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소천하
남궁세가는 홍건군이 원의 군대를 몰아낸 후 빠르게 일어선 가문이다. 안경엔 원의 재상을 셋이나 배출한 어마어마한 가문이 있었다. 남궁세가는 그 가문의 재산과 전답을 전부 빼앗았다.
거기에 주원장 도움을 받아 끊임없이 성장했다. 원래 식솔이 많은 가문이어서 재물이 생기자 빠르게 세력권을 넓혔다.
"한림아, 장사성, 진우량, 주원장."
남궁 가주는 현재 천하를 삼킬 가능성이 가장 큰 넷의 이름을 언급했다.
"한림아는 빼도 괜찮을 것 같소."
검은 수염을 단전 어림까지 길게 기른 중년 사내가 말했다. 장사성 밑에 있는 흑염판관 최영필이었다.
"확실하오?"
"유복통이 곧 두준도를 죽일 것이오. 두준도는 일반 교도 출신으로 재상직까지 차지한 자요. 그런 자가 호법인 유복통에게 죽으면 민심이 흩어질 것이오."
"오히려 세력이 하나로 합쳐져서 더 강해질 가능성은 없는 것이오?"
"한림아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소. 유복통에 대항하려고 두준도를 내세웠소. 두준도가 꽤 유능하여 이미 탄탄한 세력을 굳혔소. 두준도가 죽더라도 다른 자가 세력을 물려받아 유복통에 대항할 거요. 두준도만큼 유능한 자가 아니라면 언젠간 먹히겠지만, 당장은 아니요."
"그럼 한림아는 제외하도록 하겠소. 진우량과 주원장 그리고 장사성. 셋 중에 누가 황제가 되는 게 우리한테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하오? 물론 남궁가는 주원장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나은 대안이 있다면 기꺼이 동참하겠소."
"원 황실도 끼워주시오."
완안덕명의 말에 남궁 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부유함만 따지면 원 황실이 제일이요.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만 있으면 최선이라고 보오. 한림아 자리에 원 황실 넣어 다시 넷으로 하겠소."
"장사성부터 얘기하겠소."
최영필이 나섰다.
"처음 홍건군을 일으켰을 때 장사성은 원의 백만 대군에 포위된 적 있소. 장사성은 그때 자결까지 고민했었는데, 당시 군 인솔자였던 재상 탈탈이 정적의 계책에 당했소. 성지를 받고 압송되어가던 도중 황제가 내린 독을 마시고 죽어버렸소. 그때 장사성은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흩어버리고 수만 명을 군대로 흡수했소."
백만이라지만, 보급이나 임시로 끌어온 자들을 제외하면 정예는 이십만 정도 된다. 그때 장사성이 투항하겠다고 서신을 전했지만, 탈탈은 고우를 점령하고 개나 닭 한 마리조차 살려두지 않겠다고 답했다.
장사성은 정말 천우신조로 겨우 살아난 셈이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장사성은 자신에게 천명이 있다고 확신했소. 덕분에 휘하들의 사기가 무척 높소. 게다가 식량이 남아돌 정도로 넉넉하고 거느린 장수가 가장 많소. 원 황실에 거짓으로 투항해서 힘을 비축했고 일전에 진우량으로부터 주원장을 함께 해치우자는 제안도 받았소."
"최 대협은 장사성이 황제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뜻인 듯하오. 회의의 취지는 세가와 문파들이 지금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기에 가장 괜찮은 위정자가 누군지 가리려는 거요. 우리가 힘을 합치면 충분히 천하의 세력 판도를 뒤집을 수 있소."
남궁 가주의 말에 대부분 참가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서로 견제했다. 만약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이 합심하여 특정 세력을 밀어주면 판도 바꾸는 게 어렵지도 않다. 무인들이 희생을 감수하고 상대 장수를 암살하면 우열을 뒤집을 수 있다.
"우리가 패권 다툼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간 토사구팽당하기 십상이오. 황제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장사성 편에 서면 우린 힘을 덜 드러내도 되오. 내 생각엔 장사성이 최고의 대안이오."
