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불살
내공이 콸콸 흘렀다. 음양환이 전신 혈도를 하나처럼 이어줬다. 잔월은 몰랐지만, 통혈지신이 되기 전 단계에 이르렀다.
통혈지신은 수련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경지가 올라 이뤄지는 게 대부분이다. 통혈지신이나 무혈지신을 이루는 안정적인 방법은 발견되지 않았다.
잔월 방식도 사실 함부로 따라 할 게 못 된다.
잔월은 옥녀공 대성한 게 소용없다고 생각했지만, 옥녀공 아니었으면 수많은 위험한 시도에도 잔월이 멀쩡하게 살아있을 수 없었다. 단무전이 금강불괴만 맨날 입에 달고 살았지만, 옥녀공의 효능은 금강불괴 외에도 무척 많았다.
잔월은 내공 부족으로 지금까지 금강불괴 효과만 못 보고 다른 혜택은 줄곧 받아왔다.
운기를 마친 잔월은 피 한 모금 더 토해냈다. 시커멓게 죽은 피를 다 게워내니 몸이 가벼웠다. 눈을 뜨니 탁자 위에 나무함 하나가 놓여있었다.
'암습에 대비했는데 예측이 벗어났다.'
잔월은 운기를 하면서도 동 파파의 암습에 대비했다. 그러나 운기 과정에 무공도 안 익힌 시녀가 나무함 하나 갖다 놓은 게 다였다.
열어보니 기침요결과 옥녀소수공 구결이 적힌 가죽이 들어있고 편지들이 있었다.
편지에 적힌 날짜 순서대로 읽어보았다. 처음엔 잔월에 대한 그리움이 글에 깃들어 있었다. 애절함이 글자와 문장을 통해 잔월에게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만 늘어났다.
'내 탓인가 완청 탓인가.'
완청은 무곡산장에서 혈육들과 지내면서 행복을 느꼈다. 그러다 다시 공손의 성을 얻은 공손완아에게서 진실을 들었다. 공손완아가 했던 납치는 무곡산장이 한 거로 꾸며졌다. 게다가 공손완아가 무극존자에게 잡혀 인질이 되었을 때 완청 자기 귀로 잔월을 독으로 죽여 없애고 덤터기를 씌우려 했다는 말을 들었다.
잔월이 엿들은 사실을 몰랐기에 완청은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공손완아한테 잔월도 모든 경위를 알고 있다는 말을 듣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자신과 잔월 사이에 놓인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을 그제야 명확히 인지하고 인정했다.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움이 절망이 되고 절망이 체념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마음이 유약한 완청은 무곡산장에서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게다가 드디어 느낀 부모의 온정과 형제의 사랑이 완청 발목을 단단히 잡았다. 진선과 혼인을 추진했을 때도 거부 의사를 표명하지 못하고 고분고분 따랐다.
'그래도 행복을 느낀다니 다행이다.'
최근 편지에는 죄책감만 가득했다. 다른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완청만 바라보는 진선 때문에 행복하다는 문장이 있었다. 잔월을 조금씩 잊어가는 데 대한 죄책감과 가족이 잔월에게 한 그릇된 행동으로 인한 죄책감이 편지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잔월 눈에는 행복하다는 문장 하나만 깊이 박혔다.
'힘이 없으면 못 지키는 게 협뿐이 아니구나.'
잔월은 내공으로 편지를 태워버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탁자에 글자 여덟을 남겼다.
백년해로(百年偕老)와 조생귀자(早生貴子 - 귀한 자식 어서 낳아라)의 축언을 남기고 나무함을 품에 챙겼다.
경공을 펼쳐 밖으로 나간 잔월은 비를 무릅쓰고 천희연과 함께 머물던 집 방향으로 달렸다. 무곡산장이라면 천희연 일행도 그대로 두지 않을 것 같았다. 비록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방향과 거리는 대충 짐작이 가서 무작정 달렸다.
"사부."
작은 소리였지만, 잔월 귀에 똑똑히 들렸다. 잔월을 찾으러 오던 천희연과 쌍둥이가 소나기를 피하려고 토지묘에 있다가 잔월 신형을 발견했다. 비가 시야를 가렸지만, 오히려 비를 헤치고 달리는 잔월 모습이 훨씬 잘 보였다.
