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오문·제갈속
제갈속의 비난에 많은 자가 툴툴거렸다. 같은 글자여도 필법이 다르면 완전히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무극환허인을 훔쳐야 하는 하오문 일행은 다른 건 몰라도 무극환허인 다섯 글자는 꼭 익히려 했다. 그런데 제갈속이 수십 가지 필법으로 가르치는 바람에 수백 글자를 익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여기 자리 잡자고 했어?"
"모든 천리향 냄새와 거리가 비슷한 곳이다. 누가 먼저 움직여도 비슷하게 따라잡을 수 있다."
제갈속의 대답에 하오문 무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거 아닌 일에 감탄하는 걸 보니 제갈속이 왜 무식하다고 비난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흑백무상 냄새가 사라진 건 어떡하지?"
"셋이서 뭘 하겠어. 현재 강호에 나온 멸세교 무인들을 확인했는데 이쪽으로 향하는 움직임이 전혀 없다고 한다."
"그럼 멸세교 아니라 운룡곡이겠네?"
제갈속이 고개를 끄덕였다.
"칠신병은 우연히 합류한 게 틀림없어. 원래부터 종잡을 수 없는 존재잖아."
"흑백무상들이 여기로 몰려오지 않을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일행에 흑백무상이 있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아. 평소 가면을 쓰고 다니는 놈들이어서 신분을 숨길 때 가면을 벗기만 해도 돼."
"제기랄. 얼굴 드러내고 다니는 게 오히려 신분 감추는 거라니."
"편담(扁擔)."
멜대를 멘 자가 제갈속을 바라봤다.
"네가 할 일이 뭐지?"
편담은 멜대를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이름 대신 별명으로 부르기로 한 것 같았다.
"책을 들고 널 찾아서 확인받는 거."
편담은 일행 중 경공이 가장 뛰어났다.
"채도(菜刀)."
채도는 채소와 고기를 손질하는 커다란 칼을 말한다. 손과 양팔에 베이고 데인 흔적이 가득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완안덕명 얼굴에 칼자국 몇 개 만들어주는 거."
"포자(包子)."
포자는 고기나 채소로 소를 넣은 만두를 말한다. 포자로 불린 사내는 철을 두드려 만든 밀대를 들었다.
"채도를 도와 완안덕명 지키는 자들 상대하는 거."
"면도(面刀)."
면도는 수염을 깎고 머리를 다듬는 용도의 작고 날카로운 칼이다. 그러나 면도로 불린 사내 손에 들린 건 날이 낫만큼 긴 대형 면도칼이었다.
"은신술로 숨어있다가 채도와 포자가 도주하는 걸 돕는다. 둘이 실패하면 내가 완안덕명 얼굴을 긋는다."
"그래. 오늘 할 일은 완안덕명이 얻은 책이 무극환허인이 맞는지 확인하는 거다. 그리고 완안덕명이 서두르게 만드는 거지. 무극환허인 모두 얻으면 좋겠지만, 정 안되면 상편이라도 얻는 게 목표다."
"근데 가짜 책이면 어떡하지?"
제갈속이 머리를 긁적였다.
"난 무공 모르고 너흰 글자 모르고."
남은 자들이 제갈속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제갈속은 압박을 못 이기고 입을 열었다.
"일단 무극환허인은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그림만 있는 무극환허인 상편인데, 이것만 익혀도 개방 중견들과 비견하는 고수가 된다. 이걸 얻으면 우린 바로 철수다."
하오문 무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에 운룡곡에 소림사까지 있는 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게 이들 진심이다.
"무극환허인 상편은 글자로 된 것도 있다. 총 세 개로 하나는 공손무기, 하나는 공손용기한테 있다. 그리고 무극환허인 상편 하나와 하편은 공손무기가 은밀한 곳에 보관했다고 한다."
"그 외에 없는 게 확실해?"
"방금 말한 다섯 개는 확인을 끝낸 비급이다. 우리가 미처 모르는 게 더 있을 수 있지."
'제길. 이러고 보니 오히려 내가 저들보다 더 어렵구나. 저들이야 한두 개만 훔쳐도 되지만, 난 다 없애고 혹시 모를 다른 비급도 찾아야 하니까.'
"자. 일단 쉬도록 하고. 유조(油條 - 기름에 튀긴 밀가루 음식)는 천리향 냄새 계속 확인해."
