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무림대회
옥녀공과 기성해가 합쳐지면서 잔월의 몸은 엄청 튼튼해졌다. 단순히 타격을 견디는 능력만 강한 게 아니라 혈도가 엄청 질기게 변했다.
진정한 단전은 하나지만, 단전 역할을 일부라도 하는 혈도가 수두룩해서 기의 흐름이 무척 자유로웠다. 무혈지신의 전 단계인 통혈지신과 흡사한 상태가 되었다.
혈도가 사라지는 무혈지신으로 가기 전인 통혈지신은, 임의의 두 혈도가 서로 이어지는 데 최대로 여섯 혈도만 거치는 걸 말한다. 발바닥의 용천혈부터 머리의 백회혈까지 기껏해야 여섯 혈도만 거친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
잔월은 아직 그 경지가 요원하지만, 기의 출발점이 수십이기에 통혈지신과 비슷한 효과를 보였다. 웬만큼 복잡한 운기법도 여러 갈래로 나눠서 동시에 하기에 운기가 엄청 빨랐고, 설혹 운기에 실패해 내공이 역류해도 수많은 혈도가 분담하기에 단전에 큰 부담이 없었다.
섬전도는 내공을 빨리 돌려 신형이 사라졌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순식간에 이동하는 보법이 있었다. 기성해 덕분에 경지가 부족한 잔월도 사용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운기법을 나눠서 쉽게 펼치다 보니 섬전도의 경신법과 보법을 팔 성에 가깝게 익혀냈다.
물론, 경지나 깨달음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효과가 그 정도 된다는 뜻이다.
"흑표, 너 경공 배워보지 않을래?"
품에 안은 흑표 때문에 달리면서 보법을 수련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위치를 바꾸는 섬전도의 보법에 흑표가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흑표는 무공에 흥미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흑표 너도 외숙공 보고 싶지?"
흑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외숙공 가까이 있으면 냄새로 찾을 수 있어?"
흑표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오래되어 단무전 냄새를 까맣게 잊었다.
낙양에 도착한 잔월은 왕가장에 들려볼까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어찌 됐든 왕가장과 무곡산장은 가까운 사이다. 그리고 외숙공을 찾는 데 왕가장은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외숙공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한 건 강호의 일과 연관된 게 틀림없었다.
원나라는 무풍(武風)이 강하기에 병장기 휴대를 제한하지 않았다. 덕분에 칼을 등에 멘 잔월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않았다.
백마사에 도착한 잔월은 경인 스님을 뵙고 싶다고 스님에게 말했다.
"주지 스님은 소림사의 요청으로 소실봉에 가셨습니다."
허탕을 친 잔월은 나루터에 가서 개봉으로 가는 배를 찾았다. 거리도 상대적으로 가깝고 둘 다 중원에서 사람이 몰리는 도시기에 오가는 배가 많았다. 뱃삯을 적당히 부르는 배 하나 골라서 개봉으로 향했다.
배를 타고 가면서 곧 무너질 듯 가파른 양쪽 절벽이 잔월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반나절 만에 도착한 개봉은 낙양과 다른 느낌이었다. 낙양이 아름답다는 느낌이라면 개봉은 투박하지만 단단한 느낌을 줬다. 개봉 시내를 다 돌아다니진 않았지만, 찾는 객잔마다 방이 없다고 했다.
"다행히 준비를 다 해왔지."
자면서도 운기가 되기에 굳이 이불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울퉁불퉁한 땅에서 자는 건 운기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깔고 잘 두꺼운 가죽을 준비했다. 그리고 흑표가 덮을 솜을 넣어 만든 작은 이불도 있었다.
개봉성 서쪽에 있는 작은 숲에서 적당한 공터를 찾아 자리를 잡고 모닥불을 피웠다. 마른 나무를 부스러뜨린 후 손에 내공을 집중해 불을 지폈다.
"된다. 됐다."
흑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잔월을 낯설게 바라봤다. 그러나 잔월은 흑표의 눈빛을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무극존자가 손으로 모닥불 피우는 걸 보고 엄청 부러웠었는데, 자신도 성공하니 날듯이 기뻤다.
누구한테 배운 건 아니고 잔월이 직접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낙양으로 향하는 중에 몇 번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는데, 최근 섬전도에서 얻은 깨달음을 적용하니 바로 성공했다.
'빠르다는 건 엄청난 힘이구나. 내공을 빠르게 움직이니 나무에 불도 붙였어.'
