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육·상봉
반년 뒤 상관소혜와 혁중이 꾀죄죄한 몰골로 돌아왔다.
"전쟁 치르며 빌어먹을 장사성이 배를 다 징수해갔다. 말과 수레도 보이는 족족 가져가서 발로 뛰어야 해. 객점도 다 문을 닫아 직접 음식을 만들어야 하고."
"객점은 왜 문 닫아요?"
"음식 재료 가져다줄 배가 없으니까. 게다가 사람들이 돈 모아둬야 해서 객점 안 가거든."
"돈은 왜 모아둔대요?"
"원나라나 다른 군벌이 도시 점령하면 돈 바쳐 목숨 구걸해야지. 재물이 적으면 홧김에 대학살을 펼칠 수도 있어."
"무고한 백성을 학살하다고요?"
"그럼. 전투에 죽는 병사보단 전투 끝난 다음 학살로 죽는 백성이 훨씬 많을걸."
식사를 나누며 얘길 들어보니 지옥이 인세에 강림한 게 아닌가 싶었다.
"돈 주고 개방에 의뢰했다. 강릉에 단 씨 성을 쓰는 의원이 있었는지 알아봐 달라고."
화산과 낙양에서 수소문하며 한계를 느낀 둘은 강릉 쪽을 개방에 맡기기로 했다. 상관소혜와 혁중도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주기적으로 낙양으로 가서 왕가장 사람들 소문을 알아봤다.
그러나 다시 겨울이 되어서도 아무 성과 없었다.
"개방 이것들 안 되겠다. 언젠간 손봐 줘야지."
상관소혜가 이를 갈았다.
"우리가 직접 강릉으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함께 강릉에 가서 수소문하자."
삼월 초사흘 잔월 생일을 축하하고 이튿날 다섯이 함께 출발했다.
상관소혜와 혁중은 그간 산적이나 수적을 털며 모은 재물이 꽤 되었다. 땅을 파서 숨기는 것도 마음이 안 놓여 차라리 들고 다니기로 했다. 무거운 물건은 큰 도시로 가서 처분했다.
"동정호로 가서 사부 집에 잠깐 들르는 건 어때요?"
어차피 강릉으로 가는 길에 동정호 들른다고 딱히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제대로 배운 상관소혜가 월영고랑의 문제점을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할지도 모른다.
그간 몇 번 주고받은 편지에 무공을 회복했다는 말이 없었다.
"두 분 어떻게 혼인을 결심하게 되었어요?"
걸으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둘의 혼인이 화제가 되었다.
"두천이 모친이 두천 낳고 얼마 안 가 죽었어. 두천이 임신했을 때 고생 좀 했거든. 그런데 너희도 알다시피 처녀는 젖이 안 나와. 두천이 젖 먹이려고 혼인했지."
상관소혜의 대답은 상상 이상이었다.
"제가 의모 젖 먹고 자랐나요?"
"아니. 처녀는 젖이 안 나오지만, 혼인한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더라고. 그래서 내가 맨날 두천이 업고 임강부 돌아다니며 젖동냥했어."
한자강이 부러운 눈빛으로 담두천을 바라봤다.
다섯이 동정호에 이르렀을 때는 구수한 흙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완연한 봄이었다. 사부와 재회하는 기쁨에 잔월은 기분이 무척 즐거웠다.
"사부, 우리 돌아왔습니다."
빗장 없는 대문을 밀며 잔월이 외쳤다. 그러나 눈에 들어온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당엔 흑의를 입은 사내 몇이 쓰러져 있었다. 급히 짐을 팽개치고 다가가 보니 숨 쉬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태양혈이 불룩한 걸 보면 내외공을 균형되게 수련한 무인이었다.
피를 흘린 흔적이 전혀 없는 걸 보면 흉수의 실력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다섯은 급하게 집으로 들어갔다.
사부가 점혈을 당했는지 미동도 못 하고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옷이 살짝 내려가 어깨 맨살을 드러낸 완청이 있었고, 완청 곁에는 얼굴이 익숙한 사내가 쪼그리고 있었다.
완청의 눈에 서린 절망과 애통에 잔월은 더없는 분노를 담아 외쳤다.
"무극존자!"
잔월은 계도를 뽑아 무극존자를 덮쳤다. 여덟 번째 초식 잔월의 기수식을 펼친 다음 섬전도 경공으로 무극존자를 덮치며 만월로 바꿨다.