얼굴이 빨갛게 익은 사내가 코를 킁킁거렸다.
"모두 안 움직이고 있어."
"무곡진은 밤에 약해지거든. 아무래도 다들 밤이 되길 기다리는 거겠지."
여름이 지나 가을로 접어들었지만, 낮은 여전히 길었다. 곤륜산의 밤은 매우 느리게 다가왔다. 빨리 일 끝내고 용담호혈을 벗어나고 싶은 하오문 무인들이나 오십 걸음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으며 들킬까 봐 걱정인 잔월 일행 모두 서산에 걸려서 알짱거리는 저녁해가 원망스러웠다.
"잠깐. 원 황실이 움직였다. 무곡진 방향으로 간다."
유조의 말에 제갈속이 머리를 긁었다.
"정보 정확해? 어제 무곡산장에서 나온 자를 잡고 비급 하나 회수했다는 거."
"환관, 숙수, 무사. 셋 모두 같은 정보를 보내왔다. 셋이 서로 정체를 모르니 동시에 황실에 매수당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무곡산장 정보는 내일이나 모레 돼야 오겠지?"
"못 올 수도 있다. 무곡진이 땅굴에도 영향을 끼쳐 쥐들이 그냥 죽을지도 모른다."
검은 덩어리를 진흙처럼 주무르는 자가 대답했다. 특별히 키운 쥐가 냄새만 맡아도 사족을 못 쓰는 먹이다. 재료 구하기 쉬워서 어디서든 쉽게 만든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무곡산장에 있는 하오문 소속과 혁장(革匠)으로 불리는 사내가 번갈아 음식으로 유혹하며 쥐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정식 하오문도만 아는 암문으로 적혀서 정작 글을 아는 제갈속은 읽을 수 없었다.
어제 황실은 무곡산장을 몰래 나오는 자를 잡고 비급 하나 얻었다. 그 비급이 무극환허인이 맞는지 알아내려고 하오문은 다소 과격한 계획을 짰다.
원래는 천리향을 통해 주요 세력들의 움직임을 보며 더욱더 조심스럽게 움직이려 했지만, 유일하게 첩자를 넣은 원 황실이 빠지면 가로채기가 힘들다. 하오문의 무력으론 다른 세력들이 비급을 얻어도 빼앗을 가능성이 없다.
"오늘 누굴 희생하기로 했지?"
"무사. 숙수랑 환관은 가족이 연루될 가능성이 크다. 무사는 가족과 어려서부터 헤어졌기에 들켜도 혼자 죽으면 된다."
"무극환허인을 얻으면 정말 좋은 세상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제갈속의 뜬금없는 질문에 하오문 무인들이 발끈했다.
"당연하지. 우리는 힘이 없어 지금까지 당하고 산 거야."
"그런데 왜 무극존자는 황제가 안 됐지? 지금도 봐봐. 진우량, 장사성, 주원장. 일대일로 싸우면 너희 중 누구 손에도 살아남기 힘든 자들이야."
"문주가 다 계획이 있을 거다. 우린 무식해서 모른다."
"멍청이들. 너희보다 무공이 강한 자들은 문주 심복이어서 이번 일에 제외됐어. 문주는 너희를 제거하려는 거야. 너흰 장로 부하잖아."
그때 지금까지 침묵하던 얼굴 검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제갈속. 분란 일으키지 말아라. 마지막 경고다."
"포주(抱主 - 기둥서방). 무극환허인 말고 다른 비급을 노리면 성공할 수 있다. 그걸로 장로를 문주로 옹대해라. 황실에 소림에 운룡곡에 온갖 강호 잡귀신이 모인 곳에서 헛된 욕심 부리지 말고."
하오문 무인들이 포주로 불린 사내를 쳐다봤다. 얼굴 검은 사내는 이마를 찡그리고 고민에 잠겼다.
"무곡산장 정보를 받을 때까지 원래 계획대로 간다. 무곡산장 정보를 확인하고 어떻게 할지 정한다."
제갈속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오는 내내 흔들었지만, 이들은 귀를 막고 제갈속 말을 계속 무시했다.
그러나 정작 무곡산장 근처에 도착하니 마음이 흔들렸다. 소림 말고 하후가나 하북의 팽가도 하오문이 감히 건드리기 힘든 세력이다. 오직 근황이 좋지 않은 원 황실만 첩자를 믿고 어떻게든 가로채 보려고 할 뿐이었다.
