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곡·오독교
취접의 내공이 흉포하게 날뛰는 데 반하여 백원선사의 내공은 물처럼 부드럽게 흘렀다. 이번에도 백원선사가 먼저 내공 다스림을 끝내고 취접을 기다렸다.
"접평산(蝶平山)이오."
나비의 날갯짓으로 산을 없앤다. 미약한 날갯짓을 얼마나 반복해야 산 하나가 사라질지 상상하기도 아득했다.
그만큼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뜻이었다.
"아미결(峨嵋結)."
백원선사는 산이 되었다. 화산, 숭산, 무당산, 곤륜산. 산마다 느낌이 달랐다. 잔월은 백원선사가 아미산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비의 날갯짓이라고 하기엔 너무 강한 공격이 산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아 보이는 백원선사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덮쳤다. 묵묵히 공격을 받아주는 백원선사가 오래 못 버틸 것 같았는데, 의외로 반 각이 지나서도 파탄을 드러내지 않았다.
'산이 하나가 아니다.'
공격 몇 개 막고 나면 산이 바뀌었다. 산 하나로 모든 공격을 받는 게 아니라 산 두 개로 엇갈아가며 공격을 받아냈다.
'단전이 두 개니깐.'
두 단전이 번갈아 쉬면서 취접의 첩경을 받아냈다. 취접의 내공이 훨씬 많지만, 백원선사는 두 단전 중 하나가 쉬면서 회복할 수 있었다.
"봉황내의도 이걸로 받아낸 거요?"
"그렇소."
"나랑 무극존자, 누가 더 상대하기 어렵소?"
대화하면서도 취접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봉황내의는 산사태 같았소. 한꺼번에 강하게 몰려와서 순식간에 지나갔소. 당신은 지진과 비슷하오. 강하게 오진 않지만, 쉬지를 않소."
백원선사가 잠시 고민하고 대답했다.
"집중력이 높은 자는 무극존자가 쉬울 것 같소. 아주 잠깐 모든 걸 모아서 버티면 되니까. 내공이 많거나 훌륭한 수비 초식을 갖춘 자는 당신이 쉬울 거요."
취접이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백원선사도 얼굴 앞에 모은 두 손을 단전까지 내리며 아미결을 거뒀다.
"제길. 무극존자는 운으로 막아야 하고 난 실력으로 막아야 한다는 뜻이군."
백원선사와 대결하며 깨달은 게 있는지 취접 표정이 어둡지만은 않았다.
"아미에서 제자 삼십 명 준비했소. 그대들과 함께 무당산에 갈 것이오."
아미 제자 삼십 명이 무당으로 가는 일행에 합류했다. 황실 출신들은 대하국 황제 명옥진에게 보냈다. 대성당 역시 작별을 고하고 섬라로 떠났다.
잔월과 당한백 그리고 칠신병은 따로 움직였다.
"무극환허인 익히게 하는 약물을 만든 게 오독교가 틀림없소. 운기 방법은 알려질 수밖에 없으니 약물만큼은 어떻게든 비밀로 하려는 속셈이겠지."
셋은 무리에서 떨어져 대리의 독곡으로 달렸다. 공손가는 두 무리로 나뉘어 하나는 대리로 향했고 하나는 귀주로 향했다.
"대리는 틀림없이 독곡이 목적이오. 귀주로 간 무리는 은밀히 쫓고 있소. 운룡곡으로 가는 경로가 한둘이 아니니 아직 확신은 어렵소."
"운룡곡이 엄청 크다는 말이오?"
"그건 아니오. 운룡곡으로 가는 길은 동굴이오. 걷기도 해야 하고 가끔은 배도 타야 하오. 군데군데 진법까지 있어서 누구도 안의 길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오. 나올 때도 마찬가지로 정신을 차려보면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곳이라고 하오."
"배화교가 중원으로 온 게 당나라 때라고 들었소. 멸세교가 생긴 건 더 뒤의 일이고."
잔월은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운룡곡과 심마해를 감싼 진법이 제갈무후가 쓴 팔진도해의 두 진이라고 하는데. 그 두 진은 제갈무후가 만든 거요? 아니면 그 후손이 만든 거요? 무곡진도 그렇고 목적이 무엇이오?"
석경협에 있던 오양월음진도 생각났다.
"나도 모르오. 제갈속도 제대로 모르는 눈치였소. 운룡곡주라면 알겠지."
제갈무후가 천 년 전에 지금 상황을 예상하고 대비했다는 건 너무 비약이었다. 그러나 장삼풍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니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쉬는 게 좋겠소. 칠신병도 기운 좀 가라앉히시오."
