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륜법왕·구인류
잔월은 쩔그럭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팔다리가 뒤로 모여 쇠사슬에 묶였다. 네 개의 사슬은 잔월 몸통만 한 커다란 금속 구슬에 연결되어 있었다. 팔다리가 가깝게 모여 힘을 쓸 수 없고 내공도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횃불이나 등잔 따위가 없는 밀실로 보이는데 보름달이 뜬 밤보다도 밝았다. 바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공기는 차고 상쾌했다.
"대단하군. 환멸대수인의 절맥수(截脈手)로 점혈했는데도 벌써 회복하다니."
절맥수는 점혈보다 한 수 위인 수법이다. 혈도를 짚는 게 아니라 맥 전체를 제압하는 방식으로, 펼치기보다 절맥수를 푸는 게 훨씬 어려웠다.
물론, 잔월은 절맥수가 뭔지도 몰랐다. 그저 꽤 대단한 점혈법이거니 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목숨 구해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으시오?"
대륜법왕이 쓴웃음을 지었다.
"독편복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묶었다. 아닌 걸 확인하면 풀어주려고 했는데 잊을 수 없는 얼굴이어서 말이지."
대륜법왕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독고 대협은 운명했으니 조카인가?"
"자식이오."
숨기고 싶지 않았다. 비굴하게 부자 관계를 부정해서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보통은 본인으로 오해하던데. 조카인지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이었소."
"독고 대협이 운명하는 모습을 직접 봤다."
예상치 못한 말에 속에서 뜨거운 것이 불쑥 치솟았다.
"독고 대협이 사람 하나 안고 어찌 백이 넘은 추적자를 뿌리칠 수 있었겠는가. 내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떠나지 않다가 독고 대협 대신 흔적을 남기며 추적자들을 유인했다."
잔월은 비록 무극존자처럼 상대의 진실을 헤아리는 능력은 없지만, 숨겨진 진실이 있음을 확신했다. 조금 머리를 굴리니 당시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질 것 같으니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완안덕명에게 받기로 한 게 있어서 까마귀처럼 주변을 서성거렸겠지.'
잔월의 추측은 진실에 가까웠다.
밀종은 크게 태장종과 금강종이 있었다. 태장종이 먼저 생겼으나 금강종에 밀려 무척 위축됐다.
그때 평소 왕래가 있던 완안덕명이 검선을 제압하는 데 도움을 주면 황제께 주청해 태장종을 지원케 한다고 꼬드겼다. 대륜법왕은 완안덕명을 향한 황제의 총애가 얼마나 큰지 알기에 선뜻 승낙했다.
그러나 검선의 실력을 직접 확인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대륜법왕 정도 되면 검선이 시종 절반 정도의 실력만 보여줬다는 걸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독고경천을 봤을 때만큼 놀랍진 않았다. 이립 정도로 보였는데 마치 사지를 꼭꼭 묶인 상태에서 맹수를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두려움을 못 이겨 태을전을 떠났지만, 결과가 궁금하여 주변을 서성였다. 그러다 독고경천이 도망치는 걸 보고 도움을 줬다.
독고경천에게 감복한 게 아니라 속 좁은 완안덕명이 중간에 떠난 걸 트집 잡을까 봐 걱정되어서였다. 독고경천이 살아야 완안덕명이 대륜법왕에게 신경 쓰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황실 고수 넷이 죽어 완안덕명이 황제 총애를 더 받지 못할 거라는 짐작도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데 한몫했다.
대륜법왕은 실제로 종남파 제자들에게 상처조차 입히지 않았다. 묘연향에게 상처를 입힌 게 마음에 조금 걸리긴 했지만, 토번에서 여자는 남자 재산이다.
미녀 몇 명으로 보상하면 독고경천의 화가 풀릴 거로 지레짐작했다. 그래서 마음이 독고경천을 돕는 쪽으로 기울었다.
"추적자들을 유인한 다음 돌아가 보니 독고 대협을 땅에 묻더라. 나는 서안에 가서 완안덕명에게 편지를 썼다. 독고경천과 어떤 제자가 만나는 모습을 얼핏 봤다고."
독고경천이 살아있다고 믿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덕분에 종리형이 완안덕명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륜법왕이 좋은 마음에서 한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대륜법왕 덕분에 검선을 비롯해 여러 목숨 살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숨은 거요?"
