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찰견
잔월과 한자강은 담두천 사부와 사모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초면에 으레 건네는 덕담 대신 엉뚱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부인, 대사형이 반로환동 하셨어요."
담두천 사부는 수전증을 의심할 정도로 손을 심하게 덜덜 떨었으며 헤 벌린 입에서 침이 흐르는 것도 몰랐다.
"대사형, 그간 죽은 척하고 몰래 숨어서 절세신공을 수련했던 거예요?"
사모는 조금 형편이 나았지만, 폭포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눈꼬리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볼을 타고 턱에서 합류했다. 저렇게 울다 곧 말라 죽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사모님, 사부님. 술이 과하신 것 같습니다."
담두천이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술을 마시고 이런 추태를 부린 적이 처음은 아닌 듯했다.
"대사형."
담두천 말은 귓등으로 흘렸는지 사부라는 자가 잔월에게 다가가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나 곧 표정이 이상해졌다. 어린 잔월로선 미처 맛보지 못한 오만가지 감정이 뒤섞여 웃는지 우는지 모호한 얼굴이 되었다.
"부인. 대사형 아닌 것 같습니다."
"아냐. 난 대사형이 업어 키웠어. 대사형 열넷 즈음에 딱 저 얼굴이었어."
"반로환동이라고 해도 키는 줄어들지 않을 텐데요. 키가 작아요."
잔월은 어디 가서 작다는 소리를 들을 키가 아니었다. 진선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담두천은 이미 내려다보는 수준이고 한자강보다도 조금 컸다. 아무래도 대사형이라는 사람보다 키가 작다는 뜻인 듯했다.
'술 엄청 드셨구나.'
잔월 손을 잡은 담두천 사부는 술 냄새를 풀풀 풍겼다. 잔월 키를 재려고 가까이 다가온 사모는 사부보다 한술 더 떴다. 마셔서는 이 정도 냄새를 풍기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혹시 둘이 특별한 무공을 수련하려고 술에 몸을 담그고 사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잔월이라고 했지? 성은 뭐야?"
사모가 기대가 한껏 담긴 애타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성을 모릅니다."
둘은 다리 부러진 새끼 노루를 본 늑대 눈을 하고 득달같이 질문했다.
"부모님 성함을 몰라?"
"네. 외숙공 손에서 자랐습니다."
"고향이 어딘데?"
"화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나이는?"
"곧 열세 살입니다."
"부인, 나이가 안 맞습니다."
사부는 포기하는 듯했지만, 사모의 눈은 여전히 이글거렸다.
"나이 제대로 기억한 거 맞아?"
맞는다고 하면 한 대 후려칠 기세였다.
"그렇습니다."
"생일은 언제야?"
"삼월 초사흘입니다."
둘은 세상이 곧 무너질 것처럼 절망했다. 금이 가득 담긴 자루를 발견했는데 꿈이라는 걸 깨달은 사람 같았다.
"부인, 혹시 형수님 만나기 전에 대사형이 밖에서 사고 친 게 아닐까요? 대사형 정도 인물에 그 나이까지 여자 한 번 안 만나봤겠어요?"
"대사형 그런 사람 아니야. 서안의 어떤 천금이 반년이나 사형 따라다녔는데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얼굴이나 집안이나 형수보다 나은 여자였어."
"술 마시고 실수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도 아니야. 열세 살에 삼월 초사흘이면 형수랑 비슷한 시기에 임신해야 해. 대사형이 그럴 사람으로 보여?"
담두천 사부는 벙어리가 되었다. 어떻게든 대사형과 연관을 만들려고 애썼지만,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대사형은 몰라도 형수 시체는 우리가 직접 확인했잖아. 형수님 기일이 설날이야. 우리가 무덤 파서 시체 확인한 건 일월 중순이었고."
고인을 모독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굳이 무덤을 파서 확인했다. 양팔은 난도질당했지만, 얼굴은 그나마 멀쩡해서 헷갈릴 일이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똑같기는 힘들 텐데. 대사형은 형제는 물론 친척도 없는 천애고아라고 했어. 세상이 넓다지만, 저런 얼굴이 둘 태어날 가능성이 있을까?"