"다 회복했어요?"
"그간 신세 많이 졌습니다."
잔월의 인사에 천희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왜 큰비를 무릅쓰고 움직이시는 거예요?"
"말하자면 깁니다. 나에 대해 꽤 잘 아는 적이 저를 쫓을 겁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남쪽으로 가요. 양광을 거쳐 검의 땅을 통해 대리를 지나면 아미산으로 갈 수 있어요. 아마 이 경로는 죽어도 생각하지 못할 거예요."
잔월이 아미로 가서 흑표를 만나려 한다는 사실까지 무곡산장이 알기 힘들다. 완청도 흑표가 치료받으러 갔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 장소가 아미라는 것까진 몰랐다.
"제 물건은 혹시 다 챙기셨나요?"
천희연이 섬전도와 구인류를 싼 기름종이 그리고 계도를 건넸다. 잔월은 기침요결과 옥녀소수공도 기름종이에 함께 싸서 나무함에 넣었다.
소나기는 장장 두 시진이나 쏟아졌다.
"홍수가 져서 배 타긴 힘들 것 같습니다. 당분간 노숙도 힘들겠네요."
소나기가 그친 후에도 바람이 기승을 부려 토지묘에 묶였다. 돌멩이도 날아다니는 수준의 바람이어서 감히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소협. 저기 수상한 사람들이 보입니다."
잔월이 눈에 내공을 집중했다. 봉황산 근처 작은 야산에서 상대한 적 있는 흑의인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놈들이었다.
'제압하자.'
몸이 바람에 녹아들었다. 세찬 바람 속에서 섬전도의 경공을 펼치니 느낌이 달랐다.
'쾌가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고 하셨지. 사부 가르침을 종종 까먹는구나.'
경공은 빠름뿐 아니라 부드러움을 비롯해 필요한 게 많음을 겨우 깨달았다.
'나는 바람이다.'
잔월은 바람에 파묻혀 흑의인들을 스쳤다. 잔월과 스친 흑의인들은 소리도 못 지르고 바닥에 쓰러졌다. 일곱이나 되는 흑의인을 순식간에 제압한 잔월은 이들을 나무에 묶었다.
'아니. 그냥 묶어두려는 건데 왜 죽어?'
뭔가 질문할 의도조차 비치지 않았는데 일곱 흑의인은 어느새 자결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일곱 흑의인은 죽어서 잔월에게 두려움을 안겼다.
'빨리 떠나자.'
목숨도 서슴없이 버리는 자들과 멀어지고 싶었다. 잔월은 천희연을 설득해 아이 하나씩 업고 여전히 거센 바람을 무릅쓰고 남쪽으로 달렸다.
생각 같아서는 쉬지 않고 달리고 싶었지만, 어린 쌍둥이는 휴식도 필요하고 식사도 해야 했다. 사람 눈에 띄지 않으려고 주로 오후에 쉬고 저녁과 오전에 달렸다.
"소협. 저기 우리 쫓는 사람들 맞죠?"
사흘이나 달렸는데 어느새 흑의인들이 따라붙었다. 다행히 천희연이 눈이 밝아 산 세 개 너머에서 달려오는 자들을 발견했다.
"저기 잠깐 들릅시다."
천희연은 눈에 보이는 작은 도시에 들러 대나무로 만든 수통을 샀다. 나무함에서 비급과 가죽을 꺼내 수통에 넣은 다음 기름종이로 잘 쌌다. 원래 기침요결과 옥녀소수공을 담았던 나무함은 길가에 버렸다.
"이유가 있습니까?"
잔월의 질문에 천희연이 대답했다.
"제가 숙부한테서 들었는데, 천리향이라고 내공으로 묻히는 특별한 향이 있다고 합니다. 처음엔 나무 향으로 여겨 개의치 않았는데 자꾸 마음에 걸려서요."
'내공으로 묻힌다고 하니 완청 말고 동 파파 짓이겠지.'
잔월은 또 떠오르는 완청 생각에 머리를 세게 털었다.
'이제 그만 잊자.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이다. 어차피 나랑 이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나를 위해 가족에게 등 돌리라고 요구하는 건 이기적인 생각이다.'
