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세·멸강호
화룡표국에서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비둘기 다리에 매단 죽통에는 수백 명 무인이 화산으로 향한다는 정보가 적혀있었다.
"잘하는 짓일까? 완안덕명이 알면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다."
서천주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친. 소자 불민하여도 근래 작게나마 깨우친 거 있습니다. 뭐가 옳은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땐 양심을 따르면 됩니다."
서천주는 부모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을 치료한 소년 얼굴이 떠올랐다. 매일 꿈에 독고경천이 나타나 심장에 검을 꽂고 소년이 나타나 치료해준다. 검을 꽂는 독고경천은 맑은 눈이고 치료해주는 소년은 눈에서 피를 흘렸다.
"너희 둘은 당분간 외가에 가 있거라. 표국은 내가 지킨다."
비둘기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쌍둥이였다. 둘은 성취가 너무 빨라 반년 동안 초식 수련을 멈추고 외공 수련에 몰두하기로 했다.
외공 수련은 육체 단련을 통해 몸과 정신을 결합하는 과정이다.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둘은 수련 시간이 짧았다. 남은 시간은 흑표랑 함께 놀러 다니거나 비둘기 집이 있는 곳에서 혹시 모를 서신을 기다리는 게 일과였다.
"종을 울려."
평소 같으면 네가 왜 명령 질이냐고 한참 다퉜을 테지만, 둘은 일의 경중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 종을 세게 치고 바로 천희연이 있는 집으로 달렸다.
"사질, 무슨 일이야?"
"야, 우린 아미 제자야. 네 사질 아니라고."
잔월의 칠 사매는 쌍둥이와 동갑이었다. 다른 제자는 안 그러는데 칠 사매만 쌍둥이를 사질이라고 부르며 부려먹으려 했다.
"종리 아저씨, 여기 편지."
장문인 종리형을 보자마자 쌍둥이는 편지를 건넸다. 편지를 읽은 종리형은 남은 화산 제자들을 살피며 이마를 찌푸렸다. 검선 일행은 대도로 갔고 독심호리는 개봉에 있다. 용호도인 역시 인근 문파와 친분 다지려고 사흘 전 화산을 떠났다.
종리형 자신과 월영고랑을 제외하면 수백 명과 난전을 벌이면서도 목숨 보전할만한 자가 보이지 않았다.
'나랑 월영 사형으론 부족하다.'
월영고랑은 독고경천을 대신하여 대사형이 되었다. 다음 대 장문인 자리를 잔월에게 넘기기 위함이었다. 모든 방면에서 다음 대 장문인은 잔월 빼고 생각할 수 없지만, 가끔 명분이라는 놈이 발목을 심하게 잡기도 한다.
괜한 분란을 없앨 생각에 잔월 사부인 월영고랑이 대사형으로 임명되었다.
'내자불선(來者不善)이구나.'
상대는 수백 명이 옥녀봉 아래에 진을 치고 백 명 정도 사람만 위로 올라왔다. 한 명도 놓치지 않겠다는 속셈이 틀림없었다.
"장문 사숙. 제가 서북쪽에 길을 트겠습니다."
당선령은 가죽으로 만든 온갖 주머니를 몸에 달았다. 대부분은 암기고 일부는 화산에서 직접 만든 독이었다.
임신으로 무공을 쓸 수 없는 천희연이나 아예 무공을 익히지 않은 남궁청영과 달리 당선령은 흑룡곡에서도 고수 축에 들었다.
'당 대협 이복동생이라고 했지. 다치거나 죽으면 내 목숨이 남아나질 않겠는데?'
종리형은 위급한 상황에 너무 침착한 자신이 이상했다.
'왜지? 왜 전혀 조급하거나 걱정되지 않을까?'
"질부(姪婦 - 조카며느리)는 몰래 내려가서 포위망을 뚫으시오. 구멍이 생기면 헷갈리지 않게 올빼미 소리로 신호 주시오."
"희영, 희웅. 너희 둘은 싸울 수 없는 사람을 지킨다. 당 소저가 신호 주면 사람들을 보호해 그곳으로 간다."
"남은 사람은 희영 희웅이 떠난 다음 적들이 쫓지 못하게 막다가 적당한 때에 뒤를 따르시오. 나랑 대사형은 난전에 적합하니까 뒤를 끊겠소."
당선령은 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서북쪽으로 향했다. 나무가 무성하여 매복하기 딱 좋은 지형이다. 반대로 같은 편이 죽어도 알아차리기 힘들다.
