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지·읍귀신
무극존자가 담벼락을 걷어차며 환속승을 덮쳤다. 무극존자의 발에 차인 담벼락은 무너지는 게 아니라 터졌다. 잔월 등이 고생스럽게 날라와 정성껏 다듬어서 쌓은 돌들이 작은 자갈 크기로 부서졌다.
무극존자 주먹이 환속승 가슴을 때렸다. 환속승 몸이 흐물흐물한 두부처럼 출렁였다. 내공이 실리지 않아도 맞으면 아플 것 같은 단단한 주먹에 정통으로 당했는데도 환속승은 무사했다.
"저길 봐."
담두천이 환속승 뒤를 가리켰다. 쌓아둔 장작이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마치 숫돌에 대고 갈아서 가루를 낸 듯, 세차게 흐르는 강바닥 모래보다 더 곱게 갈렸다.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환속승은 무극존자의 공격을 뒤로 전달했다.
무극존자는 허공에서 그대로 몸을 돌리며 발차기를 했다. 힘찬 발차기에 환속승도 감히 아까처럼 맞아주지 못했다. 뼈가 없는 것처럼 순식간에 허물어진 환속승의 몸은, 무극존자의 발이 멀어지자 빠르게 일어섰다.
환속승이 몸을 일으키는 사이, 무극존자는 바닥에 내려섰다. 그러나 내려선 바닥에 가시라도 있는 듯 펄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뭔지 알겠어?"
담두천이 잔월에게 질문했다. 왠지 잔월이라면 대답해줄 것 같았다.
"용천혈로 내공을 땅으로 투사해 상대를 공격하는 거야."
몽롱한 말투에 쳐다보니 눈동자가 흐렸다. 눈앞에 손을 흔들었지만, 잔월의 눈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무극존자는 시정잡배가 싸움하듯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주먹질과 발차기로 공격했다. 반면, 환속승은 거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공격을 피하거나 흘리며 내공을 투사해 반격했다.
무극존자의 공격은 너무 평범해서 봐도 느낌이 없었고, 환속승의 공방은 아예 보이지 않아서 느낌이 없었다.
두 고수의 대결에 잔뜩 기대했던 담두천과 한자강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진실은 달랐다. 무극존자가 주먹 한 번 내지를 때마다 최소 일곱 가닥의 암경(暗勁 - 보이지 않는 힘)이 함께 공격했다. 기운 하나하나가 사혈 혹은 마혈을 노리기에 조금도 소홀할 수 없었다.
환속승이 피하는 것보다 흘리는 쪽을 더 많이 선택한 것도 암경 때문이었다. 몸통에 붙은 팔다리와 달리 암경은 어떠한 궤적도 그릴 수 있다. 괜히 피하다가 궤적을 바꾼 암경에 제약당해 회피할 경로가 사라지면 환속승은 목숨을 걱정해야 한다.
그러나 암경이 하나로 합쳐질 때는 피하는 길밖에 없었다. 여럿으로 분산됐을 때는 음양무계(陰陽無界)의 수법으로 몸에 침투한 상대 내력을 흩어서 전신 혈도로 분산할 수 있지만, 하나로 합쳐지면 단단히 뭉친 내력을 흩어버리지 못한다.
다행히 암경들이 주먹에 실린 경력(勁力 - 내공이 실린 힘)과 합쳐질 때면 무극존자도 후속 변화가 느려서 피해도 괜찮았다.
"막기만 할 거야? 그럼 반나절도 못 버틸 텐데."
"이번엔 내기를 안 거는 건가?"
무극존자가 뒤로 훌쩍 물러섰다.
"그래, 무슨 내기를 할까?"
"내가 이기면 저 세 아이를 해치지 않는다고 맹세하시게."
"내가 이길 거니까 몇 개 더 걸어도 돼."
무극존자가 안하무인으로 말했다. 그러나 환속승은 별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내가 이기면 너 십 년 도사 해라. 종남은 안 받을 것 같고. 가까운 무당산으로 가서 도사 하면 되겠네."
"그리하겠네."
말을 마친 환속승의 옷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이제야 제대로 할 생각이 든 게냐?"
"시주, 아니, 당신이 술기운 때문에 주화입마에 걸릴까 봐 막기만 한 걸세."
