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회·귀태
잔월은 흑룡추산을 펼치고 탈진한 당한백을 밀쳤다. 무극존자의 봉황내의가 덮쳐왔다.
‘기침어연(氣沈於淵) 역응어근(力凝於根).’
호심기공 핵심 구결이다. 연은 단전이다. 근 역시 단전이다. 그러나 둘은 다르다.
연은 받아들이는 그릇이고 근은 외력에 저항하는 힘이다. 받을 수 있는 기운은 단전으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기운은 소멸해야 한다.
'구선지연(九旋之淵).'
백원선사는 단전이 두 개여서 아미결의 위력이 월등히 강했다. 덕분에 호심기공에 속한 구선지연을 깨달았다. 잔월은 아홉 개 외혈을 만들어 단전 역할을 대신했다.
진짜 단전은 상대 힘에 저항하는 근으로 삼고 아홉 단전은 상대 힘을 받아들이는 연으로 삼았다.
봉황내의의 기운은 무극에 가깝다. 음양으로 나누는 게 너무 힘들었다.
'음양으로 나누면 처리하기 훨씬 편할 뿐이다. 힘이 부족하여 기교를 부렸던 것. 가끔은 기교 없이 힘으로 맞서기도 해야 한다.'
퍽 소리와 함께 잔월 발밑의 흙이 일부 사라졌다. 용천혈로 봉황내의 기운을 내보내면서 생긴 일이다. 제압하여 내보내는 게 아니어서 기운이 땅으로 전달된 게 아니라 땅을 공격했다.
퍽 소리와 함께 옷 어깨가 터졌다. 견정혈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이어서 명문혈 부근도 옷이 터졌다.
쉭 소리와 함께 잔월 노궁혈로 강한 기운 두 가닥이 나가서 공손평천을 공격했다. 흑룡추산에 옆구리 살 한 움큼 뜯긴 무극존자가 잔월 덕분에 혼연일체의 상태로 돌아갔다.
칙 소리와 함께 소상혈과 상양혈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단중혈이 있는 가슴 부위도 어느새 터졌다.
잔월은 황급히 가슴에 품고 다니던 가죽 주머니를 확인했다. 구양인 비급과 양의심공 비급이 반쯤 사라졌다.
잔월 몸에서 이상한 소리와 함께 일정 간격으로 기운이 뿜어져 나갔다. 일부는 잔월이 의도한 거고 일부는 잔월이 원해서 한 게 아니었다.
'괜히 호기를 부려서.'
잔월이 섬전도를 전력으로 펼치면 당한백을 밀친 다음 봉황내의를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잔월은 호승심 팔 할에 피하지 못하면 팔다리 하나쯤 날아간다는 걱정 이 할 섞어서 봉황내의를 받았다.
'공령유실(空靈有實) 환허불실(還虛不失).'
공령은 보이지 않으나 실체가 있다. 환허는 비우는 것이지 버리는 것이 아니다.
"백화만개?"
당한백이 놀란 나머지 소리 내어 말했다. 잔월의 내공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무극존자의 기운이 더 빠르게 몸 밖으로 나갔다. 저항이 사라지자 무극존자의 기운도 공격을 멈추고 사방으로 퍼졌다.
당문이 생각하는 백화만개의 최고 경지였다. 당한백은 빨리 잔월에게 어떻게 한 건지 묻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잔월 몸에서 끊임없이 풀려나가는 무극존자의 기운은 약해질 줄 몰랐다.
"조카. 나이도 어린데 벌써 지치면 어떡해?"
"가는 데 순서 없다더니. 내가 외숙이랑 같은 날 죽을 줄은 몰랐소."
공손평천은 뒤로 훌쩍 물러났다. 고수끼리 싸울 때 후퇴는 물론 전진도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자칫 기세 싸움에서 지면 궁지에 몰려 소모 당하다가 목숨을 잃기에 십상이다.
그러나 공손평천은 이미 승기를 확실히 잡았기에 일방적으로 싸움을 멈췄다.
"호법 장로. 무극존자를 죽일 수 없어서 약속은 못 지키겠소."
공손평천의 말에 호법 장로가 호탕하게 웃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다. 내가 네 말을 믿었을 것 같아?"
"그럼 왜 저 둘을 통해 무극존자를 유인해 온 거요? 내 말을 믿지 않았다면 무극존자와 손잡았어야지."
"곧 알게 될 거야."
"으하하."
공손평천의 웃음에는 약간의 광기가 섞였다.
"너희가 연금술이라고 부르는 연단술. 그걸로 화약을 만들어 천주봉 폭파하려 한 거 내가 모르는 줄 알았지? 화약에 불붙이러 간 네 수하를 모조리 잡아 왔다."