당선령은 사행보(蛇行步)로 느리게 움직였다. 사행보는 사람이 걷는 습관과 완전히 다르다.
사람은 습관적으로 예측한다. 다음엔 저렇게 움직일 거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상대가 나타날 법한 곳에 집중한다. 그러나 사행보는 인간의 보행 습관과 완전히 달라 예상했던 지점에 나타나지 않는다.
설사 들켜도 상대를 긴가민가 헷갈리게 하는 게 사행보다.
'오합지졸들.'
당선령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위를 차지했다. 상대가 흑룡곡의 무인이거나 대단한 사냥꾼이라면 냄새를 들킬 수도 있다. 그러나 당선령은 상대가 오합지졸임을 확신했다.
과연, 당선령이 바람을 등졌는데도 누구 하나 냄새를 잡아내지 못했다. 당선령은 화산에서 모은 독초 가루를 천천히 풀었다.
해약 만드는 법을 모르기에 강한 독은 아예 만들지도 않았다. 사냥할 때 짐승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약한 독이었다.
"에취!"
재채기 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뭐 하는 거야? 재채기나 해대고."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뭘."
"이러니 하오문 따위한테 밀렸지. 의혈맹 이젠 끝물이라고 강호에 소문 자자하다. 화산을 없애 의혈맹 명성을 다시 세워야 한다. 그러니 절대 방심하지 마. 지금부터 소리 내는 놈은 내가 직접 목을 벤다."
인체는 신비하다. 감각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감각들이 평소보다 예민해진다. 그런 상황에 익숙한 자라면 괜찮지만, 대부분은 훨씬 예민해진 감각에 불편과 혼란을 느낀다.
후각이 마비된 자들은 갑자기 강화된 촉감에 괴로웠다. 살갗을 스치는 풀이나 낙엽에 너무 간지러웠다. 간지러움을 참는 데 집중하다 보니 주변을 살필 여력이 사라졌다.
탄지공으로 화엽표를 날려 목숨 하나 취한 당선령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비록 상대 후각을 마비시켜 피 냄새를 못 맡게 했지만, 독 범위를 벗어나 후각이 멀쩡한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서두르지 말자. 하나씩 착실하게 제거한다.'
첫 실전이지만, 당선령은 떨지도 않고 다급하지도 않았다. 탄지공으로 날린 화엽표가 상대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바로 죽진 않지만, 전신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다.
당선령이 열한 번째 무인을 제거할 즈음하여 백 명에 가까운 무인이 화산파 건물에 도착했다.
"멸세교에서 왔다. 오늘 강호를 지운다."
'각 문파 고수를 개봉과 대도로 유인했구나.'
고수가 자리를 비운 사이 각 문파를 공격하여 강호의 근간을 흔들려는 생각이었다.
'우리가 막을만한 전력이 절대 아니다.'
종리형은 목덜미가 뻐근해 왔다.
'공손평천은 어디 있지? 공손평천의 행보가 여기서 끝일 것 같지 않은데.'
종리형은 순수한 사람이다. 그러나 순수한 건 성격뿐이다. 독심호리 다음으로 머리가 영민한 자로 뭔가 어마어마한 낌새를 알아챘다. 그러나 흐릿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멸세교 무인들이 덮쳐왔다.
[수비 위주로 간다.]
월영고랑은 종리형의 전음을 무시하고 적진으로 파고들었다. 일방적으로 수비하는 것보다 한둘이 적진을 휘저어야 한다. 월영고랑이 선수를 치지 않았다면 아마 종리형이 위험을 무릅썼을 것이다.
'그간 제자한테 많이 배웠다.'
월영고랑은 단무전과 마찬가지로 이론적으론 완벽에 가까운 자였다. 그러나 단무전이 지금까지도 기성해를 대성하지 못한 걸 보면, 이론만 잘 알아선 고수가 되기 힘들다.
다행히 월영고랑은 단무전과 달리 이론뿐 아니라 실제 수련도 꽤 잘했다. 잔월과 월영심법 구결을 상의하며 자신과 다른 견해를 받아들여 점점 실전적으로 무공을 바꿔갔다.
'월망(月芒).'
월영고랑은 적에게 둥근 달을 보여줬다. 그리고 뾰족하고 치명적인 가시를 그림자에 숨겼다. 수비 위주로 가는 척하며 기회만 생기면 치명적인 공격을 상대에게 선물했다.
