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승·파벽
무일푼이라는 단무전의 말에 경인 대사는 정체 모를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를 소개했다. 잔월이 부처께서 자신을 일깨우려고 보낸 나한이라는 생각이 굳은 경인은 단무전도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고 여겼다.
괴이한 병에 고생하는 왕 원외의 아들이 생각나서 단무전을 소개하기로 했다. 왕 원외는 흉년이 들 때마다 백성들에게 구휼미를 나눠주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재물을 아끼지 않는 의인이었다.
백마사 유일의 무승으로서 내공으로 치료에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낙양과 근방의 유명한 의원들도 병명조차 서로 다르게 말할 정도로 괴이한 병에 걸렸다.
"와. 이게 다 왕 아저씨 거예요?"
경인 대사의 전갈을 받은 왕 원외가 직접 백마사를 찾아 단무전을 모셨다. 마차가 장원에 도착하고 잔월이 경탄했다.
"우리 집은 넓기만 하고 집은 한 채밖에 없는데."
잔월은 눈에 보이는 곳이 모두 자기 집이라고 여겼다. 단무전이 지은 목옥을 제외하고도 대충 풀과 흙으로 지은 집 몇 채가 있었지만, 거기에 사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집이라고 하기엔 지붕도 구멍이 숭숭하고 벽도 온전치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잔월은 커다란 흑마에게 다가가 앞다리를 쓸어줬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흑마가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지 아는 왕 원외는 잔월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마부도 가끔 걷어차려 하는 성질 더러운 흑마가 얌전히 쓰다듬을 받는 걸 보고 더 매우 놀랐다.
'아이도 저렇게 출중한데 이 의원은 얼마나 신통할까.'
덕망이 높은 경인 대사가 소개한 의원이라 기대가 컸는데, 잔월이 보인 모습에 기대가 한층 부풀었다.
흑표는 비록 웬만한 고양이보다도 작은 몸집이지만, 태생은 맹수였다. 몸집이 작은 덕분에 토끼 굴로 직접 들어가서 사냥하기도 했다. 그래서 오히려 덩치가 큰 어미보다 사냥에 자주 성공해 늘 배불리 먹었다.
게다가 임신한 표범과 매일 접촉했던 잔월의 몸엔 맹수의 향이 배어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흑마가 얌전한 건데, 왕 원외가 단무전을 무턱대고 신임하는 계기가 되었다.
왕 원외는 더욱 은근한 태도를 보였으나 어려서부터 의원을 하는 조부와 아버지가 환자에게 떠받들리는 걸 보면서 자란 단무전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그러한 태도는 왕 원외의 경외심을 한층 키웠다.
"호흡이 가쁜 걸 보니 금의 기운이 부족해요. 폐가 아픈 거 같아요."
왕 원외의 외동아들을 보자마자 잔월이 외쳤다. 예전에 비슷한 증상의 환자를 단무전이 진맥한 적 있었다. 그때 했던 말을 기억한 잔월이 앵무새처럼 외운 것뿐이지만, 그러한 사정을 알 턱이 없는 왕 원외는 벌써 아들이 낫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다.
"으흠."
환자의 손목에서 손을 뗀 단무전이 이마를 한껏 찌푸리자 왕 원외의 심장이 버벅거렸다.
"치료하는 데 반년은 족히 걸리겠습니다. 그리고 아드님이 급한 게 아닙니다."
"네?"
"원외께서도 병을 앓고 있습니다. 아픈 데 없어서 모르시는 것 같은데, 얼굴색이 자주 변하는 걸 보면 심장에 한기가 찼습니다."
단무전의 말에 왕 원외는 물론 왕 원외의 부인과 모친도 소스라치게 놀라 얼굴색이 변했다.
"아이고, 부처님이 우리 집안 구하려고 보살님을 보내주셨어."
왕 원외의 친모인 대부인이 지팡이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남편이 멀쩡하다가 갑자기 죽어버린 예전 기억이 떠올라 단무전의 말에 겁이 더럭 났다.
