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원
취접은 단순한 자다.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한다. 그리고 충동적이기도 하다. 마음에 드는 기녀와 혼인한다고 난리 부린 적도 있고 처음 보는 잔월에게 소환단에 비견할 정도로 귀한 약을 건네기도 했다.
그래서 이 무리의 결정권자는 장성천이였다.
[우사. 승부를 내기 어렵습니까?]
[나보다 약하다. 그런데 공격할 수 없구나.]
[아미까지 동행합시다. 아미를 설득해 함께 멸세교를 상대하는 게 좋겠습니다.]
암흑교 무인들이 합류하여 규모가 오백 명에 육박했다. 게다가 전과 달리 길을 막고 무곡산장 무인 하나라도 어떻게 잡아보려는 자들을 사정없이 죽였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방해꾼이 적어졌다.
"취접은 신께 기도하지 않습니까?"
암흑교 무리는 시간에 맞춰 매일 두 번씩 모여서 기도를 올렸다. 멸세교나 광명교와 달리 암흑교는 서역인이 많고 무척이나 신실했다. 아주 가끔 제사 비슷한 행위를 벌이는 광명교나 아예 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않는 멸세교와 달리 암흑교는 신을 향한 믿음이 굳건했다.
"몇 번 해봤는데 내가 원하는 걸 전혀 안 들어주더라고. 그래서 포기했다."
"몇 번 더 하면 들어줄지도 모른다."
칠신병이 끼어들었다. 무곡산장 무리 중 충의대 출신과 황궁 사람들은 대부분 암흑교와 함께 기도를 올렸다. 길을 재촉할 때도 암흑교 무인한테서 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믿음을 키웠다.
칠신병 역시 무공 구결을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신에게 빌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 초식 배우러 다닐 때처럼 실망할까 봐 주저했다.
"기도로 해결한다면 대법왕은 무극존자보다 더 세겠네? 신께 빌어 소용없어. 신은 그저 네가 뭔가에 열중할 때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줄 뿐이야. 원하는 걸 이루려면 네가 노력해야 해."
"노력해도 안 되면 어떡해?"
칠신병이 어려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노력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그럼 욕심 버려. 난 서른 이후 무공 수련을 멈췄다. 그래도 계속 강해졌어."
칠신병이 혹한 표정을 짓자 잔월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칠신병. 남의 길이 편해 보이는 건 네가 그 길을 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가던 길을 네게 익숙한 방식으로 걸어라."
"야, 한대붕. 나랑 싸우자."
칠신병에게 익숙한 길이라면 싸우면서 배우는 거다. 그러나 기도를 올리는 데 열중인 한대붕은 칠신병의 외침에 알은체하지 않았다.
"칠신병. 한대붕은 권법을 쓰기에 네 상대로 적합하지 않다. 차라리 나무로 만든 칼이나 검을 들고 대성당 무인과 싸우는 게 훨씬 수련에 도움 될 거다."
대성당 무인의 초식은 대부분 실전으로 다듬어져 간결하고 위력적이었다. 복잡한 초식을 펼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칠신병에게 알맞았다.
칠신병은 나무를 깎아 무기를 만든 후 대성당 무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갔다. 곧 작은 공터에 모여서 투덕거리며 싸움을 벌였다. 격식을 전혀 안 차리고 요해도 서슴없이 공격하기에 대련보다는 싸움이라는 표현이 훨씬 어울렸다.
"잘생긴 놈. 멸세교 상대할 때 도와줄 거지? 너한테 준 그 약 엄청 귀한 거야."
"특별한 사정 없으면 돕겠소. 무당과도 약속한 게 있으니."
"그런데 무당이 정말 그렇게 강해?"
"거기 장군보라는 도사가 있는데 무극존자의 봉황내의도 피해 없이 막아냈소."
취접 태양혈에서 혈관이 불뚝 솟았다. 취접은 어마어마한 내공과 취접장이라는 위력이 강한 장법이 장점이다. 두 장점 모두 무혈지체를 이룬 무극존자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무혈지체여서 내공을 끝없이 쓸 수 있고 봉황내의 초식은 취접장 못지않은 위력을 보인다.
그래도 내심 천하에서 두 번째는 확실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봉황내의를 혼자 막아낸 자가 있다고 하니 호승심이 생겼다.
