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무애
잔월과 천희연이 따로 있을 땐 잔월을 따르지만, 둘이 같은 장소에 있으면 늘 천희연 곁에 머물렀다.
"흑표가 천 소저를 잘 따르는 것 같습니다."
잔월의 말에 천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제가 익힌 심법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빙청옥결(氷淸玉潔)은 조사께서 만든 겁니다. 천칠백 년 가까운 기간 익힌 사람이 열 명도 안 된대요."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하다는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음한 계열에서도 순수함으론 적수가 없는 심법이었다. 체질이 안 맞으면 아예 입문도 어려운 무공이다.
빙련기공도 꽤 체질을 따지지만, 빙청옥결처럼 까다롭진 않았다.
'평범한 무공은 많은 사람이 익힐 수 있지만, 특별한 무공은 특별한 사람만 익힐 수 있다. 아미와 같이 제자만 수천 명 되는 대문파가 아니라면 빙청옥결처럼 익히기 힘든 무공은 사라지기가 십상이다.'
달마나 왕중양 같은 무인이 무학종사로 불리며 칭송받는 이유가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차근차근 익힐 무공과 심법 그리고 수련 방법까지 다 정립하여 웬만한 타고난 자는 열심히 하면 고수가 될 수 있도록 체계를 만들었다.
달마는 무공만 전수하고 체계는 수백 년이 넘은 기간 소림사가 어렵게 만든 거지만, 왕중양은 혼자서 이 년 사이에 무공도 만들고 체계도 만들고 심지어 수백 개 초식까지 만들었다.
'강호에 왕중양 같은 천재가 또 나올 수 있을까?'
"뭘 그리 깊이 생각하십니까?"
"대단한 무공을 만든 사람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일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독고 사부께서도 나이에 비교해 성취가 어마어마한데요. 태공께서 말씀하시길 이 년 정도 지나면 내공도 자신을 능가할 거라고 하더군요."
"힘만 강해 뭐하겠습니까."
"번뇌가 많아 보입니다."
천희연은 목소리도 익힌 심법처럼 시원했다. 마음에 파고드는 목소리에 답답함이 조금 가셨다.
"세상엔 확실치 않은 게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번뇌는 세상이 주는 게 아닙니다. 본인이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번뇌를 끊을 수 있을까요?"
천희연이 드물게 웃었다. 계절이 순식간에 봄으로 변했다. 그러나 천희연이 웃음을 거두자 세상은 다시 흰 눈에 덮인 겨울로 돌아갔다.
"쾌도난마(快刀亂麻)라는 말이 있습니다. 쾌도는 깔끔하게 베는 칼을 말하죠. 어설프게 베면 오히려 번뇌가 더 늡니다. 어설프게 떨치려 하지 마시고 세상을 둘러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번뇌를 감추고 사는지 들여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제자 가르치고 저도 수련해야 하잖아요."
"가끔은 멈춰서 돌아볼 때도 있어야 합니다. 희영과 희웅도 나이보다 성취가 너무 깊습니다. 쉬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독고 사부 역시 마찬가지고요."
'술도 숙성에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밥을 더 맛있게 먹으려면 뜸을 들여야 한다. 새 구이도 식혔다가 한 번 더 구우면 훨씬 맛있다. 옥녀공도 소성을 이루고 일정 기간 쉬어야 한다고 외숙공이 말했다. 쉬면서 강호를 돌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자강과 두천과 함께 넓은 세상을 구경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잔월의 눈이 점점 깊어지더니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생각에 골몰하다가 무아지경에 들어가 버렸다. 무아지경은 무인에게 엄청난 회복을 주는 최고의 휴식이다.
짧은 기간 많은 일을 겪으면서 지치고 아팠던 잔월 마음이 조금씩 아물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깊은 밤이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잔월을 아무도 건들지 않았다. 기지개를 시원하고 켜고 나서 몸을 훌쩍 날려 부두로 갔다. 잠은 밖에서 자도 상관없는데 배가 조금 고팠다.
그때 잊고 있었던 흑표가 배를 부두에 묶은 밧줄을 타고 달려왔다. 잔월이 깨자마자 몸을 날리는 바람에 누워서 쉬던 흑표가 미처 잔월 등에 올라타지 못했다. 잔월도 무아지경에서 깨어나 배고프단 생각만 머리를 꽉 채워 흑표를 떠올리지 못했다.