"그럼 방향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마음을 다잡은 잔월은 길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진짜 천리향이 묻었다면 저들은 나무함을 발견하고 고민하겠죠. 일부러 남으로 와서 자신들을 유인한 후 나무함을 버리고 종남으로 갔다고 여길 겁니다."
천희연 생각은 조금 달랐다.
원래 계획대로 광동을 통해 광서 땅으로 갔다. 그리고 광서 땅에서 발목이 잡혔다. 제대로 쉬지 못한 쌍둥이가 고열로 쓰러졌다.
잔월은 기침요결을 꺼내 읽으며 치료법을 찾았다. 침으로 고열을 치료하고 약으로 몸을 보해야 했다. 기침요결에 약 처방 관련해서는 내용이 적었기에 의원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누가 계속 지켜보는 느낌입니다."
천희연은 아미파에서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웠다. 어린 나이부터 꽤 돌아다녀 강호 경험이 잔월보다 풍부했다. 쓴 약을 먹기 싫다고 떼쓰는 둘을 달래려고 당과를 사 먹이는데 끈적한 눈길이 느껴졌다.
"유인해 봅시다."
잔월은 계도를 등에 멨고 천희연도 검을 허리에 찼다. 시정잡배라면 감히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여섯입니다."
잔월도 무극존자가 준 책을 통해 기척을 느끼는 법을 익혔지만, 경험이 부족하여 천희연처럼 정확히 사람 숫자까지 맞추진 못했다.
"북개방엔 협객이 있어도 남개방은 거지뿐이라더니."
둘을 따라온 자들은 비수와 식칼을 든 거지 여섯이었다. 잔월은 허리띠 매듭을 확인했다. 둘은 매듭 하나 있고 넷은 매듭조차 없었다.
개방 소속이 아닌 자가 매듭을 함부로 하고 다니다가 걸리면 다리를 분질러버린다. 남개방 거지일 가능성이 무척 컸다.
"칼과 검을 고분고분 내놓으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반항하면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기루에 팔아넘기겠다."
"지금 우릴 떠보는 겁니다. 강호 무인들은 거지 죽이면 재수 없다고 여겨 거지 목숨을 잘 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지들은 겁이 없죠."
무극존자 앞을 막았던 남개방 거지들이 생각났다.
"확실히 겁 없긴 했지."
잔월이 낮게 중얼거리며 등에 멘 계도를 뽑았다. 하얀 도신에 거지들이 당황했다. 특별한 물건을 평범한 사람이 들고 다닐 가능성은 없다.
"애들 눈을 가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강호에 발 들인 아이들입니다. 사람 죽는 거 몇 번 봤습니다."
'목숨은 살려주자.'
원래 다 죽이려 했는데 쌍둥이에게 생각이 미쳤다.
'의부께서 악인도 되도록 죽이지 않으려고 무공 익힌다고 하셨지.'
잔월은 칼날 대신 칼등으로 여섯의 손을 때렸다. 손뼈가 박살 난 여섯은 비수나 식칼을 떨구고 허겁지겁 도망쳤다.
"마음이 약하면 강호에서 목숨 부지하기 힘듭니다."
목소리가 꽤 차가웠다. 잔월이 거지들을 살려준 게 불만인 듯했다.
"손을 다시 못 쓸 정도로 다쳤으니 악행 저지르기 힘들 겁니다."
"저들 살려둔 게 문제라는 게 아닙니다. 독고 소협의 마음가짐이 강호에 어울리지 않게 여리다는 지적입니다."
"감사합니다."
잔월 대답에 천희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너무 주제넘었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독고 소협이 오해하지 않을까?'
당과를 대가로 마지막 남은 약 한 첩을 먹였다. 내공이 거의 없다시피 하여 그렇지 쌍둥이는 십이경맥 중 다섯씩 타통하여 몸이 무척 튼튼했다. 보통 아이라면 약을 먹고도 한동안 쉬어야겠지만, 둘은 힘이 넘쳤다.
"내일 새벽 출발합시다."
여행하며 먹을 음식을 만들라고 객잔에 주문했다. 천희연이 고기를 최대한 안 먹으려 하기에 쌀가루를 비롯해 준비할 게 꽤 많았다.
