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서·단
잔월과 경인 스님은 무림대회가 끝나자마자 바로 떠나진 못했다. 소림의 새 방장 숭계자정을 위수로 한 소림 대표들이 동우현을 위수로 한 명교 대표들과 사과와 배상에 관한 협상을 했다.
개방 방주 전칠과 경인 스님이 중재자로 회의에 참석했다. 그 외에도 중재자가 여럿 있었다. 양측이 합의를 쉽게 이루지 못할 땐 중재자들도 토론에 참여했다. 경인 스님처럼 강호에 명망이 있는 사람이나 전칠처럼 강호의 각종 비사에 밝은 사람도 있었다.
"과거 현운문과 적성파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이 문제는 명교에서 양보함이 마땅합니다."
명교의 힘으로 소림을 제압한 게 아니기에 동우현은 악착같이 소림의 위명에 해가 되는 요구들을 제출했다. 비록 늦게나마 결과에 승복했지만, 소림 역시 조금이라도 손해를 덜 보려고 이를 악물고 덤볐다.
덕분에 잔월은 며칠 멍한 상태로 보내며 봉황내의 초식에서 얻은 것들을 되새김질할 시간을 얻었다. 감각만 뛰어나고 무지했던 예전과 달리 무공에 관한 사고의 깊이가 생겨 꽤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협상은 갑자기 전해온 소식에 급물살을 탔다. 작년에 원에 투항한 장사성이 갑자기 오왕(吳王)을 자처하며 다시금 반원(反元 - 원나라 반대편에 서다)의 기치를 들었다.
돌아가던 명교 무사들이 공격당했고 소림으로 군대가 온다는 소문도 있었다. 명교도 급하고 소림도 급하니 서로 상식선에서 양보하며 협상을 빠르게 끝냈다.
"짧은 평화가 끝나고 중원이 또 피에 잠기겠구나."
잔월과 함께 경공을 펼쳐 낙양으로 달리면서 경인 스님이 한탄했다. 장사성이 원에 투항한 후 갑자기 변한 판세에 각 세력이 몸을 사렸다. 덕분에 사흘이 멀다 하게 전투가 벌어지던 상황이 나아졌는데 장사성의 변심에 강남 민초들이 홍역을 치르게 되었다.
"원을 초원으로 몰아낸다고 하면서, 왜 자기들끼리도 싸우는 겁니까? 목표가 일치한다면 손잡음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잔월의 질문에 경인 스님이 껄껄 웃었다. 어릴 땐 나이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보여줘서 아이가 맞나 싶었는데 이젠 좀 사람같이 보였다.
"강호에 보면 가끔 협을 내걸고 자기 욕심을 채우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을 좋게 부풀려서 사람들을 속이며 뒤로는 더러운 수작을 부려 자기 이득만 챙긴다. 지금 군사를 일으킨 자들 역시 원나라를 북으로 쫓아내고 중원인의 천하를 회복한다는 기치를 내걸었지만, 다들 자신이 황제 되려는 욕심을 가리는 수작일 뿐이다. 황제는 하나밖에 없으니 서로가 죽도록 싫고 미울 것이다."
'그래. 나도 강한 무공을 익히려는 생각과 천하제일이 되겠다는 목표가 있지. 강한 무공을 익히려면 내 무공을 공개하고 함께 익히면 좋겠지만, 천하제일이 되려면 좋은 무공을 나만 알고 있어야 한다.'
'궁금한 게 많은 건 예전과 똑같구나.'
물론, 질문 수준이 달라졌다. 예전엔 다들 상식이라고 쉽게 지나치는 것들을 물었다. 엉뚱한 질문이 많았지만, 자세히 살피면 사물의 본질을 궁금해하는 게 보였다.
지금은 사물의 본질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 많았다. 소림사처럼 강한 문파가 왜 원 황실에 굴복했는지와 같은 질문을 주로 던졌다.