"쌍둥이 있는 곳으로 가자."
산도 다 밭으로 만든 꽤 큰 도시여서 흑표가 사냥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잔월은 흑표를 앞세우고 일행이 머문 객잔을 찾았다. 그때 앞장섰던 흑표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천 소저. 돌아가는 대로 부친께 말씀드려 혼서를 보내겠습니다."
검옹을 따라온 점창파 제자의 목소리였다.
"혼인은 부모가 정할 일입니다. 굳이 저를 불러 내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천희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점창과 아미의 친분을 생각하면 우리 혼사는 반드시 성사할 겁니다. 천부전 대협도 저를 썩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칩니다. 그리 알고 당분간 행실을 바르게 했으면 합니다."
"단 공자. 굳이 배분을 따지자면 내가 사고(師姑)입니다. 지금 사고에게 행실이 단정치 않다고 훈계하는 겁니까?"
"아니. 제 뜻은 그게 아니고. 외간 남자랑 자주 대화하지 말라는."
"단 공자 뜻을 잘 알았습니다. 단 공자와 같은 외간 남자와 대화를 자제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천희연이 몸을 돌려 객잔에 들어갔다. 점창파 제자는 밭 열 마지기를 간 소처럼 콧김을 씩씩대다가 발을 크게 구르고 역시 객잔으로 돌아갔다.
흑표가 꼬리로 잔월 다리를 툭툭 쳤다. 잔월이 기분이 나쁘거나 할 때 흑표가 위안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내가 기분 나쁠 게 뭐 있다고."
잔월은 흑표의 뜬금없는 위로에 툴툴거렸다. 밖에서 조금 더 있다가 객잔에 들어가 소면과 소금에 절인 채소로 배를 채웠다.
객잔에 빈방이 없어서 다시 배로 돌아갔다. 잔월은 누워 별을 셌고 흑표는 강에 뛰어들어 물고기를 잡았다. 장강은 물살이 센 편이지만, 부두를 만들 수 있는 곳이면 그렇게 급하진 않았다.
물고기를 배불리 먹은 흑표가 털을 곤두세웠다. 흰 털이 검은색으로 변하더니 물기가 순식간에 말랐다. 털을 말린 흑표가 힘을 거두니 꼬리부터 천천히 흰색으로 돌아갔다.
"흑표. 백원선사도 그렇고 무극존자도 그렇고 다들 대단한 초식이 있잖아. 봉황내의를 펼치는 봉황이 있는진 몰라도 백원은 백원선사가 펼쳤던 백원노후를 똑같이 펼쳤잖아."
잔월은 갑자기 자신이랑 흑표가 같은 초식을 펼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백원선사와 백원이 함께 백원노후를 펼치는 광경을 상상하니 너무 부러웠다.
"초식 하나 만들고 이름은 흑표신월로 할까? 싫다고? 왜?"
이럴 땐 흑표가 말을 못 하는 게 답답했다.
아침이 되어 배가 일찍 출발했다. 잔월은 천부전을 찾아가 품었던 의문을 쏟아냈다.
"천 대협. 백원선사께서 무공을 펼칠 때 원숭이 모습이 나타났고 무극존자도 봉황내의 초식을 펼칠 때마다 봉황으로 의심하는 새 머리가 나타났습니다. 이건 대체 무슨 영문입니까?"
"이건 정론이 아니네. 그저 이런 생각도 있구나 정도로 들어두게."
천부전이 입술을 다졌다. 잔월은 제발 천부전 이야기가 딴 데로 새지 않길 바랐다.
"혹시 심상 수련을 해본 적 있으신가?"
"금시초문입니다."
"상상으로 수련하는 게지. 내 모습을 만든 다음 그 모습이 초식을 수련하게 하네. 장점이라면 몸이 안 힘들다는 것과 내 모습을 뒤에서도 볼 수 있다는 점이네. 단점이라면 이 수련은 심력 소모가 심하고 심마에 걸리거나 주화입마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네."
'월영도법 고민할 때 비슷한 걸 하긴 했는데. 별로 힘들지 않았던 거 같아.'
"실제 몸으로 펼치는 것이 심상과 완벽히 일치하면 그게 밖으로 표출될 수 있다네. 즉 무극존자나 백원선사께선 몸으로만 초식을 펼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도 똑같이 펼쳤다는 말이네. 둘이 일치하니 심상에 품었던 것이 밖으로 나온 것이지. 이건 내 생각이고, 다른 사람에게 더 좋은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네."