"백원선사도 봉황내의 초식을 막아냈다고 들었소."
"백원선사도? 하긴, 너도 애송이 적에 내 첩경을 받아낸 적 있었으니까. 받아낸다고 무극존자만큼 강한 건 아니겠지."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자는 서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덕분에 험한 산길을 재촉하면서도 큰 사고 없었다. 그러나 아미에 도착했을 땐 대부분 사람이 탈진했다.
길을 재촉하느라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하지 못했고 밤마다 요행을 바라고 몰래 달려드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튼튼한 신체를 타고났거나 경지가 최소 장성천 정도는 되어야 멀쩡할 수 있었다.
"당문의 어린 후배 한백이 인사드립니다."
"암흑교 우사 취접이오."
"반갑소. 여긴 복호사 압호 스님이오. 다음 대 아미 장문이오."
잔월까지 다섯이 백원암에 모였다.
"멸세교를 아미로 유인해서 섬멸하자고? 동의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러고 싶어도 아미엔 그럴만한 지형이 없소."
백원선사가 단칼에 거절했다.
"왜 싫다는 거요?"
"아미는 그저 있을 뿐이오."
취접은 답답한지 뜨거운 찻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멸세교가 득세하면 세상이 지옥이 되오. 살인 방화를 서슴지 않을 것이고 수천 년 이룬 모든 것을 다 파괴할 것이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할 때도 폭군이 세상을 망칠 거라고 했소. 한이 멸망하고 수많은 나라로 갈라져서 싸울 때도 세상이 끝났다고 했소. 당이 망하고 군벌들이 전쟁을 멈추지 않을 때도 지옥이라고 했소. 그러나 세상은 그대로였소."
"그 과정에 죽어간 자들이 불쌍하지도 않소?"
대화만 들으면 취접과 백원선사가 바뀌어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세상의 흐름은 정해졌소. 억지로 막거나 비트는 건 안 되오."
"아미는 겁쟁이요?"
백원선사가 허허롭게 웃었다.
"필요할 때 한 손 거들 것이오. 그러나 아미에 함정을 파고 멸세교를 유인하는 건 안 되오."
"우선, 아미라는 허명 때문에 함정을 의심할 거요."
취접은 붉으락푸르락 화를 내면서도 반박하지 못했다.
"다음, 아미는 많은 사람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오. 몰래 함정을 만드는 건 너무 어렵소. 그렇다고 갑자기 출입을 막는 건 너무 속 보이는 일이오."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하오. 무당에서 온 편지요."
취접은 백원선사가 내공으로 띄워 보낸 편지를 받아서 단숨에 읽었다. 모르는 글자가 꽤 있었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 방해되진 않았다.
"이걸 믿어도 되겠소? 강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문파가 수십 년 전부터 지금 상황을 예견하고 함정까지 준비했다는 걸 말이오."
"그 문파가 천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믿음이 가오."
"강호의 법대로 하는 건 어떻소?"
"나도 주먹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오."
천하에서 사대 고수로 추앙받는 넷 중에 무극존자가 가장 강하고 검선이 가장 약한 건 이미 정론이었다. 검선이 실질적으로 무공 위력보단 완성을 택한 것도 있고 십수 년 동안 갇혀서 전혀 활동하지 못했기에 명성도 한참 뒤처졌다.
그러나 취접과 백원선사가 누가 더 강한지는 아직 결론이 없었다. 취접은 물론 마음 수양이 얕지 않은 백원선사도 호승심을 누르지 못했다.
처음부터 무당에서 온 편지를 보여주고 좋게 얘기해도 되는데 굳이 취접 성질을 긁은 것도 손 한번 섞어보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백 세에 가까운 백원선사는 한참 선배로서 체면 떨어지게 먼저 싸우자고 말할 순 없었기에 취접을 은근히 자극했다.
"두 번 겨루는 건 어떻소. 먼저 내공을 배제하고 초식만 겨루는 거요. 그다음엔 취접의 유명한 첩경을 내가 받아보겠소."
"내가 내공 믿고 날뛰는 무식한 놈이라고 여기는 것 같은데. 초식에서 지면 두 번째 대결과 상관없이 내가 진 거로 하겠소."
다섯은 백원암 지하 연무장으로 내려갔다. 대부분 무공을 비밀로 하지 않는 아미지만, 장문인에게만 전해지는 특별한 무공도 있었다. 그래서 장문인에겐 남들의 눈을 피할 연무장이 하나 필요했다.