짐도 미리 싸놓고 일찍 자기로 했다. 그러나 잔월은 잠이 오지 않았다. 옆방에서도 장난치는 쌍둥이를 재우느라 천희연이 고성을 연속 질렀다.
'협은 도대체 뭐지? 어떻게 해야 협을 지킬 수 있을까?'
오늘 만난 거지들은 실질적으로 잔월에게 해를 끼치진 않았다. 그저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상대를 죽이거나 벌하는 게 맞는지 헷갈렸다.
한참 뒤척이며 고민하다 보니 옆방이 잠잠해졌다. 쌍둥이의 고르게 숨 쉬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천희연 숨소리는 집중해도 잘 들리지 않았다.
'천 소저도 어마어마한 고수구나. 엄청 유약해 보이는데.'
완청도 생각나고 검선도 생각나고 사부도 그리웠다.
'아미에서 흑표 찾고 사부 보러 가자. 잘 설득해서 함께 화산파 문도가 되면 좋겠다.'
겨우 잠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천희연이 벽을 두드렸다. 뭔지 모르지만, 잔월은 바로 일어나서 짐을 메고 밖으로 나갔다. 천희연도 어느새 쌍둥이를 데리고 짐을 챙긴 채 나왔다.
"기척이 수십이에요. 낮에 만났던 거지들도 있어요."
"거지가 친구들 불러온 건가요?"
"아닙니다. 거지들 빼면 모두 고수예요."
"다음번엔."
잔월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죽이겠습니다."
쌍둥이에게 조용히 하라고 당부한 후 하나씩 업고 객잔 지붕으로 갔다.
[밤은 어둡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주 하늘을 쳐다보죠. 거기에 달도 있고 별도 있으니깐요. 허공으로 움직이면 쉽게 발각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격공장으로 저쪽에 기척을 내겠습니다. 주의력이 저쪽으로 갔을 때 몰래 저기까지 가는 겁니다. 그다음부턴 땅을 기어 벗어나는 거죠. 격공장을 펼치면 제가 내공이 끊어집니다.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그리하겠습니다.]
천희연은 지붕에 엎드린 채 주먹을 내질렀다. 펑 소리가 크게 울리자 사람들의 주의가 그쪽으로 몰렸다. 잔월은 천희연 허리를 안고 경공을 펼쳤다. 둘의 신형이 순식간에 장작을 쌓아둔 작은 담벼락을 넘었다.
잔월의 손이 어느새 쌍둥이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쌍둥이도 경맥이 타통 되어 기운의 흐름이 원활했다. 갑작스럽게 움직이면서 흔들린 기운이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갔다.
둘은 땅에 바싹 엎드린 후 느리게 움직였다. 그때 객잔에서 비명이 여럿 울렸다.
[암기 같아요.]
[독충일 겁니다. 무곡산장과 오독교 같습니다.]
비명이 울리고 나서 무인들이 움직여 객잔에 들어갔다. 암기라면 지금까지 시간 끌 일도 없었다. 독충을 들여보내느라 시간이 걸린 거라고 잔월은 판단했다.
[격공장을 쓴 게 다행이군요.]
격공장을 쓰지 않고 천천히 나오려 했으면 독충에게 물렸을 가능성이 컸다.
'객잔 사람들을 무곡산장이 살려둘까? 힘이 없으면 협을 못 지킨다는 말이 정말 실감 나는구나.'
그때 객잔에서 펑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어떤 개 잡놈이 독을 풀었느냐?"
억눌린 신음이 연속 들렸다.
"어서 해독약을 내놓지 않으면 다 죽여버린다."
[빨리 움직여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객잔에는 다른 고수가 있었다. 신음과 비명은 계속 울리는데 욕지거리가 멈추지 않는 걸 보면 혼자서 무곡산장 고수들을 여유롭게 대처하는 듯했다.
잔월은 팔다리를 좀 더 과감하게 움직였다.
'좋은 사람이어서 무고한 사람들도 다 살려줬으면 좋겠다.'
객잔에서 멀어진 후 경공을 펼쳐 빠르게 도망쳤다.
殺 죽이느냐
不殺 살리느냐가 문제로다
- 작가의말
잔월이 약해서 피한 게 아닙니다. 쌍둥이 때문에 피한 거죠. 싸우면 도검불침에 만독불침을 거의 완성한 잔월이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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