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익·고비
잔월은 흑표를 찾아 함께 뛰어다니려던 계획을 접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하늘에 뜬 둥근 달이 잔월의 복잡한 마음도 모르고 세상을 밝게 비췄다.
누구도 찾지 못하는 어두운 곳에 자신을 가두고 싶었다. 머리와 마음을 어지럽히는 번뇌를 다 몰아내고 어둠으로 꽉 채우고 싶었다.
천희연과 배에서 나눴던 대화가 문득 생각났다. 수련을 쉬고 강호를 돌면서 견학을 넓힐 시기라던 천희연 말이 생각났다.
'자강과 두천은 화산을 떠날 상황이 아닌 것 같아. 그냥 흑표랑 둘이서 강호로 갈까?'
왠지 우울하게 보이는 보름달이 뿌리는 슬픔을 피해 어두운 구석을 찾았다.
'달은 늘 둥글다고 했지. 보름달도 엄청 슬픈데 일부러 그림자 지우고 밝은 척하는 게 아닐까? 그럼 잔월도 신월도 엄청 슬프겠다.'
잔월은 슬픈지 몰라도 신월은 아니었다. 잔월이 애수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이 자정이 지나 영지 순찰을 끝낸 흑표가 돌아왔다.
"흑표 친구 사귄 거야?"
흑표는 운표(雲豹) 혹은 귀문표(龜紋豹)로 불리는 체형이 작은 표범을 데려왔다. 백원동에서 갈색 가루를 맞은 후 키가 잔월 무릎까지 큰 흑표보다 체형이 조금 컸다.
흑표를 따라온 운표는 잔월을 잔뜩 경계했다. 흑표가 머리를 비비고 혀로 핥아주면서 운표를 다독였다.
"흑표 너 설마."
흑표가 상체를 부풀리고 머리를 높게 쳐들었다. 화산의 왕이 된 흑표는 함께 영지를 관리할 부인이 필요했다. 마침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어서 며칠 공을 들여 끝내 구애에 성공했다. 잔월에게 자랑하려고 힘들게 구슬려 데려온 거였다.
흑표의 배신에 마음이 아팠다. 공손완아를 상대로만 부려본 심술이 꼬물거렸다.
"흑표. 나 지금 여길 떠날 생각인데. 넌 어쩔 거야?"
흑표가 복잡한 몸짓을 보여줬다. 구체적으로 뭘 표현하려는지 이해하진 못했지만, 흑표의 대답은 명확했다.
"여기 남겠다고? 나 혼자 떠나라고?"
흑표가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였다.
"이래서 옛사람들이 여자는 양심을 찍는 도끼라고 했구나. 내 형제가 고작 여자 때문에 날 배신하네."
잔월은 툴툴거리며 짐을 쌌다. 봇짐과 계도를 등에 메고 은원보를 챙기는데도 흑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진짜 떠날 생각은 없었다. 흑표가 미안하다고 하며 애교를 부려 만류하길 바랐다. 그러나 흑표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아 잔월은 기표지세가 되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멈출 수 없었다.
잔월이 짐을 다 챙기고 밖으로 나가자 흑표도 문까지 따라 나왔다. 그러나 잔월과 운표를 번갈아 보던 흑표는 결국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틀 정도 주변 돌다가 돌아오자. 흑표 이것 혼 좀 내줘야지.'
삼청전에 가서 월영고랑이 만든 비밀 공간에 부피가 큰 비급을 숨긴 잔월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산 아래로 걸었다. 흑표에게 토라진 자신이 유치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흑표도 어찌 보면 늦장가인데. 돌아올 때 돼지갈비 싱싱한 거 사 들고 오자.'
배신자 흑표를 너그럽게 용서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마음이 편하니 발걸음도 가벼웠다. 화산 주변을 돌아다니며 경치를 구경할 요량으로 목적지를 고민하는데 흰 그림자가 휙 하고 허공을 날았다.
'도둑?'
잔월은 봇짐을 단단히 고쳐 메고 경공을 펼쳤다. 상대도 경공이 뛰어나 옥녀봉을 절반 내려오고 나서야 겨우 따라잡았다.
"에헴."
잔월이 기척을 내자 상대는 화들짝 놀라 발을 헛디뎠다. 잔월은 빠르게 다가가 어깨를 잡아 부축했다.
"독고 사부. 이 밤중에 어딜 가십니까?"
"저는 잠이 오지 않아 산책하려고요. 그런데 천 소저는 어딜 가는 길입니까?"
잔월의 질문에 천희연이 피식 웃었다.
