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야투
"포위됐소."
"저쪽으로."
얼마 못 가서 무인 하나가 흑호권으로 잔월 옆구리를 공격했다. 흑호권은 은밀하면서도 강한 초식이다. 얼핏 모순되게 들리지만, 내가권이기에 은밀함과 강함을 동시에 갖출 수 있었다.
잔월은 계도를 휘둘러 공격한 사내 팔뚝을 베어갔다.
'수중월(水中月) 경중화(鏡中花).'
물속의 달과 거울 속의 꽃. 계도가 바람에 휘말린 낙엽처럼 힘없이 흔들렸다. 흑호권을 펼친 사내는 외공에 자신 있는지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공격을 그대로 이어갔다.
서걱 소리와 함께 흑호권 사내의 오른쪽 팔꿈치 아래가 사라졌다. 흑호권이 전혀 기세를 알 수 없는 내가권이라면 잔월의 수중월 경중화 역시 기세가 전혀 없어 허접한 공격으로 오해하기 쉬웠다.
"고수다. 속지 마라."
'속인 적도 없구먼.'
흑호권 사내의 팔을 가볍게 자르는 모습에도 적은 전혀 위축됨이 없었다. 오히려 고수라는 말에 당한백보다 잔월을 노리는 자가 많았다.
호미를 닮은 무기와 통짜 철을 두드려 만든 창이 동시에 잔월을 노렸다. 둘 다 장병기여서 잔월이 피하면 당한백이 노려질 가능성이 크다.
'월중계수(月中桂樹) 반만근(盤萬根).'
달에 있는 계수나무는 뿌리를 만 개 내린다. 땅과 몸과 계도가 하나 되었다.
"무기가 엄청나다."
통짜 철로 된 두 무기가 계도에 썩은 나무처럼 잘려나갔다. 무기를 잃은 둘이 황급히 물러났다.
그때 잔월 겨드랑이로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송곳이 날아갔다. 당한백이 손가락으로 튕긴 다섯 송곳은 무기를 잃은 두 무인을 노렸다.
"탄지공(彈指功)? 당문이냐?"
송곳에 맞은 두 무인은 칠공으로 검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굳이 탄지공이 아니어도 독과 암기술로 정체가 드러났을 것이다.
'오합지졸인가? 포위한 이득을 전혀 취하지 못하고 있어.'
그때 팔이 유난히 긴 자가 당랑권을 펼치며 잔월을 공격했다. 당랑권의 요결은 삼첨자(三尖刺)이다. 손끝과 손바닥 밑동 그리고 팔꿈치까지 세 부위로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그러나 멸세교 무인은 손날로 공격했다. 무기를 잡지 않은 대신 빠름과 민활함을 이점으로 얻어야 하는데, 크게 휘둘러야 하고 위력도 고만고만한 손날을 쓰는 걸 보니 무공을 제대로 배운 자는 아니었다.
상대가 수준이 낮다고 판단하자 잔월은 수비 대신 공격을 선택했다.
'후발선지(後發先至).'
구양진경은 대부분 내공과 관련한 구결이다. 그러나 무공과 관련한 구결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내가 상대보다 빠르다면 급히 공격할 필요가 없다.'
잔월은 장작 패듯 아주 단순하게 내리쳤다. 계도가 당랑권을 펼치는 두 팔 사이로 들어가서 이마부터 명치까지 쭉 베었다. 단순히 칼에 베인 거라면 생명에 전혀 지장이 없었겠지만, 잔월은 내공으로 당랑권 사내의 임맥에 속한 혈도들을 공격했다.
힘없이 쓰러지는 당랑권 사내 주검을 발로 걷어차 멀리 보냈다.
"비켜."
덩치가 한대붕이나 홍야차보다도 더 큰 사내가 같은 편을 걷어차며 잔월에게 접근했다. 가까이 접근한 거구의 사내는 두 손을 깍지 낀 다음 태산압정(泰山壓頂)으로 잔월 머리를 내리쳤다.
'월영첩첩(月影疊疊).'
잔월은 계도를 잡지 않은 왼손을 위로 뻗어 웬만한 사람 머리통만큼 큰 상대의 두 주먹을 받아냈다.
월영첩첩은 잔월이 취접의 첩경을 훔쳐서 흉내 낸 초식이다. 비록 펼치는 방식은 취접과 다르지만, 효과는 취접장의 접평산 초식과 똑같았다.
'양의심공, 수영일월(水映一月) 월영천수(月映千水).'
왼손의 첩경으로 상대를 꼼짝도 못 하게 하고 계도를 휘둘려 수영일월 월영천수를 펼쳤다.
물은 하나의 달만 품을 수 있지만, 달은 천 개의 물에 비친다. 수십 개 계도가 사내 몸을 난도질했다. 달은 하나여도 수많은 물에 비칠 수 있는 것처럼, 계도도 하나지만 수많은 계도가 되어 동시에 수십 개 공격을 쏟아낼 수 있다.
"육유환환(六幽幻幻)검."
기습이 부끄러웠는지 수천 개 검화를 피워 잔월을 공격한 자가 검법 이름을 말했다.
"수영일월 월영천수."
잔월이 가볍게 휘두른 계도에 사내 검이 동강 났다.
공격할 때는 월영천수에 따라 실제와 다름없는 수많은 공격을 동시에 쏟아낸다. 수비 상황이라면 수영일월에 따라 상대의 초식을 제압한다. 아무리 수십 수백 수천으로 보여도 실질적으로 검은 하나다. 잔월은 물이 되어 하나의 달만 품었다. 달을 막아버리니 상대의 수천 개 검화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내는 부러진 검을 잔월 얼굴에 던지고 바로 도망쳤다. 잔월은 계도 끝으로 검 자루를 살짝 찍은 다음 반원을 그려서 부러진 검을 주인에게 돌려줬다.