잔월이 펼칠 수 있는 최강 공격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무 급하게 펼치느라 섬전도 경공에 실패했다. 잔월은 무극존자에게 닿지도 못하고 튕겼다.
담두천이 자강두천의 일곱 번째 초식 번성점점(繁星点点)을 펼쳤다. 무수한 허초로 상대 눈을 현혹하는 초식이었다.
거기에 맞춰 한자강이 세 번째 초식 유성간월(流星趕月)로 무극존자 명치를 노렸다. 마당까지 튕겨 난 잔월과 달리 둘은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부드럽게 뒤로 밀려났다.
하룻강아지들과 달리 상관소혜와 혁중은 덤빌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혹시 모를 무극존자의 반격에 대비하는 게 다였다.
무극존자는 자기 옷을 벗어 완청을 감싼 후 몸을 일으켰다.
"오늘 일이 우연이더냐?"
적반하장도 저런 적반하장이 있을 수 없었다. 한자강과 담두천은 원래부터 무극존자에게 좋은 감정이 없었기에 화가 욱 치밀었다.
"무극존자께서 먼저 양갓집 규수를 욕보인 이유를 해명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몸을 추슬러 다시 안으로 들어왔지만, 점혈 당한 것도 아닌데 기운이 막혀 입을 못 떼는 잔월 대신 상관소혜가 나섰다.
"빙련기공인가? 검선 제잔가 보군."
"해명을 먼저 해주시죠."
"해명은 보통 상대가 해야 하는 건데. 아이들 얼굴 봐서 오늘은 선심 쓰지."
"며칠 전에 명교로부터 전갈을 받았다. 무곡산장 무리의 움직임을 포착했다는 소식이었지. 몇 번이나 무곡산장 흔적을 잡은 적 있는데 번번이 놓쳐서 이번엔 무척 조심했다."
"무곡산장 위치를 찾아내려고 저놈들 뒤를 몰래 따라다녔다. 그런데 오늘 저놈들이 이 집을 습격했다. 저자는 기혈이 살짝 뒤틀려서 무공도 제대로 못 펼치고 제압당했지. 나는 나서지 않고 놈들 전음을 엿들었다."
"전음을 다 듣진 못했지만, 내가 언급되었다. 처음엔 명교가 날 팔아먹었나 생각도 했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숫자도 적고 무공도 평범했다."
무극존자에게 저들은 '평범'한 고수였다.
"그런데 저들이 저 여아를 잡아서 옷을 벗기려 하는 거였다. 내가 비록 협의지사는 아니지만, 불의를 보고도 지나칠 정도로 막살진 않았다. 계속 몰래 따라다니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방심한 놈들을 한꺼번에 제압했다. 하나씩 신문하려는데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동시에 죽어버렸다."
밖에 쓰러진 흑의인은 무극존자가 죽인 게 아니라 자결한 거였다.
"그리고 난 여아 곁에 있는 칼을 보았다. 봉황산장에선 아이가 태어나면 칼 하나씩 만들어주는 전통이 있다. 그리고 내 아이와 조카들 칼은 모두 내가 손수 만들었다. 내 솜씨가 분명한 칼에 저 여아가 내 조카가 아닌지 궁금해서 확인했다."
잔월은 그 칼이 자신이 무극존자한테서 받은 걸 준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입을 열어 말할 수 없었다.
'음양무계.'
기운을 수많은 혈도로 계속 돌리는 기성해와 달리 음양무계는 운기를 통해 몸에 들어온 기운을 전신에 골고루 분산했다.
장군보 정도는 되어야 둘을 결합할 수 있다. 잔월은 아직 음양무계와 기성해를 합쳐 광혜여곡을 이룰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말하고 싶어 답답한 나머지 기성해를 억지로 멈추고 음양무계를 펼쳤다. 처음엔 잘 안 됐지만, 장군보가 제대로 가르친 덕분에 빠르게 감을 잡고 몸에 침투한 무극존자의 기운을 전신 혈도로 분산했다.
"그리고 방금 오른쪽 어깻죽지에서 삼각형에 가까운 붉은 점을 확인했다. 내 조카 몸에 있던 점과 무척 흡사했다. 이젠 너희가 해명할 차례다."
"커, 컥."
잔월이 힘겹게 숨을 뱉어냈다. 무극존자 눈에 이채가 서렸다. 죽일 생각은 아니었지만, 한동안 고생하라고 힘을 꽤 실었다.