잔월은 통혈지체와 옥녀공 덕분에 괜찮았지만, 매일이다시피 내공을 사용한 당한백과 칠신병은 기운이 심하게 날뛰었다. 몸이 지치면 생각대로 안 따르는 것처럼 내공도 너무 과하게 쓰면 통제를 벗어난다.
마침 가을이어서 새나 작은 동물들이 살을 찌워 맛있는 시기였다. 잔월은 주변을 돌며 사냥하여 배를 채울 고기를 얻었다.
피와 내장을 빼고 적당한 불로 구웠다. 날뛰는 내공을 구슬려 제압한 당한백과 칠신병은 눈을 뜨기도 전에 코를 찌르는 고기 냄새에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양념은커녕 소금조차 없었지만, 셋 모두 고기를 맛있게 뜯었다. 내친김에 차가운 물에 몸도 씻고 머리도 시원하게 감았다.
"쉬어도 괜찮아?"
칠신병은 너무 느긋해 보이는 잔월에게 질문했다.
"무곡산장은 우리보다 더 지쳤을 거야. 오독교가 무공은 약해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너무 조급할 필요는 없어."
"오독교랑 무곡산장 같은 편이잖아."
둘이 싸울 것처럼 얘기하자 칠신병은 머리가 아팠다.
"오독교가 마음이 고와 공짜로 해줬겠어? 다 얻어가는 게 있었던 거지. 만약 무곡산장이 정말 멸세교가 있는 심마해로 갈 생각이라면 아마 오독교에서 약물에 들어가는 약초와 배합을 알아내려고 할 거야. 그리고 입막음까지 하겠지."
"원래 둘이 친했는데 무곡산장이 오독교 걸 빼앗으려고 한다는 말이지?"
잔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칠신병이 유난히 기뻐했다.
"나 점점 똑똑해지는 거 같아."
적당히 휴식하고 경공을 펼쳐 독곡으로 달렸다. 조금 달리다 잔월이 칠신병에게 가르침을 내렸다.
"칠신병. 기침단전 잊지 마."
"갑자기 왜?"
"내공은 단전이 집이야. 그런데 계속 밖을 돌아다니게 하면 집 돌아가는 걸 잊어버려. 경공 펼칠 때 기침단전해서 밖으로 돌아다니는 내공을 최소화해야 쉽게 지치지 않아. 안 그러면 집 나간 내공들이 계속 밖에서 돌면서 네가 쓸 내공이 줄어드는 거야."
"요건 조금 어렵다. 내일도 얘기해 줘."
나이가 어린 잔월이 곧 이립을 바라보는 칠신병을 어린아이처럼 가르치는 모습에 당한백은 무척 재밌었다. 역할이 바뀐 거 같은데 또 너무 어울렸다.
강호의 일을 잘 모르고 조금씩 돌려 말하면 가끔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건 경험이 부족한 것뿐이었다. 깨달음의 깊이는 당한백도 감탄할 정도였다.
"영웅은 삼처사첩이 기본인데 말이야."
너무 크게 하는 당한백의 혼잣말에 잔월은 물론 칠신병도 얼굴을 찡그렸다. 너무 들어 신물이 올라올 정도였다.
셋은 꼬박 하루 걸려 독곡 근처에 도착했다. 독곡 주변의 밀림은 아름드리나무가 빼곡하고 바닥은 부식토가 두껍게 쌓였다. 세 걸음에 한 번씩 독충이나 뱀이 보일 정도로 독물이 넘치는 곳이었다.
"아니. 이 많은 독물이 뭘 먹고 살지?"
아무리 둘러봐도 식량으로 삼을만한 것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독물들끼리 잡아먹는 거요. 그렇게 강한 독이 살아남는 거지."
뱀이 분명한 흰 뼈에 개미가 바글거렸다. 한쪽엔 개구리인지 두꺼비인지 구분이 힘든 덩치 작은놈이 자기 몸통보다 몇 배는 긴 지네를 삼키고 있었다.
전체적으론 고양이를 닮았지만, 머리가 삼각형으로 뾰족한 작은 짐승이 발톱으로 뱀 가죽을 찢은 후 혀로 살을 핥아 먹었다.
"독물을 전문 잡어먹고 사는 놈들이 있었을 거요. 독곡은 그런 것들을 다 잡아 죽여서 이곳에 독물이 넘쳐나게 만든 거고."
"당 대협 가문도 독에 조예가 깊은 듯하던데. 혹시 흑룡곡이라는 곳에도 독물이 넘치오?"