"심상 수련을 하면 심상이 생기는 겁니까?"
"그건 아냐. 어차피 초식 열심히 익히면 자연스레 심상에 초식이 맺히게 된다네. 무인의 명상은 심상에 맺힌 초식을 보며 잘못된 점을 찾는 과정이지."
'역시 대문파. 이런 것들을 알고 있다는 것도 대단하고 그걸 이리 쉽게 얘기해주는 것도 감복할 수밖에 없구나.'
"자넨 아직 심상 수련을 할 단계가 아니야. 아직 몸도 채 자라지 않았잖아. 주화입마에 걸리거나 심마가 찾아올 가능성이 크다네. 심상의 몸이 실제와 괴리가 크면 균형이 틀어지거든."
잔월 머리에 뭔가 반짝였다. 사부 월영고랑이 갑자기 생각났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덕분에 개안했습니다."
배가 드디어 강릉에 도착했다. 잔월은 볼일이 있다고 흑표를 천희연에게 맡겼다.
"혹시 내일 아침까지 안 돌아와도 기다리지 마십시오."
잔월은 경공을 펼쳐 사부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사부가 기거하는 곳에 도착하니 그간 매우 심심했는지 강에 나무다리가 하나 생겼다.
"사부."
"오, 제자."
두 사제는 얼싸안고 크게 웃었다. 어제 헤어지고 오늘 다시 만난 것처럼 어색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사부. 방법 찾았습니다."
"그래? 안 그래도 무공 수련을 안 한 지 너무 오래돼서 걱정이었는데. 이러다 제자한테 맞고 다니는 게 아닌지 해서 말이다."
잔월은 무극존자의 봉황내의와 백원선사의 백원노후 초식을 설명하고 천부전이 말한 심상에 관한 이야기도 사부에게 들려줬다.
"그러니까 내가 초식 수련을 너무 해서 심상에 확고히 새겨졌는데 치료받으면서 몸이 달라진 바람에 이렇게 된 거라는 뜻이지?"
"명상해서 심상에 새긴 초식을 찾은 다음 실제와 다른 부분을 찾아 고치면 될 것 같습니다."
월영고랑은 잔월 말에 따라 편히 누워 명상에 들어갔다. 하가촌에서 치료받던 때와 비슷한 자세가 좋을 것 같아 앉은 자세보단 누운 자세를 택했다.
'명상할 때 기운이 특별히 많이 몰리는 혈도가 있구나.'
몸에 있는 단중과 머리에 있는 백회, 인당, 본신, 신정 네 개 혈도에 기운이 잔뜩 몰렸다.
'운기가 멈췄다.'
놀랍게도 월영고랑이 깊은 명상에 빠진 후 몸의 기운이 흐르지 않고 그대로 멈췄다.
'죽은 건 아냐.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
검은색에 가까운 자색 기운이 월영고랑의 인당혈로 몰렸다. 그러다 갑자기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입을 꾹 다물었고 코는 피가 가득 차서 숨이 막힐 법도 하지만, 월영고랑은 계속 평온한 얼굴로 명상에 잠겼다.
거의 반 시진 가까이 명상에 빠졌던 월영고랑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고 캑캑거렸다. 명상에서 나왔는데 코가 굳은 피에 막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던 거였다.
"심상(心像)이 무애(無碍)해야 한다."
월영고랑은 제자에게 깨달음을 전하고 바로 쓰러져 잠들었다.
心像 마음에
無碍 걸리는 게 없다
- 작가의말
월영고랑은 갑자기 로또에 당첨된 바람에 탈이 났습니다. 심리치료 덕분에 다시 활력을 찾았습니다.
무협에 나오는 무학종사 4명
달마대사 - 실존 인물
왕중양 - 실존 인물
장삼풍 - 실존 인물
천마 - 허구
그래서 천마가 제일 강합니다. 실존 인물은 특정 시간대에만 등장할 수 있지만, 천마는 고대부터 현대 심지어 이계까지 등장할 수 있습니다.
등장 방식도 환생, 빙의 등 여러 가지로 풍부합니다. 다만, 그 빙의 대상은 보통 학교 폭력의 피해자 혹은 아름다운 여친에게 배신당한 직후의 남자 혹은 홀어머니와 여동생이 있는 남자로 국한되어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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