호법 장로가 이마를 찌푸렸다. 과연, 조금 지나서 호법 장로가 보낸 자들이 밧줄에 묶여 질질 끌려왔다.
"몇 명 없는데?"
"그런 수작 안 통한다. 그리고 너희가 만든 진법에 손을 썼다. 나만 갇힌 게 아니라 너희도 갇혔다."
진법을 호법 장로네 편도 모르게 바꿔 공평하게 갇혔다.
"처음부터 약속 지킬 생각이 없었구나."
"그래. 두더지처럼 땅에 숨은 너와 무극존자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려고 참았을 뿐이다."
"화약 묻는 거 알면서도 눈감아준 거야?"
"그래. 인내가 쓸수록 열매가 달콤하다고 누가 그러더라고."
"우리가 우세인 것 같은데?"
"머릿수야 많겠지만, 고수는 이쪽이 훨씬 많아."
백학, 흑상, 적사, 황원 등이 나타났다.
"어떻게? 분명히 시험 보고 떠났는데, 어떻게 다시 들어왔지?"
흑상 제외하면 모두 시험을 보고 운룡곡 밖으로 나간 자들이었다.
"봉마진 통해서 들어왔지."
무극존자는 옆구리에 큰 부상을 입었고 당한백은 흑룡추산을 펼쳐 평소보다 약해졌다. 잔월은 아직도 침입한 기운을 해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손평천 측은 부상으로 거동이 불편하다던 흑상은 물론 이미 떠난 줄로만 알았던 남은 고수들도 모조리 돌아왔다.
공손평천과 호법 장로는 말없이 마주 봤다. 그러다 공손평천 귀가 쫑긋 움직였다.
"하하. 마지막 소식도 왔구나. 끌어와라."
잠시 후. 점혈은 물론 밧줄에 단단히 포박당한 제갈속이 끌려왔다.
"제갈. 네가 여길 어떻게?"
당한백은 놀란 나머지 몰래 운기 하여 회복하던 것도 멈추고 고함쳤다.
"자. 자초지종은 내가 설명하지."
공손평천 목소리가 요사스럽게 울렸다.
"얼마 전, 나는 봉마진 안에서 제갈속과 만났다. 중상을 입힌 다음 황토천에 넣어 치료해줬지. 그리고 제갈속을 회유했다."
무극존자를 죽이는 걸 도와주면 세력을 이끌고 심마해를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제갈속은 내 제안에 동의했다. 바깥에 나간 내 수하들을 몰래 안으로 들이는 것까지 도왔다."
당한백은 공손평천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눈을 피하는 제갈속 모습을 보니 거짓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말이지. 사실 제갈속과 호법 장로는 오래전부터 눈이 맞았다. 이들은 천주봉을 없애 멸세교가 사라지게 만들려고 음모를 꾸몄다. 그 이유는 나도 궁금하다."
"멸세교를 만든 내 고조는 말년에 자기 행실을 후회했다."
사내는 멸세교를 만들고 사람을 끌어들여 무공 익히는 걸 도왔다. 강해질 가망이 없는 자들은 몰래 내공을 빼앗아 죽였다.
하늘의 안배인지, 사내는 운명의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세상은 멸망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을 바꿨다.
"후회는 늦게 왔다. 자식이 태어나는 것도 못 보고 내공이 폭주해 죽었지. 진심으로 내 선조를 따르던 부하들이 유지를 받들어 천주봉을 없애려 했다. 시작도 전에 들키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숨어 살아야 했지."
"내가 호법 장로의 계책을 알아내자 제갈속이 그 계책을 이용하자고 했지. 확실히 구미에 당기는 일이어서 동의했다. 그런데 제갈속은 이런 식으로 나를 방심케 한 다음 자신이 직접 화약에 불을 붙이려 했다."
제갈속은 심마해와 운룡곡에 묶여있는 게 싫었다. 은밀히 암흑교와 왕래하는 호법 장로 역시 멸세교를 없애고 암흑교에 가서 신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둘은 오래전부터 공모했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제갈속이 공손평천에게 회유된 척 꾸며서 이중 삼중의 계책을 꾸몄다.
공손평천 기세가 점점 커졌다. 공손평천과 무극존자의 싸움을 구경하다 쓰러진 자들도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하나둘 깨어났다.
"난 어떻게 이러한 일을 모두 알았을까? 내가 계획한 일은 왜 생각대로 풀릴까? 내가 천마기 때문이다. 하늘이 내린 신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공손평천의 목소리가 점점 더 요사하게 변했다.
"무극존자는 천하제일인이다. 저자는 신께서 나를 단련하라고 보낸 대적자이다. 나는 지금까지 일부러 저자를 살려뒀다. 나를 강하게 단련하여 신을 더 온전히 품을 수 있도록."