"산에 맹수가 있다. 이 맹수는 이빨이 날카롭고 발톱이 드세 사람을 능히 해친다. 사람은 웬만해서 맹수를 건드리지 않고 맹수도 사람을 쉬이 해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맹수가 사람을 해치면 사람들은 어떻게라도 맹수를 죽인다. 안 그러면 다음에 누가 맹수에게 죽을지 불안하기 때문이다."
"무인은 맹수와 같다. 무극존자 정도 고수는 혼자 힘으로 황제를 죽일 능력이 된다. 그러나 무극존자는 황제는커녕 웬만한 관리도 건드리지 않는다. 황실과 관에 적대하면 사는 게 무척 귀찮기 때문이다. 황실이나 관이 내건 재물에 눈먼 자들이 온갖 기상천외한 수단으로 무극존자를 죽음으로 몰려고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편한 삶을 살려는 욕망이 있다. 무인들이 관과 황실에 잘 적대하지 않는 이유가 제각각이지만, 내가 방금 말한 이유가 가장 많을 것이다."
경인 스님은 문파를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관과 황실에 적대하면 돈 벌기 어려워 문파를 유지할 수 없음도 설명했다. 강호에 무지하다시피 했던 잔월은 경인 스님 덕분에 안계를 넓혔다.
소림사에서 늦게 출발했기에 낙양은 이튿날 오후에 도착했다.
"아이고, 주지 스님. 어서 백마사로 가보세요. 군사가 몰려와서 백마사를 약탈합니다."
잔월과 경인 스님은 빠르게 경공을 펼쳐 백마사로 향했다. 몇 번이나 전화에 휘말려 소거되고 몇 번이나 재건된 백마사였다. 아픈 역사를 잘 아는 경인 스님은 다리가 두 개인 게 안타까웠다.
화를 당할까 봐 두려웠는지 백마사 주변에는 구경꾼조차 없었다. 경인 스님은 경공을 펼쳐 담을 넘었다. 잔월 역시 경인 스님 뒤를 바싹 따랐다.
"멈춰라. 이 천벌 받을 놈들아."
경인 스님의 내공이 실린 호통에 벽이 부르르 떨렸다. 피를 가득 쏟아내고 쓰러진 수십 구의 주검에 경인 스님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스님."
잔월이 휘청이는 경인 스님을 부축했다. 그때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손에 부채를 든 한 무리 무인이 나타났다. 철선문(鐵扇門)이라는 문파의 제자들이었다.
"저놈이 바로 백마사 유일한 무승이라는 경인인가?"
"내가 먼저 실력을 가늠하지."
검은 무복을 입은 자가 다짜고짜 경인을 덮쳤다. 얼굴이 창백하고 눈에 총기가 사라진 모습에 이름을 떨칠 기회라고 생각해 선수를 쳤다.
달콤한 상상과 달리 철로 된 부채가 경인 손에 잡혔다. 검은 무복은 경인 손에서 부채를 빼내려고 무던히도 애썼지만, 아교로 붙인 듯 미동도 없었다.
"부채 버리고 물러나."
"손이 안 떨어져."
부채를 잡은 손이 강한 흡력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경인 스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처음 보는 참변에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억지로 안정시켰다. 검은 무복은 경인 스님이 정신을 차린 듯하여지자 급한 마음에 왼손에 내공을 집중해 가슴 요혈을 공격했다.
경인 스님이 '흡' 소리를 내며 상대 주먹을 그대로 맞아줬다.
"악!"
짧은 비명을 지르며 검은 무복이 침을 질질 흘렸다. 경인 스님 가슴을 때린 주먹이 박살 나서 흰 뼈가 드러날 지경이었다.
"아미타불."
경인 스님이 불호를 외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검은 무복이 피하려고 애썼지만, 오른손은 부채에 찰싹 달라붙었고 왼손에서 오는 통증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지옥에 가겠습니다."
