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피탄
잔월은 땅이 꺼질 정도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흑 장로. 이번에도 내가 이겼소."
당한백의 말에 잔월은 드디어 결심을 내렸다.
"죽여야겠소."
잔월이 등에 멘 계도를 뽑자 당한백은 걸음을 멈췄다. 지금까지 잔월은 계도를 뽑지도 않았고 사람을 죽인 적도 없었다. 도 쓰는 솜씨가 궁금했기에 길을 막은 자들에게 함께 달려들지 않았다.
"심영월상 상불변."
오랜만에 실제로 펼치는 월영도법에 앞서 가장 와닿는 구결을 읊었다. 마음에서 우러러서 혀를 타고 입으로 나온 소리는 귀를 통해 다시 마음에 깃들었다.
잡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잔월 마음에 보름달보다 더 둥근 달이 떴다.
"한 번 살려줬다. 그런데도 또 앞을 막는구나."
잔월은 계도를 오른손에 잡고 터벅터벅 걸었다. 이젠 공월이라고 이름 지은 공령환허를 펼치며 다가가자 삼백 명에 가까운 무인 모두 얼어붙었다.
눈에 보이지만,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생기도 없다. 잔월은 그간 얻은 깨달음을 녹여 공월이 하수한테도 잘 먹히게 바뀌었다. 공월을 간파할 수 있는 건 무극환허인과 비슷한 무공을 익힌 자 혹은 잔월보다 경지가 훨씬 높은 자밖에 없었다.
"요행을 바라지 말아라. 봤던 얼굴 안 잊는다."
계도가 시린 빛을 허공에 뿌렸다. 시린 빛이 뜨거운 생명을 잠재웠다. 생명이 스러지고 혼백이 떠나며 싸늘하게 식어가는 주검엔 욕심도 탐념도 남아있지 않았다.
계도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주검 하나 늘었다. 잔월은 처음 보는 얼굴은 그냥 지나쳤다. 죽은 자들은 한 번 혹은 두 번 본 얼굴이었다.
"몇 살이야?"
"열세 살입니다. 살려주세요."
"하루 사이에 한 살 먹었네?"
계도가 허공을 가르고 칼집으로 돌아갔다. 잔월과 세 번째로 만난 아이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하오문 짓인 것 같소."
칠신병과 대성당이 흩어져 도망치는 무인들을 쫓았다. 지금까지 잔월 눈치 때문에 죽이는 걸 자제했다. 그러나 잔월이 직접 칼을 휘두르자 신나서 쫓아갔다.
"무인들을 이쪽으로 보내고 뭔가 꾸미는 일이 있다는 뜻이오?"
[흑 장로만 알고 있으시오.]
당한백이 전음을 보냈다.
[제갈속은 제갈량과 같은 조부를 둔 제갈탄 후손이오. 심마해와 운룡곡은 각각 절진으로 세상과 격리되었소.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진법에 자꾸 문제가 생겼소. 제갈속은 운룡곡주의 부탁으로 제갈무후가 작성한 팔진도해를 얻으려고 하오문에 잠입했소. 무곡산장 정보를 얻으려면 하오문밖에 가능성이 없었소.]
[원 황실에 멸세교 출신 고수가 적지 않소. 둘 사이에 뭔가 왕래가 있는 게 분명하오. 내 생각엔 원 황실이 무인들을 이쪽으로 유인한 다음 멸세교와 손잡고 뭔가 하려는 것 같소. 여길 노릴 수도 있고 주원장을 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오.]
[왜 하필 주원장이오?]
[장사성은 그릇이 작고 진우량은 교만하오. 장사성이나 진우량을 죽이면 더 나은 자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소. 그러나 주원장을 죽이면 그 무리는 이끌만한 자가 없소.]
그때 대성당 무리가 도망쳐왔다. 이들은 무인이긴 하지만, 강한 적을 만나면 도망치는 데 부끄러움이 없었다.
"칠신병은?"
"덩치가 엄청나게 큰 자와 싸우고 있습니다. 상대는 암흑교 호법이라고 합니다."
잔월 신형이 먼저 사라지고 당한백도 땅으로 꺼진 듯 없어졌다. 삼불살은 수하들에게 자리를 지키라고 지시하고 욕설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달려갔다.
"취접께서 무슨 일이시오?"
"이 나쁜 새끼."
잔월을 본 취접이 다짜고짜 욕부터 했다.
"그새 더 잘생겨졌어."
"피차일반이오."
당한백은 암흑교라는 말에 한껏 긴장했는데 둘의 대화를 듣고 힘이 탁 풀렸다.