무공 이해보단 깊은 내공과 강한 위력의 초식만 추구하는 멸세교 무인들에겐 월영도법이 제격이었고 월영고랑과 같은 무인이 천적이었다.
"후, 합!"
종리형은 검법보다 권법에 자질이 출중했다. 형의육합권의 백학서거(白鶴西去) 초식을 자하신공 내공으로 펼쳤다.
'영기(盈氣).'
종리형 몸이 내공으로 꽉 찼다. 내공이 잔월보다 적지만, 종리형은 내공 익히기에 적합하지 않은 체질을 타고났다. 그릇이 작아서 몸에 내공이 넘쳤다.
'발!'
잔월에게서 배운 방식으로 넘치는 내공을 혈도로 쏘아냈다. 종리형의 정직한 초식을 받아내던 멸세교 고수가 느닷없이 튀어나온 내공에 눈을 맞았다.
눈알이 터진 멸세교 고수는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굴렀다. 종리형은 독고경천이 내공 다스리는 솜씨가 부족한 강유에게 만들어준 회수식을 펼쳤다. 밖으로 넘치던 내공이 전부 단전과 그 주변으로 돌아갔다.
'야마분종(野馬分鬉)'
쓰러진 자의 마무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종리형은 다른 무인을 상대했다.
"양양권."
음은 수비고 양은 공격이다. 양양권은 둘 다 공격하자는 뜻이다.
희영의 외침에 희웅이 공격 초식인 노원채도를 펼쳤다. 백원선사가 취접 상대로 펼쳤던 노원채도보다 조심성이 덜하고 공격성이 강했다. 다행히 상대도 취접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 수준의 무인이었다.
노원채도를 막으려고 무인이 움직이자 희영이 마찬가지로 노원채도 초식을 펼쳤다. 희웅의 양손은 심장과 목을 노렸고 희영의 양손은 단전과 음낭을 노렸다.
무인이 가까이 온 손을 막으려 하면 손이 아주 자연스럽게 움츠러들었다. 다른 공격을 막으려 이동하면 언제 움츠렀나시피 다시 강한 공격을 펼쳤다.
육체적인 힘이 부족하지만, 경맥을 어린 나이에 타통한 덕분에 내공 수련을 일찍 시작했다. 부족한 힘을 내공으로 보충해 성인 못지않은 위력적인 공격을 펼쳤다.
결국, 목과 음낭을 맞은 멸세교 무인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쓰러졌다. 바닥에 쓰러진 무인의 머리로 주먹 크기의 돌이 날아갔다. 퍽 소리와 함께 머리가 깨진 무인이 조금 꿈틀거리다가 숨을 멈췄다.
그때 무인 하나가 종이 몇 장 들고 나타났다.
"자, 생포해야 할 자들 얼굴이다. 나머진 그냥 죽여도 된다."
천희연, 쌍둥이, 남궁청영, 당선령 그리고 월영고랑 얼굴만 있었다. 뒷짐 지고 구경만 하던 자들이 드디어 움직였다.
'월광사지(月光瀉地).'
월영고랑의 칼이 땅을 빈틈없이 비추는 달빛처럼 몸 주변을 물 샐 틈 없이 감쌌다. 월영고랑이 펼친 수비막을 뚫으려던 병장기들은 하나같이 부러지거나 이가 생겼다.
빠름과 강함과 부드러움이 적절하게 섞인 월광사지는 힘만 세고 기교가 부족한 멸세교 고수들의 공격에 쉽게 뚫리지 않았다.
그러나 월영고랑의 내공은 종리형이나 독심호리처럼 심후하지 않다. 오래 버티긴 힘들었다.
상대와 주먹을 부딪친 종리형은 입으로 내공을 토해냈다. 영기 상태에서 강한 충격을 받으니 넘치는 내공을 잡아둘 수 없었다.
이대로는 반 각도 버티기 힘들다. 종리형은 원기를 끌어올려야 할지 고민했다.
"왔다!"
멸세교 고수 세 명의 합공을 요리조리 피해내던 쌍둥이가 기쁨에 겨워 소리 질렀다. 어마어마한 기운이 백 명 가까이 되는 멸세교 고수를 덮쳤다.
滅世 멸세교는
滅江湖 강호를 없앨 음모를 꾸몄다
- 작가의말
야마분종(野馬分鬉).
야마 - 머리를 칭하는 표준어.
분 - 나누다.
종 - 갈기 혹은 상투.
최종 해석 : 가르마를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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