손자도 기식이 엄엄한데 아들도 아프다는 말에 평정을 잃은 대부인은 단무전을 보살이라고 추켜세웠다. 사정이 딱한 환자일수록 의원을 신성시하는 경향이 심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하나밖에 없는 손자여서 대부인은 단무전이 부처님으로 보였다.
"대부인, 사람을 구하는 건 의원이 응당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필요한 약재를 적어 드릴 테니 얼른 치료부터 시작합시다."
대부인을 진정시킨 단무전은 지필묵을 달라 하여 처방을 세 개 적었다.
"이건 급하게 구해야 하는 약재요. 왕 원외를 치료할 약재로 보름 안에 구해주시오. 더 늦어도 치료할 수 있지만, 그러면 원외의 고통이 커질 것이오."
대총관이 사람을 불러 약 처방을 필사하게 했다. 여러 노복이 약 처방을 들고 낙양에 있는 약재상들을 방문했다.
"이건 왕 공자를 치료할 약재요. 급한 건 아니지만, 빨리 치료할수록 치료 기간이 짧아지고 공자가 받는 고통도 줄어들 것이오. 이 몇 개는 추운 북방에만 나는 약재인데, 혹시 낙양에서 못 구하면 북으로 가서 구하시오."
마찬가지로 약 처방을 필사해서 여럿이 들고 나갔다.
"이건 보조용 약재로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요. 그래도 웬만하면 구하는 게 좋을 거요. 이 약재들은 최상급으로만 구해야 하오."
심장과 폐의 기운을 보충할 약재도 있었지만, 잔월의 만독불침과 금강불괴를 이루는 데 필요한 약재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말해도 반드시 구해올 것을 알기에 짐짓 중요하지 않은 척 가볍게 얘기했다.
단무전과 잔월은 왕 원외 일가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심장에 한기가 찼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왕 원외는 가끔 심장에서 통증을 느꼈다.
며칠은 걸릴 거로 생각했는데, 이튿날 아침 일어나니 왕 원외를 치료할 약초가 전부 모였다. 여럿이 동시에 구하러 나갔기에 일부 약재는 필요 이상으로 많았다.
"신의. 심장에 한기가 찼는데, 굳이 침을 여기까지 놓으셔야겠습니까."
의외로 왕 원외는 겁이 많았다. 손가락과 발가락에 침을 놓는다는 말에 부들부들 떨며 애원했다.
"십지연심(十指連心)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손가락 발가락은 경맥을 통해 심장과 연결되었습니다. 여기에 침을 놓고 약 기운을 전달하는 게 심장에 침을 박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겁 많은 환자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아는 단무전은 살살 달래는 대신 으름장을 놓았다. 안 아프다고 설득하는 것보다 더 아픈 대안을 제시해 마지못해 받아들이게 하는 게 훨씬 빨랐다.
심장에 침을 박는 게 더 무서운 왕 원외는 눈을 꼭 감았다. 아프지는 않지만, 침이 손가락 발가락에 꽂히는 느낌은 소스라치게 싫었다.
침을 혈도에 정확히 꽂은 단무전은 금속 실 세 개를 침에 연결한 후 내공을 움직였다. 단무전의 내공은 왕 원외의 오른손에서 출발해 왼손으로 나왔다.
전혀 수련하지 않은 일반인이지만, 평소 잘 먹었기에 혈도가 막힘 없었다. 운기 연습을 마친 단무전은 잔월에게 지시했다.
"발가락에 박힌 침에 약을 바르거라."
붓을 든 잔월이 약물을 푹 찍어 왕 원외의 발가락에 듬뿍 발랐다. 약초가 필요한 양의 몇 배는 되기에 아낄 필요가 전혀 없었다.
"약물이 마르지 않게 자주 발라줘라."
말을 마친 단무전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여러 혈도를 자극해 발가락의 약초 기운을 심장으로 끌어들여 한기를 건드린 후, 내공으로 조금씩 뽑아내야 한다.
"어허허, 추, 추워."
심장의 한기가 조금씩 왼팔로 움직이자 왕 원외가 추위에 떨었다. 뜨거운 피가 담긴 심장에 있을 땐 몰랐는데, 왼팔로 보내니 그제야 차가움을 느꼈다.