잔월의 질문에 대륜법왕이 몸을 살짝 떨었다.
"내게 하독한 자는 독편복이다. 치밀하게도 칠십여 가지 독을 차례로 내게 먹였다. 마지막 순간에 내가 독을 감지했을 때 대제자 얼굴로 다가와서 돕는 척하며 혈도를 짚어 내가 독에 저항하지 못하게 했다."
"그럼 아까 그 스님이 독편복?"
"아니다. 그때는 독 때문에 경황이 없어 구분하지 못했는데 방금은 독편복이 아닌 내 제자가 확실하다."
"그럼 왕달?"
"왕달도 진짜가 맞다. 그러나 독편복이 누구로 변해 나를 노릴지 모르니 일단 여기 숨었다."
'왜 살심이 일지 않지?'
대륜법왕과 대화하면서도 잔월은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왜 마음이 움직이지 않지? 서천주 볼 때는 그렇게 죽이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대륜법왕에게 살심이 생기지 않았다. 밉다는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심령제압은 아닌데.'
무극존자는 잔월이 의심하면서도 자기 말에 따르게 한 거고 불이검 역시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아도 마음으론 싫었다.
대륜법왕은 검선의 공령환허에 당한 후 그걸 화두로 잡고 오랜 기간 고민했다. 엉뚱하게 공령환허와는 다른 재주를 얻었다.
행실이 어떻든 스님이 분명한 대륜법왕은 상대에게 자신을 적대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무공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재주를 깨달았다.
"넌 독편복과 무슨 관계인 거냐?"
"독편복이랑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이오."
"네게 대수인 흔적이 있다. 독편복의 천환대수인을 익힌 것이냐?"
"모르는 일이오. 대수인을 익힌 적 없소."
"대수인은 고행의 무공이다."
대륜법왕은 갑자기 대수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독개미에게 물려야 하고 손을 식초에 담그는 자들도 있지. 뜨거운 모래나 쇳가루에 손을 집어넣는 건 다 편한 수련이다. 조금씩 수련 강도를 높이며 차근차근 익히는 게 대수인이다. 철사장이니 주사장이니 혈접장이니 하는 아류가 많이 나온 이유지."
대수인을 익히는 건 엄청 어렵다. 대수인은 수련 방법이 무척 많다. 어느 방법이 더 효과가 좋은지 정론이 없어서 수많은 유파가 생겼다.
"독편복은 천환대수인 전승자였고 난 환멸대수인 전승자다. 독편복은 내공 심법을 배우지 못했다. 독편복에게서 대수인을 배웠다면 딱 지금 네 모습일 거다."
잔월이 익힌 구인류가 대륜법왕에게 대수인으로 오해받았다. 게다가 잔월의 내공이 단전보단 전신에 분산하였기에 대륜법왕은 잔월의 내공을 또래보다 조금 높은 수준으로 평가했다.
"네가 구인류 전승자라면 가능하긴 한데."
대륜법왕이 혼자 중얼거리더니 바로 고개를 흔들어 부정했다.
"대수인과 반대로 구인류는 깨달음의 무공인데. 구인류를 익혔다면 네 나이에 이 경지에 이르진 못했겠지. 더구나 넌 스님도 아니고."
"구인류라면 나도 소문 들었소. 팔인류인 대수인보다 훨씬 강한 무공이라고."
"헛소리. 대수인이나 구인류나 같은 무공이다. 수련 방법이 다를 뿐이지. 대수인은 겉에서 안으로 향하는 수련 방법이다. 구인류는 반대로 안에서 겉으로 향한다. 가장 중요한 건 깨달음이고 그다음은 내공이고 마지막이 몸이다."
대륜법왕이 씩씩거렸다.
"구인류는 수련 방법도 사라졌다. 대수인은 심법이 있지만, 구인류는 심법도 없다."
대륜법왕 덕분에 구인류의 의미가 모호하던 글귀들이 선명해졌다. 먼저 머리로 익히고 다음은 운기 경로를 익히고 마지막에 몸을 단련하는 게 구인류였다.
'옥녀공과 비슷하네?'
"무공 기초를 닦는 가장 좋은 시기에 내공 안 익히고 구결만 연구해서 어떻게 고수가 된단 말이냐. 구인류는 애초에 고수를 배출할 수 없는 망상의 무공일 뿐이다."
대륜법왕은 구인류에 악감정이 있는지 매우 화냈다.