"산책하는데 가죽 신발에 봇짐에 계도까지. 게다가 가슴 불룩한 거 보면 은원보도 챙기신 거 같은데요?"
천희연의 말투가 평소랑 다르게 조금 공격적으로 느껴졌다.
"천 소저보단 짐이 적은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단 공자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십니까?"
잔월 말에 천희연이 화들짝 놀랐다. 마치 바람피운 게 걸린 마누라 같았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단약사는 왜 혼인하면 안 되는 겁니까?"
천희연은 질문 의도가 뭔지 짐작 가지 않았지만, 아는 만큼 성실히 답변했다.
"아미파의 중대한 비밀과 관련 있다고만 알고 있어요. 단약사는 약 만드는 법을 알고 장문인은 약의 용처를 압니다. 밖으로 전해지면 안 되기에 단약사가 여자면 혼인하지 못합니다."
"근데 저는 약의 용처를 알고 있으니 괜찮은 거 아닙니까?"
천희연 얼굴이 빨개졌다. 잔월 역시 엉겁결에 속에 있는 말을 생각 없이 뱉어내고 귀가 빨개졌다.
"어딜 가는 길인지 모르겠지만, 당분간 함께 다닐까요? 강호가 하도 험해서 말입니다."
잔월이 용기를 냈다.
"제 한 몸 지킬 정도는 됩니다."
천희연이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러나 보름달이 환하게 비춘 빨간 얼굴에선 냉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제가 좀 부실해서 아미와 같은 명문대파 제자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예전에 내상을 입어서."
잔월은 아차 싶어서 입을 황급히 다물었다. 한 달이 넘은 기간 천희연이 잔월을 목욕도 시켜주고 죽도 먹여주고 기저귀도 갈아줬다.
천희연도 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빨간 얼굴이 더 빨개졌다.
"어서 갑시다. 곧 날이 밝으면 쌍둥이가 절 찾을 겁니다."
잔월이 앞장서고 천희연이 뒤따랐다. 잔월은 속도를 조금 늦춰 어깨를 나란히 했다. 고개를 돌리니 천희연의 하얀 얼굴에 홍조가 조금 남아 무척 아름다웠다.
"목적지는 있습니까?"
"딱히 생각해두지 않았습니다. 독고 사부는요?"
"저는 협이 뭔지 알고 싶습니다."
천희연도 배에서 잔월과 했던 대화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서안 북쪽에 봉상부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선이라고 불리는 대협이 있다고 합니다. 문파 소속도 아닌 개인인데 아미에도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분이죠."
"그럼 봉상부로 갑시다."
어차피 화산을 영원히 떠나려는 게 아니라 잠시 주변을 돌려는 생각이었다. 봉상부는 거리도 멀지 않아 다녀오기 적합하다. 잔월과 천희연은 경공을 펼쳐 봉상부를 향해 달렸다.
잔월은 흑표와 자존심 싸움을 하다 충동적으로 나왔기에 아무 언질도 없었지만, 천희연은 강호를 돌아보겠다고 편지를 적어놓고 나왔다. 갑자기 젊은 남녀가 사라졌는데 여자는 목적지를 밝히지 않은 편지를 남겼다. 사람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 딱 좋은 소재였다.
'조금 압박하니 바로 생각대로 움직이는구나. 부친에겐 아직 멀었다.'
여식을 데려온 문파가 많지만, 아미파 천 씨 가문보다 나은 상대가 있을 리 만무했다. 잔월에겐 재물 운운했지만, 그간 종남파 이름으로 진행하던 사업 모두 화산 밑으로 끌어오면 백 명 정도 규모를 유지하는 건 일도 아니다.
독고경천이라면 독심호리의 얕은 수작을 빠르게 간파했겠지만, 잔월은 꽤 순수하게 자란 편이었다. 어린 나이부터 못 볼 꼴을 다 보고 자란 독고경천과는 달랐다.
천부전 역시 잔월도 함께 사라졌다는 말에 시름을 놓았다. 그저 걱정을 던 정도가 아니라 기쁨에 춤을 덩실덩실 추고 싶은 마음이었다.
쌍둥이는 월영고랑이 맡기로 했다. 월영고랑의 기상천외한 외공 수련은 아미의 것보다 훨씬 나았다. 어렵기만 한 수련이 아니라 어린 나이에 맞춰 재밌는 방식을 고안해내서 단순한 편인 쌍둥이에게 딱 맞았다.
한편.
잔월과 천희연은 봉상부에 가서 이선이라는 자의 거처를 찾았다. 대협이라고 하여 그래도 어느 정도 갖추고 살 거로 예상했는데, 이선의 집은 무척 가난했다.