왕 원외의 왼손으로 빠져나온 한기는 단무전의 몸에 들어갔다. 기성해 수법으로 한기를 밖으로 배출한 단무전도 추위에 살짝 떨었다.
'병으로 얻을 수 있는 한기가 아니다. 내가 모르는 독이 분명하구나.'
치료를 중단한 단무전은 대총관을 불렀다.
"치료가 힘에 부치니 백마사에 가서 경인 대사를 불러주시오."
대총관이 급히 사람을 백마사에 보냈다. 경인 대사는 왕 원외의 치료에 자신이 필요하다는 전갈을 받고 두말없이 달려왔다.
[대사, 호법을 부탁드립니다. 누군가 왕 원외를 해하려 합니다.]
경인 대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 앞에 정좌했다. 문과 창문 모두 남쪽에만 있는 방이어서 문을 막으면 누구도 침입하기 어려웠다.
경인 대사가 지켜주자 단무전은 시름을 놓고 치료에 전념했다.
단무전이 금속 실로 내공을 주입하는 재주도 신통하지만, 경인의 주의는 온통 잔월에게 쏠렸다.
'손에 잡힌 붓이 일절 떨리지 않는다. 약초 달인 물을 마구 찍는 것 같지만, 매번 비슷한 양을 묻혔다. 보통 저 나이면 붓을 움직일 때 손목을 움직이기 마련인데, 손목과 팔꿈치는 고정하고 어깨만 움직였다. 붓에 힘도 실리고 정확도도 높은 방식이다. 아직 무공 이론을 배울 나이도 아닌데 몸으로 깨우쳤군.'
보면 볼수록 탐났다. 어제 겨우 버렸던 탐욕이 다시 머리를 추켜들었다.
'이건 부처님의 시험이다. 흔들리지 말자. 백마사의 계율을 어기려는 것도, 원치 않는 자에게 제자가 되어달라고 강요하려는 것도 다 심마다.'
경인 대사는 혼자만의 싸움을 벌였다.
'벌써 반 시진은 되는데 둘 다 지치지 않는구나.'
반 시진이나 운기 하는 단무전도 대단했다. 잔월의 금강불괴와 만독불침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운기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반 시진이나 팔꿈치와 손목을 고정하고 붓을 놀리는 잔월이 훨씬 경이로웠다.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른도 하기 힘든 일인데, 잔월은 쉽게 해냈다.
'나는 저 나이 때 오줌도 못 가렸는데.'
기억은 안 나지만, 백마인을 전수한 사부님의 말에 따르면 경인은 네 살까지 오줌을 못 가렸다고 했다. 하루에 빨래 세 번씩 했다는 말은 결코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무공을 수련하다 넘어지기 일쑤였다고 하셨지.'
균형이 뛰어나다고 늘 칭찬받는 경인이었지만, 어릴 때는 수련하면서 자주 넘어졌다.
'심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무작정 밀어내는 게 해결책은 아니다.'
경인 대사는 비우고 비우고 또 비웠다. 그러다가 비울 수 없음을 인정했다. 비우는 게 불가능하지만 비우려고 노력해야 함도 깨달았다.
호법을 서야 할 경인 대사가 무아지경에 빠져 머리에서 김을 모락모락 피웠다.
치료를 통해 잔월은 금기서화에서 서화의 재능을 확인했고 단무전은 신의가 되었다. 왕 원외는 완치했으며 경인은 오랜 기간 앞을 가로막았던 벽을 허물고 한 단계 뛰어올랐다.
일정 수준이 되면 무공 초식이나 내공 그리고 몸의 단련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백마사 유일의 무승이어서 평소 교류도 없이 혼자 고심해야 했던 경인은 잔월에 대한 오해를 계기로 자신을 가두던 굴레를 벗어버렸다.
물론, 잔월은 이미 준비를 마친 경인의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치료가 끝난 시각, 낙양의 어느 자그마한 장원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죽통을 다리에 달고 날아올랐다. 방향은 서남쪽이었다.
庚寅僧 경인 스님
破壁 벽을 허물다
- 작가의말
구인류. 이대로 놓치기엔 너무 아쉽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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