"대수인조차 제대로 익힌 게 근 백 년 안에 나밖에 없다. 구인류는 천 년 가까이 고수를 배출하지 못했고."
경인 스님도 꽤 강한 편이긴 하지만, 익힌 무공이 대수인 급이라고 생각하니 고수라고 부르기 민망했다.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독고 대협 얼굴을 봐서 목숨은 해치지 않으마. 독편복을 잡은 다음 너랑 관련이 없다는 게 밝혀지면 곱게 보내주겠다."
말을 마친 대륜법왕이 다리를 틀고 앉아 심법을 운용했다.
잔월은 절맥수에서 풀려났지만, 살심이 생기지 않고 내공도 말썽이었다. 내친김에 잔월은 마음을 편히 먹고 대륜법왕의 운기를 관찰했다.
'인을 하나씩 익힐 때마다 강해지는 심법이구나.'
인 하나 익힐 때는 간단한 심법이다. 인 두 개를 익히면 심법에도 인 하나 추가되어 더 복잡한 심법이 된다. 인을 하나씩 추가하며 대륜법왕은 내공 흐름이 무척 복잡해졌다.
복잡하지만 부드러운 내공 흐름을 보며 구인류 구결을 떠올렸다. 아까 치료하면서 다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또 새로움이 느껴졌다.
반 시진 정도 시간이 흐르고 대륜법왕이 적갈색 연기를 입으로 토해냈다. 몸에 남은 독의 잔재를 완전히 배출한 것이었다.
"소림사에는 전문 불을 지피는 자들이 있다. 이들을 보통 화공(火工)이라고 부른다. 무공도 못 익히고 경전도 얼마 안 가르쳐주지. 단순히 불만 지피는 게 아니라 장작도 마련해야 한다. 소림사가 엄청 크기에 이들은 추운 겨울에도 장작을 하러 다녀야 한다."
"그중 장경각에 불을 지피는 자가 있었다. 장경각에는 수많은 불경과 무공 비급이 있다.
귀한 서책을 많이 둔 곳이기에 너무 더워도 안 되고 너무 추워도 안 된다. 연기가 새도 안 되지. 장경각에 불 지피는 자는 이십 년이나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불을 지폈다."
내공을 어느 정도 회복한 대륜법왕은 갑자기 소림사 이야기를 꺼냈다.
"장경각주는 화공이 기특해 장경각에 있는 경전을 읽으라고 빌려줬다. 화공은 무식한 자여서 불경을 읽으려고 잠도 아껴가며 글자를 익혔다. 그때 화공은 이미 불혹에 가까운 나이였지."
"뒤늦게 글을 배운 화공은 글자가 너무 신기했다. 그래서 불경을 읽을 때 글자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 아주 미묘한 차이지만, 불경 글자가 두 가지 필체라는 걸 깨달았다."
잔월은 대륜법왕의 이야기에 점점 빨려 들어갔다.
"처음엔 장경각주에게 말하려 했지만, 화공이라는 자들은 소림사에서 지위가 형편없이 낮은 존재다. 일개 화공이 감히 장경각의 불경이 이상하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화공은 혼자만 알면서 경전의 특이한 글자를 구분해서 외웠다."
"화공들도 기본 토납법을 익힌다. 내공이 있으면 회복이 빨라 일을 더 열심히 할 수 있으니까. 화공은 토납법 익히는 시간에 불경 심법에 따라 운기 하여 내공을 쌓았다."
"특이한 글자만 뽑아내서 조합해 얻은 게 바로 구양진경 구결이었다."
大輪法王 대륜법왕 덕분에
九印流 구인류 깨달음을 얻다
- 작가의말
광풍살잔월홍 100회 이벤트에 오신 여러분. 오늘 정말 잘 오셨습니다. 다들 잘생긴 제 얼굴만 보지 마시고요. 이벤트에 집중해 주세요.
광풍살잔월홍 100회 이벤트로 사장님이 구양진경을 이벤트 상품으로 내놓았습니다. 사장님이 미쳤나 봐요.
1. 구양진경을 잔월이 익힌다.
2. 잔월이 구양진경을 익힌다.
3. 구양진경을 잔월이 배운다.
4. 잔월이 구양진경을 배운다.
한 분이라도 정답을 맞히면 주인공 잔월에게 구양진경을 익힐 수 있는 혜택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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