그러나 둘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상관없이 칠신병과 한대붕은 욕을 주고받으며 죽일 듯이 싸웠다. 싸우는 솜씨는 비등했고 욕은 칠신병이 압도적이었다. 한대붕은 기껏해야 칠신병이 했던 욕을 기억해 그대로 돌려주는 게 다였다.
"저기 무곡산장 애들 넘겨라."
"어쩔 생각이오?"
"어쩌긴. 멸세교 끌어들이는 미끼로 써야지."
"저들이 멸세교랑 무슨 상관이오?"
"멸세교에 가짜 천마가 나왔다."
'무극존자? 무곡산장 소속이라고 죽이려는 건가?'
"가짜 천마를 운룡곡주가 가둬두고 있긴 한데. 내 생각엔 오래 버틸 것 같지 않아. 그래서 저들을 갖고 함정 꾸미려고. 가짜로라도 천마 소리 들으려면 나보다 훨씬 강할 거야."
취접은 굳이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다.
"내게 더 좋은 생각이 있소."
"그래? 어서 말해 봐."
취접이 반색했다. 가짜라고 깎아내렸지만, 천마는 가짜마저도 부담되었다.
"멸세교와 싸우는 걸 수십 년 전부터 준비한 문파가 있소. 거기에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소."
"아미야?"
"아니오."
"소림? 거긴 아닐 텐데."
"아니오."
"그럼 어딘데?"
잔월은 잠깐 주저하다가 전음으로 말했다.
[무당파요.]
취접이 고개를 돌려 장성천에게 전음을 보냈다. 곧바로 장성천 입술도 바르르 떨렸다.
"안돼. 아미 정도는 되어야 해."
"아미 못지않은 곳이오."
취접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취접은 아예 들은 적도 없어서 장성천에게 물어봐야 할 정도로 무명의 문파였다. 잔월이 거짓말로 자신을 속인다고 여기진 않지만, 어린 나이여서 멸세교나 가짜 천마의 강함을 실감하지 못했다고 여겼다.
"강호의 법대로 하자."
[싸워서 이긴 자 뜻에 따르자는 말이오.]
당한백은 잔월이 강호를 잘 모른다는 걸 알기에 바로 전음을 날렸다.
"칠신병, 한 호법. 싸움 멈추시오."
그러나 눈이 빨갛게 충혈된 칠신병이나 눈동자가 흐릿하게 달아오른 한대붕이나 잔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장성천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한대붕의 붕산권이 장성천 몸을 타고 칠신병에게 전달되었다. 칠신병의 근본 없는 공격도 장성천 몸을 타고 한대붕에게 전달되었다.
한대붕은 말할 것도 없고, 칠신병 역시 무공 성취는 꾸준히 늘고 있으나 무공 이해는 전혀 발전이 없었다. 싸움을 말리는 것처럼 끼어든 장성천이 둘의 공격을 그대로 통과해 반대편에 전달하자 막아내지 못하고 뒤로 튕겼다.
"잘생긴 소협. 내가 만든 무공 어때?"
장성천은 잔월의 음양환을 흉내 냈다. 그러나 음양무계를 익히지 않았기에 효과가 아주 훌륭하진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대 기운을 다스릴 수 있다면 대단한 절학이 될 것 같소."
"삼 년 안에 해내고 만다."
이백 명이 넘은 암흑교 무인이 잔월과 취접을 빙 둘러쌌다.
"지친 자들에게 안식과 평안을 주는 암흑신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이 대결의 승자는 무곡산장 무인에 관해 패자의 의지를 강제할 권리를 갖는다."
잔월은 시작부터 공월을 펼쳤다. 자신이 공령환허에 월영도법을 섞은 무공이 과연 취접 정도의 고수한테도 먹히는지 궁금했다.
"뭐야? 뭘 어떻게 한 거지?"
다행히 취접 역시 내공이나 무공의 위력에 비교하면 무공 이해가 낮은 편이었다.
취접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한 잔월은 독고경천이 즐겨 썼던 오양괘각 초식을 칼로 펼쳤다. 잔월이 공격을 펼치자마자 취접이 반응했다. 파르르 떨리는 취접의 소매와 부딪힌 계도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몰려왔다.
'공격하면 공월이 먹히지 않는다.'
취접이 비칠거리며 잔월 주변을 빠르게 돌았다. 상체는 술 취한 사람처럼 몸이 종잡을 수 없게 흔들리는데 하체는 굳건했다. 그렇다고 하체만 주시하기엔 상체 움직임이 폭도 크고 부드럽기까지 했다.
"공간을 내주는 무공이구나."
주변을 돌며 방법을 찾던 취접이 갑자기 외쳤다. 본인이 깨달은 게 아니라 장성천이 전음으로 도움을 줬다.
"조심해라. 죽이긴 싫으니까."