담담한 어투로 말한 경인 스님이 내공을 방출했다. 검은 무복의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꼈다. 경인 스님이 부채를 잡은 왼손을 놓자 검은 무복이 털썩 쓰러졌다. 머리가 바닥에 퉁 떨어지며 꽁꽁 언 눈알이 부서졌다.
"협공해라."
검은 무복이 너무 쉽게 죽자 무인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장군, 저 애송이를 부탁하오."
긴 창을 든 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잔월을 찌르려 했다. 잔월은 하얀 계도를 뽑아 휘둘렀다. 나무로 된 창대가 수수깡처럼 썩둑 썩둑 쉽게 잘렸다.
"대단한 칼이다. 저걸 빼앗아 오는 놈은 은자 열 냥 주겠다."
장군이라는 놈의 말에 창을 든 일반 병졸들은 물론 허리의 칼을 뽑아 든 군관들도 잔월을 목표로 덤볐다.
'영결팔법, 영철월.'
잔월은 난전에서 수비 위주인 영철월을 펼쳤다. 휴철월은 난전에서 많이 그리고 빨리 죽이는 초식이다. 잔월은 첫 실전이고 자기 무공에 확신이 부족하여 공격보단 수비를 선택했다.
"활, 활을 쏴라."
잔월의 계도는 군관들의 잘 만든 칼도 쉽게 잘랐다. 잔월이 아직 무기에 내공을 보낼 정도 실력은 아니기에 순전히 무기 덕분이었다.
도신이 눈처럼 하얀 계도가 탐난 장군이 궁수들을 불러왔다.
장군 구령에 따라 잔월을 포위했던 군관과 병사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조금 높은 지형에 자리를 잡은 궁수들이 잔월을 목표로 화살을 쐈다.
그때 잔월 신형이 사라졌다. 고수라면 잔월이 움직이는 궤적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겠지만, 장군이나 병사들 눈엔 그냥 갑자기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다.
잔월은 섬전도 경공으로 화살을 피했다. 그리고 경인 스님을 협공하던 무인 중 하나의 뒤를 공격했다. 섬전도가 무척 훌륭한 무공이고 잔월도 잘 익혀냈지만, 실전에서 힘이 과하게 들어가는 바람에 속도만 빠르고 은밀함이 부족했다.
공격받은 무인은 잔월의 기습을 알아채고 몸을 돌려 부채로 칼을 막았다. 살이 철로 된 부채는 군관의 칼처럼 쉽게 잘리지 않았다. 꽤 큰 흠집이 남았지만, 잘리지도 부러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냥 무사하지도 못했다. 잔월은 무기가 닿은 순간 극양인 내공을 상대 몸에 침투시켰다. 극양의 내공은 저항을 잘 받지 않는 덕분에 꽤 깊숙이 침투했다. 상대 몸에 침투한 내공은 계도가 부채에서 떨어지며 단전과 연결이 끊어진 순간 폭주했다.
잔월 계도를 막은 무인이 피를 뿜으며 뒤로 쓰러졌다. 눈을 까집는 걸 보니 혼절한 것 같았다.
"장작에 불을 지펴라. 백마사를 태우고 철수한다."
자칫 경인과 잔월 둘 손에 다 죽을 수도 있다. 사람 죽이는 일은 무공 고수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육체적으로 힘들 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힘들다.
그러나 지금처럼 복수에 불타는 상황이라면 마음의 거리낌이 없어 다 죽일지도 모른다.
장군의 외침에 경인 스님이 힘을 한층 끌어올렸다. 경인 스님은 갖춘 실력에 비교해 실전이 너무 적었다. 일대일이라면 압도적인 실력으로 상대할 텐데 여럿이 협공하니 공방전환이 느려 야금야금 손해 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방화를 저지하려고 서두르니 몸에 상처가 늘었다.
잔월의 계도를 막은 두 번째 무인은 멀쩡했다.