"하하. 나도 이제부터 진심으로 할 테니 네 몸이나 걱정해라."
무극존자의 팔이 늘어났다. 실제로 늘어난 건 아니고, 선명한 형상을 갖춘 내공을 쏘아내는 바람에 흡사 팔이 늘어난 듯 보였다.
아까 환속승이 수비에만 치중하며 전력을 안 했듯이, 무극존자도 슬렁슬렁했던 것이었다. 물론, 슬렁슬렁했어도 담벼락 몇 군데 무너뜨리고 장작을 가루로 만들었으며 집 한 채 부숴 먹었다.
환속승은 손바닥을 무극존자에게 향한 후 왼손으론 동그라미를 그리고 오른손으론 삼각형을 그렸다. 동그라미와 부딪친 주먹 모양의 내공이 흔들렸다. 거스르거나 순응하는 힘이면 쉽게 대응할 수 있는데, 상하좌우로 돌리는 힘이어서 무극존자는 대응하지 못했다.
무극존자가 쏘아낸 주먹이 살짝 흔들리자 삼각형이 가세했다. 삼각형은 무극존자의 주먹을 갈라놓았다. 삼각형에 여러 갈래로 찢긴 주먹은 환속승에게 흡수된 후 용천혈로 빠져나가 무극존자를 공격했다.
"설마, 구음진경을 익혔느냐?"
"금시초문일세."
환속승이 부정했다.
"그럼 어떻게 한 거야?"
"나는 용천혈이 특별히 발달했네. 저기 잔월 소형제 덕분에 기운을 용천혈로 안전하게 보내는 운기법 하나 만들었다네."
"제길, 그럼 요 며칠 사이에 만든 새 수법이란 말이야?"
"어제 겨우 완성했네. 잔월 소형제, 이 운기법은 이름을 뭐라 해야 하는가?"
잔월의 눈은 여전히 몽롱했다. 지금 잔월은 두 절세고수의 대결을 모든 감각을 동원해 감상하고 있었다. 담두천이 눈앞에 손을 흔들어도 반응하지 않은 건, 못 본 게 아니고 너무 집중해서 본능마저 뛰어넘었기 때문이었다.
"기성해."
단무전이 만든 운기법. 만독불침을 이루려고 만들어낸 운기법이 환속승을 통해 절세고수의 대결에서도 유용한 대단한 무학이 되었다.
"이러면 내가 너무 손핸데."
기성해를 펼치면서 환속승이 내공을 소모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무극존자의 내공 소모가 훨씬 심했다. 무극존자는 자신을 공격하는 자신의 내공을 막아내려고 또 내공을 소모한다.
"손해 보기 싫으면 공격하지 않으면 된다네."
"공격하지 않고 어떻게 이기지?"
"날 이겨서 뭐 하겠는가."
무극존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열 살이 넘은 이후로 싸워서 진 적이 없었다. 상대가 똑같은 초식을 두 번 사용하는 순간 승패가 갈렸다. 한 번 본 초식에 두 번 당하는 법이 없고, 어려서부터 맷집이 튼튼하고 내공도 또래보다 훨씬 많았기에 패배를 모르고 자랐다.
"굳이 이유가 필요해? 난 그냥 이기는 게 좋은데."
"날 이기려 하는 순간 당신이 질 가능성이 생긴다네. 지지 않으려면 싸우지 않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네."
"난 지지 않으려는 게 아니고 이기려는 건데?"
"지지 않으면 언젠가 이기지 않겠나."
"이놈이 소림사에 십 년 처박혀 있더니 스님이 다 됐어."
무극존자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 숨을 다시 내쉬기까지 엄청 긴 시간이 흘렀다. 저 정도라면 일각(15분)에 숨을 열 번도 못 쉴 것 같았다.
"너희 봉황이 있다고 믿어?"
갑자기 무극존자가 질문하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묻는 족족 대답하는 잔월조차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산은 봉황산이고 이 산장은 봉황산장이잖아. 그리고 내가 무극존자로 불리기 전 별명은 봉황존자였어."
무극존자는 왼손 다섯 손가락을 쫙 펴서 심장 어림에 갖다 댔다. 오른손은 다섯 손가락을 오므려 부리 모양을 만들어 오른쪽 태양혈에 붙였다.