아까 오양괘각의 초식을 받아칠 때와 달리 소매뿐 아니라 손도 부르르 떨렸다.
"접무차일(蝶舞遮日)이다."
취접 몸에서 숫자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나비가 생겨났다. 초식 이름처럼 태양을 가릴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실이다. 대부분 나비는 진짜다.'
잔월은 공월을 풀지 않고 취접의 초식을 주시했다. 눈속임으로 여기기엔 취접이 만들어낸 나비가 너무 진실해 보였다. 게다가 특별히 강한 힘을 품은 나비가 여럿 숨어있는데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네가 태양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수많은 나비가 잔월을 덮쳤다. 공간을 전부 내줘서 상대가 어딜 공격할지 몰라 헤매게 하는 공월과 정반대로, 취접의 접무차일 초식은 공간을 완전히 장악해 상대에게 반항할 틈을 주지 않았다.
'감각을 지우는 건 수단이고 목적은 공간을 비우는 것이었구나.'
취접의 외침에 잔월은 자신이 만들고도 지금까지 몰랐던 공월의 실체를 깨달았다. 시각을 제외한 감각을 지우는 건 수단이었다. 대결에서 공월은 공간을 상대에게 전부 내주어 어딜 공격해야 할지 모르게 하는 무공이었다.
'굳이 만월에 허와 실을 섞을 게 아니라 공월은 허로 하고 만월은 실로 해서 동시에 펼치는 게 훨씬 낫다. 양의심공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허와 실을 동시에 품은 만월을 공월과 만월로 나누자 수많은 깨달음이 잔월을 덮쳤다.
'해보자.'
공월이 잔월이 되었다. 잔월은 찰나만 존재하고 순식간에 공월과 만월로 바뀌었다.
"나는 달이다."
공간을 차지하는 게 양이라고 가정하면, 공간을 내주는 건 음이다. 잔월은 자신보다 내공도 많고 경험도 많은 취접과 굳이 공간을 다투지 않았다. 작은 틈도 놓치지 않고 스며드는 달빛처럼 취접의 나비가 미처 차지하지 못한 작은 공간을 점거했다.
취접의 나비가 차지한 곳은 공월의 허로, 그렇지 못한 곳은 만월의 실로 했다.
"야, 너 내가 준 약 토해 내."
취접은 양손과 소매에서 나비를 끊임없이 쏟아내며 억울함이 가득 실린 목소리로 외쳤다. 공월과 만월을 동시에 펼치느라 입을 열 엄두가 전혀 나지 않는 잔월은 물론, 취접이 지금 펼친 초식이 얼마나 대단한지 정확히 아는 당한백도 패배감을 느꼈다. 저 정도 초식을 펼치며 입을 열어 말할 자신이 전혀 없었다.
"내 초식에 상극이구나. 이거 무슨 초식이야?"
취접의 초식은 공간을 장악해 상대를 압박한다. 상대가 공간을 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반항하는 순간부터 힘 싸움이 된다. 취접은 무혈지체인 무극존자를 제외하면 힘 싸움에서 진다는 생각을 염두에 둔 적이 없다.
그러나 잔월은 공월과 만월을 함께 펼쳐 허와 실을 동시에 보여줬다. 허로는 가짜로 공간을 장악하고 실로는 취접이 놓친 공간을 지배했다.
실제로는 취접이 훨씬 많은 공간을 지배하지만, 잔월은 허와 실을 합쳐 모든 공간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접무차일에 전혀 밀리지 않는 이유였다.
취접이 실질적인 우위를 차지했지만, 잔월이 우위를 차지한 듯 느껴져서 접무차일에 이은 취접쌍비(醉蝶雙飛)의 공격 초식으로 이어가지 못했다. 취접이 무공 이해가 위력에 어울리게 깊었다면 잔월의 허실을 무시하고 공격을 감행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취접은 무공 이해가 어린 잔월보다도 한참 떨어졌다.
"초식을 거두자. 내가 셋 세면 동시에 거두는 거다."
취접이 하나둘에 이어 셋을 외치자 둘은 동시에 초식을 거뒀다.
貪 탐욕에
被呑 삼켜진 불쌍한 사람들
- 작가의말
“초식을 거두자. 내가 셋 세면 동시에 거두는 거다.”
취접이 하나둘에 이어 셋을 외치자 둘은 동시에 상대를 공격했다.
“약속을 어기다니. 내 절초 받아라.”
공중부양한 취접이 양팔과 다리를 쭉 뻗고 날갯짓을 흉내 냈다.
“꽃향기에 발정 난 나비. 취접허접추접권!”
취접 등 뒤에 호랑이가 나타나 어흥 외치며 잔월을 덮쳤다.
“사기꾼. 나비라며?”
“호랑나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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