'섬전도를 결합해야 하는구나. 잊지 말자. 빠름은 힘이다.'
섬전도와 함께 펼친 게 아니어서 상대가 충분히 대비하고 막았다. 그래서 극양의 내공을 침투시켰는데도 상대는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잔월 몸이 사라지자 상대하던 무인은 긴장을 살짝 풀었다. 그런데 사라진 잔월이 다른 자를 공격하는 대신 상대하던 무인을 또 공격했다. 허를 찔린 무인이 허둥대며 계도를 막았다. 잔월의 빠른 경공을 견식 했기에 감히 피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혼연일체. 피할 수밖에 없는 공격. 막을 수밖에 없는 공격.'
계도가 부채에 닿기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잔월 머리엔 무수한 생각이 떠올랐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공격!'
마지막 순간 계도에 힘이 들어갔다. 이미 피할 수 없는 공격인데 힘을 더 실어 막을 수도 없는 공격으로 만들었다.
'아니다.'
상대 부채를 잘라버렸다. 상대는 부채가 잘릴 때 몸을 피했다. 오히려 부채가 잘리지 않았을 때보다 효과가 못했다.
'사부께서 상대 수준에 알맞은 초식이 최강이라고 했다. 욕심부리지 말자.'
잔월이 계도를 다시 휘두르자 상대는 바닥을 굴러 도망쳤다.
"재물 챙겨서 돌아간다."
장군 지시에 병사들이 재물을 짊어지고 밖으로 달렸다. 무인들은 불이 좀 더 커지고 나서야 도망쳤다. 경인 스님은 홧김에 도망치는 무인 둘을 쫓아 머리를 박살 냈다.
협공당할 때야 경험 부족으로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허둥댔지만, 흩어져 도망치는 놈을 일대일로 상대하니 손을 두 번 쓸 필요조차 없었다.
잔월은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불타는 집에 뿌렸다. 그러나 겻불에 밥을 지을 수 없듯이 잔월 혼자 힘으론 불을 끌 수 없었다.
경인 스님은 불타는 집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백마사 스님들 시체를 모았다.
"눈이 오는구나. 부처님. 소나기를 내려주셨어야죠."
눈이 내리니 불길이 오히려 거세졌다.
"어떻게 한 명도 도망가지 않았느냐. 왜 다들 이리도 미련한 거냐."
경인 스님이 오열했다. 잔월도 불 끄려던 생각을 접고 경인 스님 곁을 묵묵히 지켰다.
"아무래도 편지는 불타 사라진 것 같구나."
슬픔에서 겨우 빠져나온 경인 스님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제야 외숙공 편지에 생각이 미친 잔월은 아득한 절망을 마주해야 했다. 편지를 보면 부모 정체는 물론 외숙공이 어디에 있는지도 단서를 찾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 편지가 불타 사라졌다.
"혹시 편지 내용을 알고 계신가요?"
일말의 희망을 품고 물었지만, 경인 스님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스님과 소년은 각자 다른 절망에 빠져 하늘만 바라봤다.
"불이다. 왕가장에 불이 붙었다."
사람들이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부처님을 모시고 자비를 행해야 하는 백마사의 인덕이 오히려 왕가장보다도 못했구나. 어쩌면 부처님이 우리에게 벌을 내린 것일지도."
잔월과 경인 스님은 경공을 펼쳐 왕가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왕가장의 불 역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졌다.
잔월과 경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새 소식이 전해졌는지 왕가장 주변에 있던 병사와 무인들이 도망쳤다.
"군사들이 왕가장을 약탈하려 했습니다. 대부인이 중원인이 아니라는 이유였죠. 왕 원외는 병사에게 죽었고 대부인과 왕 부인은 왕 공자를 데리고 말을 타고 도망쳤습니다. 대총관이 직접 불을 질렀습니다."