옥녀공으로 몸이 엄청 튼튼한 잔월만 시도할 수 있는 무식한 방법이었다. 무극존자가 기교로 이뤄냈다면 잔월은 힘으로 해냈다. 어렵기는 둘 다 어렵지만, 잔월의 방법이 더 희소성이 강하다. 기뻐할 일은 아니지만.
흑표가 사냥해온 새를 구워서 배를 대충 채웠다. 내공으로 모닥불을 피운 흥분으로 잠이 오지 않아 섬전도를 꺼내 반복해 읽었다. 이미 다 암기한 내용이지만, 눈으로 보며 읽다 보면 가끔 새로운 생각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암기한 내용을 끄집어낼 때는 그런 일이 적었다.
"소형제, 잠깐 온기를 빌려도 되겠는가?"
잔월은 섬전도가 적힌 가죽을 품에 넣으며 흑표를 바라봤다. 놀란 표정을 보니 흑표도 상대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사해는 동도라고 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잔월이 몸을 일으키고 정중하게 대답하자 상대는 감사의 의미로 포권했다.
모닥불 곁에 다가온 사람은 넷이었다. 푸른 무복을 입은 노인과 잔월 또래로 보이는 소녀가 있었다. 그리고 노인 등에 멘 광주리에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 둘이 있었다.
"소형제는 어디로 가는 길인겐가?"
"소림사로 갑니다."
"그 얼굴에 중 되면 참 아까울 것 같은데."
"제가 찾는 사람이 소실봉에 있습니다."
"이런, 초면에 실례했군. 난 천부전이라고 부르네."
누굴 찾느냐고 물어보려다가 아직 통성명도 안 했다는 생각이 들자 노인이 자기 이름을 말했다.
"잔월이라고 합니다."
"천희연이에요."
광주리에 있는 두 아이는 흑표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흑표는 잔월 외의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희연은 내 손녀고 이 두 아이는 희연이 동생이네. 어린 것들이 몸이 안 좋아서 소림사로 치료받으러 가는 길이네. 소림사의 적양공(積陽功)으로 막힌 혈도를 뚫어야 하거든."
천부전은 초면인데도 자신의 목적을 거리낌 없이 말했다.
"저는 지인이 편지를 맡겼는데, 편지를 보관한 사람이 소림사로 갔다고 하더군요."
"다행이군."
천부전은 나이는 많지만 무척 순수했다. 잔월이 안 좋은 일로 소림사를 찾는 게 아님을 알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대화를 조금 나눠보니 잔월보다도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천부전에겐 미안하지만, 한자강이 생각났다.
두 아이가 있는 광주리는 무척 따뜻해 보였다. 천부전은 정좌한 채 잠이 들었고 천희연은 나무 사이에 밧줄 두 개 묶은 다음 그 위에 누워 잠들었다. 잔월이 보기엔 땅에서 자면 옷이 더럽혀진다고 밧줄에서 자는 것 같았다.
잔월도 가죽을 펴고 누웠다. 곁에 누운 흑표에게 솜이불을 덮어준 후 눈을 감았다.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잠은 자지 않았다. 강호에선 늘 조심해야 한다고 강호에 출도한 적도 없는 사부가 신신당부했다.
명상 비슷한 상태로 아침까지 버티다 일어나니 흑표가 어느새 먹을 것을 잡아 왔다. 사람이 여럿이라고 꽤 풍성하게 잡아 왔지만, 천부전과 천희연은 육식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꼬마는 치료받기 전에는 기름진 음식을 멀리해야 한다며 조손 넷이서 쌀가루를 끓여 먹었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애탄 눈으로 바라보는 두 꼬마가 불쌍했다. 그러나 병 치료 때문이라는데 불쌍하다고 고기를 줄 수도 없었다.
"자네 경공 좀 하는가?"
"다른 사람과 비교한 적 없어서 어떤 수준인지 잘 모릅니다."
"미안하네. 우린 사정이 급해서 빨리 가야 하네."
"괜찮습니다."
천부전의 걱정과 달리 잔월은 여유 있게 천부전의 뒤를 따랐다.
"애들을 제가 업어도 될까요? 젊어서 체력이 좋은 편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급한 천부전이 빨리 지쳤다. 아무리 단련된 무인이어도 마음이 평온하지 않으면 내공과 체력이 허투루 소모된다. 천부전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얼마 못 가서 지쳤다.
'강호 경험이 별로 없구나. 사부님처럼 수련만 하신 분 같아.'
천부전은 아무 의심도 없이 아이를 멘 광주리를 건네며 거듭 감사하다고 말했다. 잔월이 광주리를 메고 빠르게 움직이자 천부전도 힘을 냈다. 전보다 속도가 훨씬 빨라졌지만, 마음 부담을 던 천부전은 오히려 호흡이 안정되며 여유가 생겼다.
