잔월은 공손평천이 몰래 쏘아내는 암경을 해소하면서 천천히 전진했다.
"다음, 황제가 되겠다고 혈육도 죽이는 자 말을 믿을 정도로 멍청하지 못하오."
잔월은 머리와 허리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마지막, 난 당신이 싫소."
잔월 몸에 후광이 서렸다. 죽기 전에 마지막 깨달음을 얻은 경인 스님의 모습과 흡사했다. 다만, 마지막 생명을 불사르던 경인 스님과 달리 잔월의 후광은 덜 밝고 크기도 작았다.
"황제 말고 부처가 되겠소."
一覽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衆山小 다들 고만고만하구나
- 작가의말
내일 완결입니다. 작년에도 이맘때 글 쓰는 게 무척 힘들었습니다. 비축분 없이 쓸 때여서 억지로 쓰다 보니 질책도 꽤 받았던 거 같습니다.
알고 보니 통풍이 원인이었습니다. 제가 통증에 둔감한지 별로 안 아프다고 무시했었거든요. 다행히 작년과 달리 올해는 통풍이라는 걸 알고 약을 먹고 있습니다.한동안 글이 안 써졌는데 약을 먹고 사흘 된 날부터 글이 술술 써지더니 완결까지 이틀에 끝냈습니다.한동안 푹 쉴 생각도 했었는데, 약을 먹어 요산 수치 조절되니 또 의욕이 샘솟습니다. 최근 글이 안 써져서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영화 많이 봤습니다. 다음 글은 좀 더 생생하게 쓰고 싶네요.그럼, 내일 마지막 세 편 기대해 주십시오. 같은 시간에 올립니다.
Comment '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