백마사와 왕가장에 해를 끼친 자들은 장사성의 군사였다. 백마사를 약탈한 건 소림사와 친하다는 이유였고, 왕가장은 대부인이 몽골인이어서 그 재물을 환수한다는 이유였다.
장사성은 군사를 일으킨 초기부터 몽골 지주들의 재물을 빼앗는 것으로 주머니를 불려왔다.
잔월과 경인은 다시 백마사로 돌아갔다. 도우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잔월과 경인이 주검을 하나씩 업어 성 밖의 산에 갔다. 경공 덕분에 날이 어둡기 전에 시체 옮기는 일을 끝냈다.
언 땅을 손으로 판 경인은 주검 하나 묻을 때마다 이름을 불러주며 오열했다. 잔월은 계도로 나무를 잘라다가 묘표를 만들었다.
경인은 주검을 묻은 후 묘표에 글을 새겼다. 수십 구의 주검을 다 묻으니 날이 바뀌어 아침이 되었다.
주검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묻었기에 시간이 무척 걸렸던 거였다.
"선재, 선재. 부처님. 경인은 당신을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초췌한 얼굴로 허공을 향해 합장을 올린 경인 스님은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구인류 비급이다. 넌 원체 총명한 아이니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거다. 이후 백마사가 재건되면 자질이 훌륭한 아이에게 전하도록 해라. 잘 가르칠 수 있도록 너도 꼭 익혀야 한다."
"스님."
"무모한 짓을 하려는 게 아니다. 살계를 어겼고 앞으로도 어길 생각이기에 환속하려는 거고, 백마사 스님이 아닌 나는 구인류 전수자 자격이 없다. 구인류는 너만 익히고 비급은 다시 백마사에 돌려주기 바란다. 난 백마사가 재건될 때까지 살아있을 것 같지 않구나."
경인 스님은 담담한 말투로 구인류를 익히며 주의할 점을 알려줬다.
구인류는 양에 속하는 소양인, 태양인, 극양인이 있고 음에 속하는 소음인, 태음인, 극음인이 있다. 그리고 음양이 섞인 음양인과 양음인이 있었고, 여덟을 익혀내야 비로소 입문할 수 있는 무극인이 있었다.
"태양인은 내공 양에 더 중점을 두고 극양인은 수수함에 중점을 둔다. 넌 극양인을 이미 익혔으니 소양인과 태양인도 어렵지 않을 거다."
"내가 비록 성취는 부족하지만, 전대 수련자들이 물려준 지혜로 구인류의 요체는 파악했다. 사실 구인류는 하나의 인을 아홉으로 풀어놓은 것뿐이다. 이를 늘 염두에 두고 구인류 최후의 인을 꼭 찾아내기 바란다."
말을 마친 경인 스님은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잔월은 수십 개 새로 생긴 무덤에 골고루 합장하고 떠났다.
정처 없이 걷던 잔월은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외숙공으로 향하는 단서가 사라졌다. 갑자기 몰려오는 막막함에 잔월은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댈 사람은 월영고랑밖에 없었다.
'사부한테 가자. 지금쯤 몸조리가 끝나셨을 거야.'
월영고랑은 나름대로 체계를 이룬 무인으로서 강제로 올라간 경지 탓에 균형이 어긋나 버렸다.
'사부랑 두천이 그리고 자강 형 도움을 받아서라도 어떻게든 외숙공을 찾아내고 내 부모 원수를 찾아 복수하고 말 테다.'
장사성의 군사가 곳곳에 널렸다. 옷에 피가 잔뜩 묻은 잔월은 귀찮은 상황을 피하려고 낮엔 구인류 비급에 적힌 구결과 주해를 보며 무공을 해석했다. 낮엔 쉬고 인적이 드문 밤에 경공을 펼쳐 달리면서 섬전도 보법을 수련했다.
'구인류는 운기법이구나.'