아니라고 단호히 부정했지만, 미련이 남기는 사모도 마찬가지였다.
"대사형 피를 물려받았다면 느낌이 있지 않을까요?"
"무슨 느낌?"
"자, 내 말 잘 들어. 독고경천, 독고경천, 독고경천."
담두천 사부는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독고경천을 세 번 반복했다.
"어때? 막 그립거나 친근하거나 그런 느낌 없어?"
잔월은 고개를 저었다. 난생처음 듣는 이름이었고 하늘이 놀랜다는 뜻이 멋지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묘연향, 묘연향, 묘연향. 뭉클하고 그립고 뭐 그런 거, 그런 거 없어?"
잔월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미운 정이 들 대로 든 묘운계 묘운구 두 멍청이가 얼핏 생각나긴 했지만, 둘은 뭉클하고 그립고 그런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 봐봐."
사모가 갑자기 훌쩍 뛰어 넓은 마당 중간에 섰다. 술에 취한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힘차고 정확한 동작으로 육합권을 펼쳤다. 담두천이 펼치던 육합권보다 훨씬 훌륭했다.
세밀하게 초식을 펼치는 모습은 마치 단단하게 뭉친 물방울 같았다. 강한 힘에도 흩어지지 않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대사형이 나한테 직접 가르친 형의육합권이야. 뭐 익숙하고 끌리고 그런 느낌 없어? 너도 따라 해 봐."
잔월은 강요에 못 이겨 육합권을 펼쳤다.
"봐. 대사형 핏줄이 틀림없어. 처음 보는 무공을 막 따라 하잖아. 육합권이 피로 전해진 게 틀림없어."
"사모님, 사부님. 육합권은 제가 가르쳤습니다."
"헛소리. 너보다 백배 천배 훌륭한데?"
"저야 기본만 가르쳤고, 워낙 잔월이 자질이 출중해서."
기어드는 소리로 대답하는 담두천 얼굴을 보니 상처를 여간 받은 게 아니었다.
더이상 확인할 거리가 사라지자 담두천 사부와 사모는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했다. 사부가 대사형 핏줄 맞는다고 하면 사모가 반박하고, 그러다 사모가 대사형 핏줄이 틀림없다고 하면 사부가 반박했다.
"맞다. 저녁 먹어야지. 두천이 처음 친구 데려왔는데 오늘 솜씨 좀 부려야겠다."
담두천 사부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엌으로 향했다.
"사모님, 사실은 잔월이 외숙공 찾으려고 강호에 나왔습니다. 재주가 하늘에 닿으신 사모님과 사부님 도움을 받으면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왔습니다."
사모가 또 눈물을 흘렸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외숙공 손에서 자랐다는 아인데,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외숙공을 찾아 강호에 나섰다는 말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우리 두천이만큼 불쌍한 아이구나."
"그래, 자초지종을 얘기해 보아라."
잔월은 다섯 살 무렵 외숙공과 헤어지게 되었는데 백마사가 불타면서 편지가 사라져 부모의 정체는 물론 외숙공이 있는 곳도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부인. 잔월 이 아이는 분명히 우리와 인연이 있는 듯싶습니다. 우리가 잔월 의부모가 되어주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지 말고 셋 다 양자로 들이자."
잔월과 한자강 그리고 담두천은 술을 붓고 절을 올려 둘을 의부모로 모셨다.
"나는 상관중이고 너희 의모는 혁소혜라고 한다."
"애들한테 뭔 비밀이야. 난 상관소혜고 너희 의부는 혁중이다. 우린 종남파 제자였는데 내부 다툼 때문에 사형제를 대부분 잃고 여기 숨어서 지낸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잔월은 넘기기 바쁘게 내공이 술기운을 흩어버려서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담두천은 어느새 취기가 올라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
한자강은 팔을 허우적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힘을 잔뜩 준 목소리는 별로였지만, 노래 솜씨는 의외로 괜찮았다.
이튿날, 해가 궁둥이를 비출 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일어났다. 그간 돈 아끼려고 노숙만 했고 낮엔 경공 수련이랍시고 계속 뛰어다녔다. 마지막엔 배를 탔지만, 배는 타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자. 아침에 우리가 상의했는데, 외숙공 찾는 일은 우리한테 맡기고 너희는 무공 수련이나 해라."