'왠지 이 노인보다 저 소녀가 경공이 더 강한 느낌이야.'
경험이 일천해 정확히 판단할 수 없지만, 천부전보다 천희연이 내공도 더 많고 경공도 나은 느낌이었다. 만약 천희연이 천부전처럼 덩치가 컸다면 광주리를 천희연이 메고 달렸을 것이다.
"자네 무슨 일인지 아는가?"
소실봉 밑에 있는 등봉현에 도착하니 사람이 북적였다. 대부분이 병장기를 휴대한 걸 보면 단순히 향을 피우고 부처에게 절하러 온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저도 들은 바 없습니다."
천부전은 넉살도 좋게 지나가는 사람 하나 멈춰 세웠다. 그리고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
"무림대회?"
"태공, 저기 사숙입니다."
자세한 내막을 물으려는데 천희연이 지인을 발견했다.
"사백, 사질이 인사 올립니다."
천희연의 사숙은 천부전을 사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잔월이 보기엔 그다지 공경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언질도 없이 여기까지 웬 일이십니까?"
"애들 병 치료하려고 직접 발품을 팔았지."
사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사백, 지금 소림사에서 무림대회를 열었습니다. 아마 치료해달라고 해도 거절할 겁니다."
"출가한 사람은 자비를 품고 산다네. 어찌 천하 불교의 정종을 자처하는 소림이 생명이 위급한 아이를 두고 본단 말인가. 자네 억측으로 소림을 욕되게 하지 말게."
"사백. 무림대회라고 이름은 좋게 지었지만, 사실상 원 황실을 지지하는 문파와 명교가 무공으로 우열을 가리는 싸움터입니다. 대규모 싸움은 서로 부담되어 규모를 제한해 싸울 생각입니다. 피 튀고 목 잘리고 하면 자칫 대규모 싸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쌓은 내공을 영원히 잃어야 하는 적양공을 펼쳐줄 것 같습니까?"
"우리 아미는 어느 편인가?"
천부전은 문파가 누구 편인지 질문했다. 잔월이 보기엔 천부전이 혼자 가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 천희연을 함께 보낸 것 같았다. 노강호가 손주를 데리고 강호 경험을 쌓아주는 거로 생각했는데, 실상은 반대일 가능성이 훨씬 컸다.
"아미는 늘 그렇듯 중립입니다. 그간 중원에 어떤 신진 고수가 나타나고 어떤 무공을 펼치는지 확인하러 온 것뿐입니다."
사질의 거듭되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천부전은 소림사로 향했다. 그러나 소림사의 접객승은 적양공으로 아이들 혈도를 뚫어달라는 천부전의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적양공을 익힌 분들이 무림대회 준비로 폐관에 들어갔습니다."
少林 소림에서
武林大會 무림대회를 열다
- 작가의말
무혈지체와 통혈지체에 관해 설명 좀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하려면 엄청 길게 써야 할 것 같아서요.
A부터 Z까지 혈도가 있습니다. A는 단전입니다.
일반 무인
A에서 B로, B에서 C로, 이렇게 쭉 Z까지 갑니다. A에서 Z까지 중간에 거치는 혈도가 24개죠.
통혈지체
A에서 E로, E에서 I로, 이렇게 Z까지 최대 6개 혈도만 지납니다. 혈도 건너뛰기를 합니다.
무혈지체
A에서 B로, A에서 C로, A에서 F로, A에서 Z로. A에서 모든 혈도로 직통합니다. 중간에 안 들러요.
잔월의 상태
A에서 E로, E에서 I로, I에서 O로, O에서 U로, U에서 Z로 갑니다.
잔월과 통혈지체의 구분.
통혈지체는 순차적입니다.
내공이 A에서 E로 간 다음, 그 내공이 E에서 I로 갑니다.
잔월은 동시입니다.
내공 1이 A에서 E로 갑니다. 내공 2가 E에서 I로 갑니다. 내공 3이 I에서 O로 갑니다.
통혈지체는 같은 내공이 몇 개 혈도를 지나 목적지로 가는 방식이고
잔월은 여러 내공이 A에서 Z 사이에서 동시에 움직여 내공 연결을 만듭니다. E나 O 등이 A(단전) 역할을 하는 거죠.
이러면 잔월이 통혈지체보다 나은 거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단전 역할을 하는 혈도가 많은 운기 경로는 통혈지체보다 낫고, 단전 역할을 할 혈도가 적거나 없으면 통혈지체보다 못합니다.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