"잠깐. 하후랑 위지랑 팽가 그리고 소림도 움직였다."
유조의 말에 출발하려던 넷이 주춤했다. 원 황실에 몰래 잠입해 완안덕명 얼굴에 칼자국 내고 비급까지 빼 오는 건 성공을 기약하기 힘든 일이다. 넷 모두 제갈속이 계획을 바꾸길 원했다.
"안 움직인 건 남궁인가?"
"대장로와 소가주 둘만 움직였다. 애초에 가로채기만 염두에 둔 게 틀림없다."
제갈속이 손가락으로 자기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계획 취소다."
편담을 비롯한 넷이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유가 뭐지?"
포주의 추궁에 제갈속이 대답했다.
"큰 규모로 온 다섯 세력이 동시에 움직이면 자잘한 무리도 바로 움직인다. 지금 움직이면 다른 자들과 마주칠 가능성이 크다."
"변수가 너무 많구나."
포주가 한탄했다.
"우리까지 치면 넷이지. 남궁, 운룡곡, 철권문."
"남궁은 주원장 편이고 철권문은 장사성 편이고. 우린 뭐지?"
"문주는 진우량 편인데 장로는 주원장 편이지. 우린 장로 부하니까 주원장 편이어야 하지 않을까?"
제갈속은 하오문 무인들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제갈속. 널 믿어도 되겠냐?"
"하오문과 거래하면서 내가 실수한 적은 없을 텐데."
"네 목적이 뭐냐?"
"뭐. 어차피 너희 도움 없어도 혼자 하려고 했던 일이다. 제갈무후가 쓴 팔진도해(八陳圖解)가 내 목표다."
"그럼 우리는?"
"편담은 봉법을 익혔으니까 태산도인의 담산타(擔山打)가 좋을 거야. 채도는 무거운 칼을 쓰니 벽산도(闢山刀)가 제격이고."
제갈속은 각자에게 어울리는 무공을 하나씩 읊었다.
"포주는 아무래도 편봉검(偏鋒劍)이 어울리겠지."
"너 무공 모르는 거 맞아?"
"무공 못 익히는 거지 문외한은 아니야. 무극환허인처럼 대단한 무공이 아니면야 너희한테 구결 해석도 해줄 수 있지."
제갈속의 말에 하오문 무인들은 마음이 동했다. 그러나 누구도 함부로 입을 못 열고 포주 눈치만 봤다.
"장로는?"
제갈속이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장로는 나이 많으니 초식이 강한 무공을 익혀야 해. 심법이나 오래 익혀야 하는 무공은 아무 쓸모 없지. 금나수 중에서도 유명한 첨의첩(沾衣貼)이 좋겠지."
"네 계획을 말해봐."
잔월은 포주가 장로 무공을 물을 때부터 이미 끝났음을 알았지만, 하오문 다른 무인들은 그제야 포주가 설득되었음을 알아차리고 주먹을 꽉 쥐며 기뻐했다.
"난 말이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야. 무곡진 따위는 내게 아무 문제도 아니란 말이지. 너희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할게. 보통 진법은 생로를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나는 사로를 통해 움직일 수 있다. 무슨 뜻이냐면."
제갈속이 양팔을 넓게 펼치며 말했다.
"우리가 무곡진을 뚫고 들어가는 곳은 누구도 없을 거라는 말이야."
"다른 자들이 동시에 움직이는 지금이 적기구나."
포주 말에 제갈속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시킨 대로 하면 진법을 무사히 통과한다. 바닥에 그림을 그릴 테니까 모두 잘 기억해둬라."
그때 잔월 귀로 전음 하나 들려왔다.
[일이 끝난 다음 제갈속을 죽인다. 내가 신호 주면 네가 손 써라.]
下五門 하오문과
諸葛續 제갈속
- 작가의말
글자를 모르는 자에게 글씨는 이해하기 힘든 그림일 뿐입니다. 그리고 필체가 다르면 글자가 아예 다르게 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문을 배운 적 없다면 웬만큼 똑똑한 사람도 힘든 일입니다.
무곡산장은 부당한 방식으로 모은 비급이 많습니다. 무극환허인을 탐낸 것도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 거죠. 천룡팔부의 모용가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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