무극존자가 들여보낸 기운을 완전히 해소한 건 아니지만, 짧은 기간에 입을 열어 소리를 낼 정도로 해결했다.
'정말 탐나는 재능이야.'
소림사에서 봤을 때보다 실력이 훨씬 늘었다. 내공 제외하면 열네 살 때 자신보다 강했다.
"저 칼은 당신에게서 받은 칼을 내가 준 겁니다."
무극존자는 잔월을 노려봤다.
"정확히 이 시간에 여길 도착한 건 우연이냐?"
"우연입니다."
"저자가 네 사부냐?"
"그렇습니다."
무극존자는 월영고랑에게 다가가 혈도를 풀어줬다.
"무공은 평범한데 가르치는 재주가 있나 보군. 짧은 기간에 저 정도로 키워낸 걸 보면."
"구해주셔서 감사하오."
"저 아이와 자네 관계는 어떻게 되나?"
무극존자의 질문에 월영고랑은 회상에 잠겼다. 당시 일을 세세히 새김질한 후 신중하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어두운 밤이었소. 내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재촉하는데 수상한 자들이 보였소. 둘의 대화를 엿들어보니 아이를 납치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소. 그래서 칼을 뽑아 둘을 공격했소."
월영고랑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난 그때까지 무공을 익히기만 했소. 대련은 가끔 했지만, 진심으로 칼을 맞댄 적 없었소. 그래서 실수로 한칼에 둘을 죽여버렸소."
"이들이 기다리는 자가 아이 부모인지 아니면 같은 패거린지 모르니 그 자리에 있기 두려웠소. 아이가 자꾸 울어서 숨어 지켜볼 수도 없었고 내 친구는 주검이 되어 내가 빨리 수습해주기를 기다렸소."
"그래서 나는 아이를 안고 친구 주검을 수습하러 갔소. 아이를 친구 여동생이자 훗날 내 부인이 된 여자에게 맡기고 다시 돌아가서 주변을 수소문했는데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사람이 없었소. 아이가 입은 옷이나 감싼 보자기 등을 보면 가난한 집 자식은 아닌 것 같았는데 관아를 찾아가 봐도 아무 단서가 없었소."
"그때 옷이랑 보자기가 아직도 있는가?"
월영고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극존자는 숨이 가빠졌다. 재촉하고 싶어 입술을 달싹였지만, 정작 확인했는데 아닐까 봐 두려워 소리를 내지 못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지 월영고랑은 여러 곳을 뒤졌다. 무극존자는 손을 마주 잡고 조금씩 비벼댔다. 월영고랑이 작은 상자 하나 들고 다가오자 혀로 입술을 적셨다.
"노란 옷에 노란 보자기였소. 부모가 알아봤으면 해서 지금까지 쭉 노란 옷만 입혔소."
옷과 보자기를 확인한 무극존자가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예전엔 쩍하면 소리 내서 엉엉 울었는데 소리 없이 우는 모습이 훨씬 슬펐다.
"내 조카를 구하고 지금까지 돌봐줘서 정말 고맙소.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오."
가만히 누워서 대화를 듣던 완청이 눈물범벅이 되었다. 월영고랑은 착한 사람이지만, 따뜻하고 살가운 부친은 아니었다. 친딸처럼 아껴주던 모친이 숨을 거둔 이후로 세상에 홀로 남은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진짜 혈육이 나타났다고 하니 그간 쌓였던 서러움이 녹으면서 눈물이 되었다.
"잔월. 네게 빚 하나 진 셈 치겠다. 네가 칼을 안 줬으면 내가 미처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떠났을 거다."
"빚은 빨리 갚아야죠. 우리 사부 회복하게 도와주십시오."
서럽게 울던 완청마저 삐쭉 웃어버렸다.
血肉 혈육이
相逢 만나다
- 작가의말
이 부분은 우연이 아닌 어느 정도 당위성 있는 전개로 풀려 했지만, 너무 많은 분량을 할당할만한 내용은 아닌 것 같아서 우연으로 처리했습니다.
여기서 우연은 딱 저 시간에 맞춰 잔월 일행이 도착한 것입니다. 무극존자야 미리 알고 뒤를 따라다닌 거니깐요.
그리고 순수한 저로서는 한자강이 뭐가 부러웠는지 이해할 수 없네요. 제가 쓰고도 모르겠어요.
여러분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감동하여 80화까지 3연참 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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