상대 장수를 암살해 아군을 쉬운 승리로 이끌면 당장이야 우대받겠지만, 천하가 안정되면 날카로운 발톱을 갖춘 맹수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최영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자가 적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원 황실이 오히려 낫소. 이미 강남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한 원 황실은 무림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패망밖에 없소. 소림이 이번에 무너졌기에 다른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오. 우리 전진교는 소림만큼 규모가 되지 않소. 그리고 소림과 달리 기꺼이 원 황실이 내리는 혜택을 여러분과 공평하게 나누겠소."
소림은 그대로지만, 소림 그늘에 있던 세력이 대거 이탈했다. 원 황실의 지원이 종남으로 집중되었고 장사성이 소림사를 탄압했기에 일부 우직한 자들을 제외하면 전부 소림에 등을 돌렸다.
"그 이유뿐이라면 확실히 장사성보다 원 황실이 나아 보이긴 하오. 그러려면 우리 모두 북방으로 이주해야 하는데, 그 부분은 어찌 생각하시오?"
검은 도복을 입은 도사 말에 완안덕명이 입을 다물었다. 세력권에 있는 문파가 다른 자를 도와도 그대로 둘 멍청이는 없다.
"강호 세력이 가장 적은 진우량이 어떨까 하오."
완안덕명 입을 막아버린 도사는 진우량을 언급했다. 진우량이 차지한 땅은 무곡산장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강호 세력이 없었다. 무당과 같은 작은 문파가 대부분이었다.
"진우량 장자가 무곡산장 가주 딸과 약혼했소. 무곡산장은 그 무력이 소림 절반 정도 되는 곳이오."
도인은 진우량의 세가 작지 않음을 과시했다.
"무극존자가 무곡산장을 가만두지 않을 텐데?"
소림사에서 긴나라진을 깨고부터 무극존자 실력을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
"무극존자가 멸세교에 잡혀갔다는 소문이 있소."
"그렇다 쳐도 무극존자 비급을 훔친 죄가 있어 세력 모으기 쉽지 않을 걸세. 그 강한 소림도 거느리던 세력 대부분이 등 돌렸소. 명분의 힘을 무시하면 안 되오."
"그 비급을 익혀 무극존자 정도 고수를 배출하면 얘기가 다르지. 무극존자는 약관이 되고부터 적수가 없었소."
"자. 만약 무곡산장과 진우량이 손을 잡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소?"
"반대편에 서야 하오. 무곡산장은 무극존자를 적으로 삼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오. 우리와 나누기보단 자기들이 독식하려 할 것이오."
"주원장은 어떤 자요?"
최영필이 언급이 없는 주원장에 대한 궁금을 표했다.
"빈민 출신이오. 소작을 짓다가 굶어 죽기 싫어서 삭발하고 중이 되었소. 그런데 병란에 절간이 약탈당하고 불에 타버렸소. 환속해서 곽자흥 밑으로 들어갔고 곽자흥의 수양딸과 혼인했소."
남궁 가주는 주원장의 내력을 간단히 읊었다.
"장하에 서달과 상우춘이라는 두 맹장이 있는데 둘이 함께 나선 전장에서 패한 적이 없다고 하오. 덕분에 전공을 자주 세워 포상을 많이 받았는데, 자신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수하들에게 나눠줬다고 하오. 현재 충심으로 따르는 자가 이십만이 넘소."
"황실 제안이오."
완안덕명은 누구도 원 황실을 거론하지 않자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써먹으려던 패를 급히 꺼냈다.
"해마다 황금 열 관에 비단 오십 필 그리고 명마 세 필을 내릴 것이오. 각 가문 혹은 세력마다 정삼품 관직 하나씩 내릴 것이고 북방으로 이주하면 전답을 줄 것이오."
마지막 사항은 완안덕명이 임시로 추가한 것이다. 원 황실은 지금 무척 혼란하여 유능한 자들이 병을 핑계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떠났다. 덕분에 완안덕명은 협상 책임자로서 꽤 큰 권한을 받았다.
완안덕명의 행동은 오해를 샀다.
'주원장을 견제하는군.'
'원 황실이 보기엔 주원장이 가장 껄끄러운가 보군.'
'주원장이 장사성과 진우량 밑인 줄 알았는데.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
"한림아와 유복통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 수하에 있는 백만 명교도와 고수들은 진우량과 주원장 중 누구 쪽으로 더 많이 갈 것 같소?"