"해약이 없는 독은 만들지 않는 게 우리 가문의 철칙이오. 독물에서 채취한 독은 성질이 다양하여 해독약을 일일이 만들기 어렵소. 우린 독물이 아닌 독초와 광석을 배합하여 독을 만드오."
"무형지독이 위험한 게 그 때문이지. 완성하고 해약을 연구하려 했는데 완성하기도 전에 훔쳐 갔소. 제갈속 덕분에 무곡산장이 범인이라는 걸 알고 찾으러 간 거요."
당한백의 말을 들은 잔월은 언뜻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설마 당문과 무곡산장도 사돈을 맺은 거요?"
"무곡산장 출신은 아니지만, 공손의 성을 쓰는 여인과 혼인했소. 그 여인이 바로 내 어머니요. 가족의 죄를 씻으려고 내가 이렇게 동분서주하는 거요."
당한백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는 무형지독을 훔친 사람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잔월은 뭔가 캐물으려는 칠신병에게 전음으로 입 다물라고 말했다.
"괜찮소. 어차피 얼굴도 못 본 사이요."
당한백이 여유롭게 웃었다. 그러나 잔월은 물론 칠신병도 괜찮지 않음을 눈치챘다.
"무공이 아무리 강해도 독물이 득실대는 이곳으로 들어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오. 그리고 무공이 약하면 여길 뛰어넘지 못하겠지."
잔월은 만독불침 덕분에, 당한백과 칠신병은 피독주에 의지하여 독물이 득실대는 밀림을 뚫고 독곡 근처에 이르렀다. 그러나 독곡에 들어가려면 엄청 넓고 깊은 골짜기를 건너뛰어야 한다.
"두 가지 조건을 다 만족하는 자라면 굳이 몰래 침입할 이유가 없지. 정면으로 당당하게 들어가도 되니까. 그러나 우린 무극환허인을 익히게 하는 약물 배합을 아는 자가 몇인지 알아내고 모조리 입막음하는 게 목표요."
칠신병은 눈을 껌뻑이며 당한백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보다 못한 잔월이 나섰다.
"칠신병. 몰래 엿들어야 하는 말이 있으니 싸워도 된다고 말하기 전엔 기척 숨기고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말이야."
"그냥 다 죽이면 되잖아."
"그건 마지막 수단이야. 꼭 죽여야 하는 자가 아니면 웬만하면 살려두는 게 좋아."
셋은 꽤 넓은 골짜기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칠신병은 심법을 가르친 사부의 내공을 모두 건네받았다. 특별한 체질만 익힐 수 있는 심법이어서 전해 받은 내공을 자기 것처럼 쓰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심후한 내공만으로도 절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오독교에선 잔치가 한창이었다. 뱀, 전갈, 지네 등을 구운 요리와 독물을 담가 만든 향기로운 술이 곳곳에 널렸다. 오독교와 무곡산장 무인들이 즐겁게 어울렸다.
"저기가 교주 거처 같소."
셋은 기척을 숨긴 채 가장 화려한 집으로 움직였다.
[지붕은 들키기 쉬우니 처마에 붙어야 하오.]
당한백은 전음을 마치자마자 처마 밑에 바싹 붙었다. 구렁이처럼 몸을 꿈틀이며 부드럽게 움직였다.
[칠신병, 넌 저기 숨어라.]
전혀 빛이 들지 않는 담벼락 구석에 숨도록 지시를 내린 다음 잔월 역시 처마에 붙어 당한백 뒤를 따랐다.
"공손 대협. 교주께서 대협의 인품에 아주 감탄했다고 합니다."
"나도 교주의 넓은 견식에 감복했다고 전해주시오."
안에는 오독교 교주와 소교주 그리고 공손용기까지 셋이 있었다. 소교주가 교주와 공손용기 사이에서 통역을 맡았다.
"이번에 방문한 이유는 무곡산장에 변고가 생겼기 때문이오. 한동안 잠적해야 하니 약물 배합을 알려주시오. 내가 비싼 값 치르겠소."
毒谷 독곡에 사는
五毒敎 오독교로 가다
- 작가의말
“약물 배합?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교주가 버럭 화를 냈다.
“소교주는 나가 있어. 뒤지기 싫으면.”
“고맙다. 용기야.”
“공손용기. 어차피 우리가 약을 만들어도 얼마 못 벌어. 최저시급 또 오른대. 거기에 공장 건물주가 임대료 올리겠단다. 마진은 어차피 너희 유통이 다 먹잖아. 우리 같이 살자. 나 마누라만 넷이고 새끼가 열이 넘어. 응?”
“개소리 말고 약물 배합 넘겨. 살려는 드릴게. 버닝문이 털리면서 이번에 우리도 출혈이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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