구인류는 대수인과 달리 장법이 아닌 운기법이었다. 그저 그 운기법이 장법과 상성이 좋을 뿐이었다. 운기법에 알맞은 초식을 역대 수련자들이 만들어내면서 대수인과 같은 장법으로 여겨졌지만, 실상은 운기법이었다.
'내 수준으론 음양인과 양음인 그리고 무극인은 이해할 수도 없구나.'
월영고랑의 가르침으로 잔월은 늘 본인 수준을 정확히 판단하려 애썼다.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걸 경계했다.
익힐 수 없는 무공을 억지로 익히려 하면 다른 무공 수련에도 지장을 줄 가능성이 크다.
소양인과 태양인은 경인 스님 말대로 쉽게 습득했다. 그러나 소음인과 태음인 그리고 극음인은 잔월 머리를 아프게 했다.
'내공을 이런 식으로 역류해도 괜찮은 건가?'
내공을 잠깐 역류하여 위력을 높이는 방법은 많이 쓰인다. 그러나 구인류의 음에 속하는 세 인처럼 시종일관 거꾸로 돌리는 법은 없었다.
'모르는 글자도 많고.'
천 년이나 전해온 비급이기에 옛날 글자가 많았다. 구결 전체가 옛날 글자고 주해도 옛날 글자가 태반이었다. 다행히 구결은 요즘 글자를 달아줘서 해석할 수 있었지만, 주해는 아니었다.
'구결보단 주해가 훨씬 중요한 것 같은데.'
글자를 읽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시대에 따라 글자에 다른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 그러한 의미를 전부 알아야 구결에 숨긴 뜻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하나의 구결에 여러 개 주해가 달렸다. 같은 구결도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했다는 뜻이다. 구결을 곱씹으며 그 의미를 찾기보단 주해를 보는 게 훨씬 빠른 길이다.
주해 뜻을 곡해하면 오히려 수련을 망칠 수 있기에 잔월은 무척 조심해 익혀야 했다.
'다행히 무극환허인 구결보단 쉽구나.'
갈피조차 잡기 힘든 무극환허인 구결보단 나았다.
'월영도법도 익혀야 하고, 내 운기법도 살펴야 하고.'
잔월은 이미 몸에서 익숙하게 펼쳐지는 운기법을 연구해야 했다. 다른 무인이 들었으면 배꼽 잡았을 일이다. 어린 나이에 수련 당한 잔월은 자기 몸에서 종일 펼쳐지는 운기법에 대한 이해가 무척 낮았다.
'급해 하지 말고 차근차근 나가자.'
구인류 비급을 주머니에 넣은 잔월은 섬전도를 꺼냈다.
端緖 실마리가
斷 끊어지다
- 작가의말
우선 댓글 의견을 받고 전투를 추가했습니다.
원래는 백마사가 이미 불타 사라졌고 경인 스님은 말로만 참상을 전해 듣습니다. 환속해 복수하려는 결심으로 구인류를 잔월에게 전합니다.
당위성이 부족한 것 같아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댓글 의견 보고 전투를 추가하고 더욱더 격한 감정을 끌어내면 훨씬 자연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확 들더군요.
여기뿐 아니라 최소 세 부분에 전투를 추가합니다. 글이 11쪽 넘으면 여기가 원래 안 싸우는 곳인데 전투가 추가되었구나 하시면 됩니다.
구인류를 놓치면 신인류인가라고 댓글 달았던 박싸장 님.
보다시피 소음인, 태음인, 소양인, 태양인밖에 없는 신인류와 달리 구인류는 극양인과 극음인, 음양인과 양음인에 무극인까지 다양합니다. 구인류가 육체적으론 신인류보다 낫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구인류가 되었습니다.
무극환허인 왜 안 익히냐는 질문.
그래요. 너무 어려워서 못 익힙니다. 무극환허인은 거의 타 전공 박사 논문 수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익힐 게 없다면 도전할 테지만, 월영도법을 익히고 섬전도 익히느라 무극환허인은 잠시 뒷전이 되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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