"내공을 묶겠소."
백원선사나 취접 정도가 되면 가끔 의도하지 않아도 내공이 알아서 움직인다. 백원선사는 특별한 방법으로 내공을 단전에 묶어버렸다.
취접은 내공 묶는 게 백원선사보다 조금 느렸다. 내공 다루는 솜씨가 부족한 게 아니라 취접의 내공이 훨씬 많고 성질도 흉포했다. 그러나 취접은 처음부터 밀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백원선사는 시작부터 통비권을 펼쳤다. 내공이 없어 그 위력이 약해졌지만, 양팔로 다른 초식을 펼쳐 상대를 혼란하게 했다. 위력만 따지자면 차라리 통배권이 낫지만, 내공을 묶고 대결하는 건 힘이 아닌 초식에 대한 이해를 겨루는 것이다.
"호접천운(蝴蝶穿雲)이오."
취접은 내공을 묶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현란한 초식을 펼쳤다. 서른 중반은 무인으로서 몸이 가장 좋은 시기다. 취접은 아직 불혹까지 몇 년 남아 육체적으론 백원선사를 압도했다.
내공을 묶은 탓에 취접의 소매는 얌전했다. 양손만 구름 사이를 노니는 나비처럼 표홀하게 움직이며 백원선사의 눈을 현혹했다.
"원환비(猿環譬)와 노원채도(老猿採桃)요."
백원선사는 왼팔로 원환비의 수비 초식을 펼쳤다. 왼팔 하나로만 몸 전체를 수비하는 특이한 초식이었다. 그리고 오른손은 나비를 잡으려고 분주히 움직였다.
늙은 원숭이는 조심성이 많다. 그래서 늘 먹던 복숭아를 딸 때도 무척 조심한다. 노원채도는 그러한 모습을 보고 깨달은 초식으로, 구경하는 자들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비를 조심스럽게 따라다녔다.
백원선사는 확실히 잡아낼 자신이 없어 노원채도의 최후 일격을 날리지 못했다. 취접도 백원선사의 원환비 수비와 노원채도의 방해를 뚫지 못했다. 취접 양손과 백원선사 오른손이 한참이나 술래잡기를 했다.
"접채화(蝶採花)요."
취접이 먼저 초식을 바꿨다. 내공 없이 초식을 펼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취접이어서 같은 초식을 오래 펼치니 성질이 뻗었다. 그래서 속임수를 섞은 호접천운 대신 공격적인 초식 접채화로 바꿨다.
"탕추천(蕩秋千)과 권추목(拳推木)이오."
탕추천은 그네타기를 말한다. 권추목은 말 그대로 주먹을 쥐고 나무를 두드리는 모습이다. 눈이나 목울대를 비롯해 약한 부분만 노리는 취접의 손끝을 그네처럼 흔들리는 왼쪽 손바닥과 망치처럼 앞뒤로 움직이는 오른 주먹으로 막아냈다.
잔월은 취접의 찌르기 위주의 공격에 백원선사가 맞불로 대응하는 데 크게 감탄했다. 탕추천은 수비 범위가 무척 좁은 초식이고 권추목은 공격 초식이다. 그런데 백원선사는 상대 초식을 정확히 파악하여 수비 범위가 좁은 탕추천으로 취접의 오른손을 막아내고, 공격 초식인 권추목으로 취접의 왼손과 부딪혀갔다.
반면 취접은 점점 짜증이 치밀었다. 통비권은 과장 좀 보태면 초식이 만 개 넘는다. 취접장도 초식이 많은 편이지만, 접무차일처럼 내공 없으면 못 펼치는 초식이 대부분이다.
"제길. 졌소."
결국, 갑갑함을 참지 못하고 취접이 패배를 인정했다. 두 번째 대결을 준비하는 취접의 몸에서 어느새 단전에서 풀려난 내공이 넘실거렸다.
거리를 두고 구경하는 잔월조차 소름이 돋을 정도로 흉포한 내공이었다.
蝶 나비와
猿 원숭이의 대결
- 작가의말
취접은 백원선사가 내공으로 띄워 보낸 편지를 받아 단숨에 읽었다.
[이 편지는 무당에서 시작하여...]
‘제길, 당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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