"저희도 돕겠습니다."
"우선 화산에 가서 잔월이 어릴 적 살던 곳을 뒤져 단서를 찾을까 한다. 어제도 말했다시피, 우린 종남파에서 반역자 취급을 받는다. 종남 무인을 만나면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데, 너희 세 햇병아리를 데리고 다닐 정도로 우리가 무공이 강한 게 아니야."
종남과 화산 거리는 삼백 리 정도 되었지만, 종남 제자들이 가끔 화산에서 절벽을 기어오르는 수련을 하기에 맞닥뜨릴 가능성이 컸다.
잔월이 낙안봉에 살 때는 검선 일맥을 정리하면서 생긴 여파에 내부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수련하러 화산을 찾지 않았다.
"우린 빙련기공이라는 특별한 내공을 익혔고, 이 기공을 이용한 특별한 무공을 익혔다. 너희에게 가르칠 건 형의육합권하고 경공밖에 없구나."
둘은 며칠 동안 육합권을 가르치고 경공 구결을 말해주고 풀이해줬다.
월영고랑 밑에서 수련한 덕분에 육합권을 배우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담두천도 귀에 익을 정도로 들었던 사모의 가르침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경공 역시 얼치기로나마 배운 적 있어서 습득이 빨랐다. 잔월이 섬전도에서 어려운 걸 빼고 가르친 경공보다 둘이 가르친 경공이 훨씬 체계적이어서 담두천과 한자강의 경공 실력은 며칠 사이에 일취월장했다.
잔월 역시 대문파에서 정석을 밟아가며 배운 사람의 구결 풀이를 들으니 섬전도의 구결들이 더 잘 이해되었다. 글자와 단어들이 면사포를 벗고 은밀히 숨겼던 의미를 잔월에게 보여줬다.
비록 실질적인 변화는 없었지만, 경공과 보법에 관한 이해가 깊어지며 가장 큰 혜택을 받았다.
"화산 돌아본 다음 낙양에 가서 수소문하고 돌아올 것이다. 혹시 다른 단서 있느냐?"
"외숙공이 예전에 자신이 강릉에서 엄청 유명한 의원이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일 수도 있어서 확신하긴 힘듭니다."
"강릉? 형수님도 강릉 출신이잖아."
"형수님은 대리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친정이 강릉이라고 하더군요. 실질적으로 강릉에 산 건 반년 정도고, 대사형과 강릉에서 만나 혼인을 결심하고 종남까지 따라왔다고 하더군요."
대사형에 관한 건 혁중이 전문가기에 상관소혜는 입씨름하지 않았다. 대사형에게 업혀 자란 상관소혜지만, 혁중보다 더 많이 그리고 정확히 안다고 감히 자부하지 못했다.
"요새 무극존자 때문에 강릉 일대가 번잡하니 거긴 다음에 가보자. 우선 확실한 화산부터 가보고, 돌아오는 길에 낙양 들르면 되겠다."
담두천에게 은자를 넉넉히 맡기고 상관소혜와 혁중 부부는 화산으로 떠났다.
셋은 육합권보단 경공 수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잔월은 도법을 주로 익힐 생각이고 자강과 두천은 자강두천이라는 훌륭한 권법이 있다. 육합권 수련도 게을리하진 않았지만, 수련 중점은 경공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구결 이해를 높인 잔월이 예전보다 훨씬 좋은 조언을 많이 건넨 덕분에 경공 성취가 봄날의 죽순처럼 쑥쑥 달라졌다.
正體 정체를 밝힐 기회가
擦肩 어깨를 스쳤다
- 작가의말
예전에 어떤 분이 독자들은 아는데 주인공만 모르는 상황이 나름 재미를 유발할 수 있다는 조언 달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린 다 아는데 작중 인물들은 모르는 상황을 꾸며봤습니다.
댓글로 주신 지적과 조언은 대부분 기억하고 글에 반영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니 지적과 조언 아끼지 말아 주십시오. 제 기억에 남는 지적과 조언이라면 당장 이 글이 아니더라도 언젠간 반영될 겁니다.
Comment '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