"화산파 삼대 제자 잔월입니다. 협이 뭔지 고민하다가 대협의 고명한 견해를 들으려고 찾아왔습니다."
"난 무공 외에도 재주가 많다네. 글을 잘 써서 편지 대필도 하고 그림도 잘 그린다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이고 사는 건 힘들어도 지금보단 더 부유하게 살 수 있지. 내가 왜 가난한 삶을 고집하는지 아는가?"
"짧은 견해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편해지면 안 되기 때문이야. 가난하게 살면 걱정거리가 많다네. 그때마다 난 생각하지. 나처럼 가난한 자들은 다 나와 비슷한 걱정으로 속을 썩이겠구나. 그들이 걱정을 덜 수 있도록 내가 조금이라도 돕자."
"그런데 내가 조금 더 부유하게 살면 다른 고민이 생길 걸세. 그럼 나랑 비슷하게 사는 자들의 고민을 도우려고 하겠지. 대부분 사람이 가난하게 살기에 나도 가난하게 사는 거네. 협이란 최대한 많은 사람을 돕는 거라는 생각일세."
"대협께서 부유하게 살면서 가난한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안 되는 겁니까?"
잔월의 질문에 이선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돈이 필요한 자에게 돈을 주고 약이 필요한 자에게 약을 주면 돕는 거로 생각하는가? 나는 가난한 자들이 가난을 벗어나도록 방법을 알려주는 게 협이라고 생각하네. 내가 가난하게 살아야 저들을 진정으로 도울 방법을 찾을 수 있다네."
"천하 사람이 다 부유할 수 있을까요?"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네. 재물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노동으로 만드는 거야. 그걸로 모든 사람이 부유할 순 없어. 나는 가능성 있는 자를 돕는 거네. 아무리 도와도 소용없는 자도 있다네. 그런 자들은 목숨이 위험한 일이 아니면 외면한다네."
"그런 자들이 대협을 헐뜯지 않을까요?"
"처음엔 그랬었지. 왜 저 사람만 돕고 자기는 안 돕냐고 따지는 자들이 있었네. 난 분명히 도왔는데 본인이 기회를 잡지 못하고 나만 탓하는 거야. 사람은 이기적이어서 타인의 처지를 무시하고 자기만 생각한다네. 그러나 십 년이 지난 후부터 다들 대협이라고 추켜세우더군. 날 헐뜯던 자들도 눈치 보며 입 다물었네. 이기적인 자들일수록 남의 눈치를 심하게 보더라고."
이선은 잔월이 사 온 술을 조금씩 음미하며 아껴 마셨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협이 다를 걸세. 자신의 협을 확고하게 세우고 그걸 우직하게 견지하는 게 중요하다네. 주변에 흔들리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네. 본인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건 인간의 본성이야. 협은 그러한 본성을 거스르는 위대한 것이지."
"협은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는 뜻입니까?"
"그렇다네."
이선이 슬픈 얼굴로 대답했다.
"군주가 충을 장려하는 건 대신들이 충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네. 나라가 효를 강조하는 건 자식들이 효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네. 어느 황제가 백성에게 숨을 꼭 쉬어야 한다고 요구한 적 있는가? 당연한 것은 거론되지도 않는다네. 사람들이 협을 갈구하는 것 역시 이 세상에 협이 적기 때문이네."
"대협은 왜 자신의 영달까지 버려가며 타인을 돕는 겁니까?"
"고아인 나를 거두고 보살핀 사부를 위해서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부께 보답할 수 있는 길은 이밖에 없는 것 같거든. 이선은 내 사부 명호일세. 난 사부 이름으로 협객 노릇을 하는 거라네. 내가 협을 지키는 건 사실 타인을 돕기보단 사부의 명성을 위해서야. 궁극적으로 따지면 나를 위해서지. 사부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어서 마음이 기쁘니까 말이야."
이선과 나눈 대화는 즐거웠다. 보통 명성이 부풀려진 자가 대부분이기 마련인데, 이선은 오히려 소문이 실제보다 못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혹시 다른 협의를 지키는 의인을 알고 계시는지요?"
"평량에 유명한 술주정뱅이를 만나 보시게."
比翼 날개를 나란히 하고
高飛 멀리 날아가다
- 작가의말
역시 경험을 바탕으로 쓰니 글이 부드럽습니다. 잔월과 천희연이 가출할 줄 누구도 몰랐을 겁니다. 이성의 집착으로 무수히 고민한 경험이 없으면 절대 생각해낼 수 없는 절묘한 해결책이지 않습니까?
질풍노도의 시기 여자들에게 시달려 가출했다가 컴백홈 듣고 귀가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네요.
Comment '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