그때 공손평천 수하들이 검은 천으로 감싼 덩어리들을 들고 나타났다. 호법 장로의 얼굴에 가득한 절망으로 짐작건대, 천주봉에 묻었던 화약이 분명했다.
무극존자를 지지하던 자들과 혈수파의 무인 대부분이 슬금슬금 공손평천 진영으로 움직였다. 심지어 호법 장로 수하가 분명한 서역인들도 공손평천 쪽으로 움직였다.
"잔월승(殘月昇)."
어찌나 강한 소리인지 천주봉이 부르르 떠는 착각이 들었다.
"만천홍(滿天紅)."
거대한 존재감이 공손평천의 기세를 몰아냈다.
"천지전(天地顫)."
잔월이 떠서 하늘을 붉게 물들이면 세상이 두려움에 떤다.
거대한 기운이 천주봉을 때렸다. 천주봉 근처에 모인 천이 넘은 무인 귀에 쩌적 소리가 들렸다.
와르르.
천주봉이 무너졌다. 산 전체가 바위로 이뤄졌고 높이가 삼십 장이 넘는, 정과 망치로 종일 두드려도 바위 하나도 제대로 부술 것 같지 않은 단단한 천주봉이 무너졌다.
공손평천이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제갈속이 속 시원하다는 듯 웃었다. 입을 너무 크게 벌려 눈물이 그대로 입에 들어갔다.
호법 장로가 착잡한 눈으로 무너지는 천주봉을 바라봤다. 그토록 없애고 싶었지만, 정작 무너져버리니 마음이 유감으로 가득하였다.
"왜 공손평천이 하는 일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까? 그건 공손평천이 천마가 아니기 때문이지."
잔월은 급한 나머지 무극존자의 기운까지 끌어다 썼다. 그간 황토천에서 수련한 보람이 있어 지난번처럼 힘들진 않았다.
'이게 다 무극존자 덕분이다.'
천주봉의 무공은 무곡신공만큼 치명적이진 않다. 그러나 강호를 파괴하는 건 몰라도 위축시키는 건 충분하다.
잔월은 무극존자가 강호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멸세교 만든 서역인이 세상을 증오하던 것처럼, 무극존자는 강호가 사라졌으면 생각할지도 모른다.
무극환허인을 고쳐 무곡산장 손에 들어가게 한 후 그걸 강호에 널리 알렸다. 무곡산장 멸망만 바란다면 굳이 널리 알릴 필요가 없었다.
무극존자는 모든 탐욕에 삼켜진 인간이 가짜 무공을 익혀 죽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천주봉 없앨 생각을 했지.'
무극환허인이 가짜임은 이미 밝혀졌다. 여전히 얻어내서 연구하려는 자들은 있을지 몰라도, 무곡산장처럼 성급하게 익히는 자는 드물 것이다. 무극존자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천주봉 무공을 강호로 퍼뜨릴 것이다.
잔월은 스무 걸음 밖에 있는 무극존자를 슬쩍 쳐다봤다. 무극존자는 허망한 표정으로 천주봉이 있던 자리만 바라봤다.
"진법이 깨졌다. 다들 도망쳐라!"
내공을 실어 크게 외친 잔월은 제갈속을 업은 당한백을 엄호하며 남화산 방향으로 도망쳤다. 칠신병이 즐겁게 웃으며 잔월 뒤를 따랐다. 무극존자는 호법 장로를 비롯한 다른 자들이 다 도망칠 때까지 공손평천을 노려봤다.
各懷 각자 품은
鬼胎 귀신 꿍꿍이
- 작가의말
지난 편에서 공손평천이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조금 억지스러웠을 겁니다. 사실은 서로 꿍꿍이가 있어서 상대 거짓을 쉽게 넘어갔습니다.
공손평천은 무극존자 죽이면 심마해 떠난다고 호법 장로 속였고, 호법 장로는 속은 척하며 화약을 묻고 무극존자를 유인해 냈습니다. 제갈속이 잔월과 무극존자가 가까운 사이로 알고 있거든요. 잔월을 통해 무극존자를 유인한 거죠.
공손평천은 처음부터 잔월을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일부러 나타나서 힘을 보여주고 잔월이 무극존자를 찾게 만든 겁니다.
무극존자 역시 꿍꿍이를 다 짐작했지만, 공손평천에게 상처만 입혀도 대부분 지지자가 나가떨어집니다. 잔월과 당한백 도움이 있으면 해볼 만하다고 여겨서 선뜻 속아줬습니다.
본문에 길게 펴면 설명충 될 거 같아서 작가의말로 씁니다. 본문에 이거 삽입하려면 여러 사람 입을 빌려 대화해야 하는데, 그런 장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전지적 시점으로 쓸 수 있는 작가의말이 참 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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