"이 무공은 초식이 하나밖에 없어. 봉황내의(鳳凰來儀)라고, 지금까지 이 초식을 피하거나 막아낸 사람은 백원선사밖에 없다."
왼손을 심장에, 오른손은 태양혈에, 거기에 몸을 한껏 오므린 모양은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무극존자의 기세에 당사자인 환속승이나 곁에서 지켜보는 넷이나 웃을 수 없었다.
"내 살면서 너보다 강한 놈은 서넛 봤지만, 너처럼 마음에 드는 놈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패배를 인정하면 초식을 거두마."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무극존자가 눈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질문했다.
"무슨 뜻이야?"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이네. 자네 초식을 한번 받아보고 싶다는 게지."
무극존자 몸에서 여든한 가닥의 내공이 동시에 움직였다. 특별한 초식을 익힌 고수도 아홉 가닥 이상의 내공을 동시에 움직이는 걸 어려워했다. 여든한 가닥이나 되는 내공을 서로 충돌 없이 움직인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어."
담두천과 한자강이 얼빠진 소리를 뱉어냈다. 무극존자의 몸에서 강대한 내공이 발산되며 아지랑이를 만들었다. 덕분에 무극존자의 형상은 느리게 흐르는 물에 비친 것처럼 일그러진 채 흔들렸다.
시간이 흐르며 흔들림이 천천히 사라졌다. 그리고 모두의 눈에 닭 같기도 하고 매 같기도 하고 언뜻 올빼미도 생각나는 새 머리가 보였다.
"봉황내의."
고수는 의념이 움직이면 내공이 흐르고 초식이 펼쳐진다. 하수들이나 감당하기 힘든 초식을 펼칠 때 초식 명 외치는 거로 주의력을 끌어올린다. 중대한 뭔가를 하기 전에 상응한 의식을 벌이는 것처럼, 내공의 흐름을 더 원활하게 하고 초식을 더 정확히 펼칠 수 있게 마음에 안정을 주는 행위였다.
무극존자 정도면 초식을 분해하여 일부만 꺼내 쓸 수 있는 경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황내의를 외치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여든한 가닥의 내공이 무극존자의 체내와 체외에서 충돌하고 화합하며 환속승을 향해 어마어마한 거력을 쏟아냈다.
"상구(上九), 항룡유회(亢龍有悔), 영불가구야(盈不可久也)."
항룡은 지고의 위치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이젠 내려갈 일밖에 남지 않았기에 후회된다는 뜻이다. 최고의 위치이기에 어떻게 움직여도 지금보다 낮은 위치로 갈 수밖에 없다.
영불가구야는 같은 뜻이다. 꽉 찬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없다는 뜻으로, 최고의 위치에 계속 머무를 수 없다는 걸 다르게 표현했다.
세찬 홍수처럼 밀려오는 힘에 환속승은 작은 가랑잎이 되었다. 바람에도 부서지는 가랑잎이건만, 홍수의 물을 빨아들여 푸름을 찾아 쉽게 부서지지 않는 몸이 되었다. 물이 밀면 미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누르면 누르는 대로 반항하지 않았다.
끝이 없을 것 같은 홍수였지만, 자연의 힘도 무궁무진하진 않다. 무극존자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자연재해도 오랜 기간 지속하지 못했다. 옷이 다 찢어지고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환속승은 봉황내의 초식을 버텨냈다.
풀썩.
어마어마한 초식을 풀어낸 무극존자와 그 초식을 받아낸 환속승은 정작 괜찮은데 구경하던 잔월이 기절했다. 흑표가 잔월 코에 머리를 댔다. 느리게 이어지는 호흡을 확인하고는 바싹 세운 털을 눕혔다.
"내가 이겼다."
환속승은 봉황내의를 버텨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터벅터벅 걸어간 무극존자가 환속승의 심장에 손을 대자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길, 도사는 고기를 먹어도 되는 건가?"
"몰라, 무당에 가서 물어보아라."
驚天地 하늘과 땅이 놀라고
泣鬼神 귀신과 신선이 통곡하다
- 작가의말
무극존자
본명 : 원루피(猿淚披)
종교 : 천주교
세례명 : D
풀네임 : 원·D·루피
주요 무공
팔이 고무처럼 늘어나는 듯한 격공권.
무수한 팔이 생겨 난타하는 듯한 봉황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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