도사가 자기 말을 잘라먹자 완안덕명은 화가 불쑥 치밀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내 제안을 고민할 시간 정도는 줘야 할 것 아니오?"
"용호도인이오. 전진교 지파 용호파 육대 전수자요. 당신보단 배분이 하나 높지."
비록 완안덕명이 전진교 장문인이지만, 배분으로 누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느껴지는 기운만 해도 완안덕명보다 훨씬 고수였다.
"내 생각인데, 주원장 쪽으로 많이 갈 것 같소. 서수휘나 팽영옥은 명교 소속이지만, 진우량은 명교에 정식으로 가입하지 않았소. 주원장은 명교 적익목 향주 직을 맡고 있소."
최영필은 손가락으로 자기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오판이구나. 빨리 서신을 띄워야겠다.'
장사성은 만만한 한림아를 공격할 작정이다. 장사성 본인은 오왕을 자처했고 진우량은 한왕을 자처했다. 주원장은 왕도 아닌 원수(元帥)로 자신을 칭했다.
장사성으로선 황제 호칭을 사용하는 한림아를 해치우는 게 군대 사기 올리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다.
장사성과 참모들은 두준도를 해치운 유복통이 곧 군사를 일으켜 원의 군대를 공격할 것임을 확신했다. 혼란한 내부를 빠르게 정리하려면 전쟁을 벌여 상대를 이기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주원장이나 진우량이나 군대에 명교도 비율이 높기에 직접 교주인 한림아에게 창칼을 겨누지 못한다. 게다가 한림아나 유복통이나 주원장 그리고 진우량을 자기 수하로 생각하기에 많은 군대를 동원해 수도가 빌 것이다.
소피를 핑계로 밖에 나간 최영필은 급하게 편지를 적어 수하에게 건넸다. 한림아와 유복통을 죽이면 수하 세력이 주원장 쪽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는 점만 적었다.
장사성은 수하가 주제넘은 말을 하는 걸 무척 싫어했다. 그래서 성격이 강직한 자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 대신 작은 공에도 큰 상을 내려 명리와 재물을 탐내는 자들이 많이 따랐다.
'완안덕명은 그릇이 너무 작구나.'
최영필이 돌아갔을 때 완안덕명이 자리에 일어서서 원 황실과 손잡으면 어떤 점이 좋은지 침을 튕기며 역설했다.
겨우 둘째 날이고 무림대회 내내 계속 회의를 진행할 것이기에 자기 속내를 최대한 적게 비쳐야 한다.
강한 주장을 하던 자가 설득당해 진영을 바꿔버리면 그 후부터 벙어리로 지내야 한다. 생각을 쉽게 바꾸는 자는 설득력을 잃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사람들이 귀담아듣지 않는다.
무인끼리 대결할 때 강한 공격이 실패하면 큰 위험이 따른다. 혀로 하는 싸움 역시 마찬가지다. 누구든 상대를 설득할 패를 몇 개씩 준비했을 것이다. 그걸 확인도 안 하고 자기 밑천을 털어버리는 행동은 협상에 적합하지 않다.
'그만큼 원 황실에 여력이 부족하다는 뜻도 되고.'
최영필은 웃음으로 속셈을 가린 채 토론에 끼어들었다. 칼을 들지 않은 전장도 무척 치열했다.
회의장은 세상의 축소판이었다. 각 세력이 천하의 패권을 놓고 부딪치기 전에 강호라는 조금 작은 세상을 통해 미리 충돌했다.
江湖 강호는
小天下 작은 세상이다
- 작가의말
원 황실 - 호흡기 떼기 일보 직전
장사성 - 돈 많고 식량 많고 장수 많음
진우량 - 60만 대군
주원장 - 20만 대군, 한동안 잠잠하게 지내 무시당하나 전투력이 강함
한림아 - 유복통이 대권을 휘두름. 두준도를 재상으로 임명해 유복통을 견제하려 했지만, 유복통이 두준도를 곧 암살할 계획임. 개판 5분 전.
이번 편은 꼭 필요합니다. 판을 펴는 역할이라고 할까요. 복수는 내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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