부러진 검은 허리에 걸린 검집 대신 주인 몸을 검집으로 삼았다. 사내는 부러진 검이 날이 전혀 안 보일 정도로 등에 박혔는데도 모르고 달리다가 입으로 피를 크게 토하고 쓰러졌다.
"암흑교 개다. 아까는 취접장이고 방금은 건곤대나이가 틀림없다."
"빨리 숨어야 하오."
당한백의 말이 아니어도 잔월 역시 점점 몰려드는 기척을 느꼈다.
"내 뒤를 바싹 따르시오."
피성대월(披星戴月)은 돌진력이 엄청나게 강한 초식이다. 대신 수비를 어느 정도 포기하여 상처를 입기 쉬운 초식이다.
그러나 잔월은 금강불괴체가 있었다. 전투로 몸이 달아오르고 감각이 곤두서서 옥녀공도 공격에 엄청 빠르게 반응했다.
그뿐만 아니라 공월을 펼치면 대부분 무인은 잔월이 공격하기 전에 공격하지 못한다. 한대붕이나 홍야차처럼 특별한 자들이 있긴 하겠지만, 피성대월이라는 꽤 위험한 초식도 잔월에겐 전혀 부담이 없었다.
잔월은 두 걸음이나 세 걸음에 계도를 한 번씩 휘둘렀다. 계도가 휘둘러질 때마다 목숨 하나 사라졌다. 당한백은 잔월 뒤를 바싹 따르며 잔월이나 자신을 공격하려는 자들에게 독 바른 암기를 선물했다.
"내가 왔다!"
"흑상(黑象)이다."
전진이 막혔다. 잔월을 멈춰 세운 흑상이라는 자는 딱 봐도 중원인이 아니었다. 키는 홍야차 정도인데 어깨가 훨씬 넓고 다리가 길었다. 새까만 피부 덕분에 흰자위와 하얀 이 그리고 분홍색 혓바닥이 징그럽게 느껴졌다.
"너, 오늘, 죽는다."
커다란 방패에 길이가 두 장이 되는 긴 창을 든 흑상이 떠듬거리며 말했다. 창날만 해도 삼 척에 가까운 창은 자루 절반은 철이고 절반은 나무였다.
"우루루루, 까라라라."
흑상이 아랫입술과 혀를 이용해 괴이한 소리를 냈다. 잔월은 속전속결 할 생각으로 공월을 거뒀다. 잔월을 펼쳐 허점을 가득 드러낸 채 상대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후발제인(後發制人) 선발제어인(先發制於人).'
후발선지를 설명한 구결이다. 내가 먼저 움직인 후 상대가 움직이면 내가 대응할 방법이 적어진다. 상대가 먼저 움직이고 거기에 맞춰 적절히 대응하면 상대 선택을 줄여 궁지로 몰아갈 수 있다.
'혼연일체와 일맥상통하는 말이지.'
잔월 예상과 달리, 너무 많은 빈틈을 보이는 바람에 흑상이 주저했다. 어딜 찌르는 게 좋을지 고민이 깊어진 것이다.
'그걸 잊고 있었구나.'
칠신병을 만났을 때 써먹었던 방법이 생각났다. 모든 기척을 지우는 게 아니라 존재감을 조금 보여서 상대 공격을 유도하는 방식.
잔월 존재감이 서서히 사라지며 왼쪽 옆구리만 남았다. 흑상의 창이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빠르게 찔러왔다. 잔월은 허리를 살짝 비틀어 찌르기를 피하면서 계도로 창날을 내리쳤다.
계도가 창날에 닿는 순간, 창이 뜨거운 여름의 버드나무 가지처럼 힘없이 처졌다. 계도에 실린 힘과 내공 모두 창에 전혀 전달되지 못했다.
개구리 혓바닥처럼 빠르게 회수한 창날이 곧바로 잔월 옆구리를 노렸다. 창끝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잔월은 옆으로 반보 움직여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다시 계도를 내리쳤다. 이번엔 내공을 전혀 싣지 않고 초식도 펼치지 않은 채 단순한 내려치기로 공격했다.
깡 소리와 함께 창이 회수되었다. 흑상의 창이 돌아갈 때 잔월은 계도로 통비권의 수비 초식 탕추천을 펼쳤다. 충돌하는 순간을 노려 잔월에게 던져진 몇 개 암기가 허무하게 튕겼다.
그때, 흑상 창이 번쩍이더니 멸세교 무인 둘이 피거품을 물고 바닥에 쓰러져서 눈을 희번덕거렸다.
"나랑, 둘이 싸운다."
암기를 던진 자들은 분명히 창에 찔렸는데 자상에는 출혈이 전혀 없고 대신 입과 코로 연신 피를 쏟아냈다.
'광풍살을 펼치면 수습에 시간이 걸린다.'
예전에는 광풍살을 펼쳐도 괜찮았다. 그러나 곤륜의 무곡산장에서 깨달음을 얻어버린 후로는 초식 위력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광풍살을 펼치면 조금 쉬어야 했다.
임독양맥을 타통하고 통혈지체인데도 흔들린 내공 수습하는 게 쉽지 않았다.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고 흑상의 창이 또 옆구리로 찔러왔다. 잔월은 크게 한걸음 옆으로 피한 후 앞으로 두 발 전진했다. 흑상도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도로 넓혔다. 다리가 길어서 뒷걸음질하는데도 보폭이 잔월 못지않았다.
'접근해도 저 방패가 문제다.'
몸 전체를 가릴 정도로 큰 방패에는 상중하로 세 개의 뾰족한 뿔이 있었다. 방패술이 창술 절반 수준만 되어도 접근으로 얻을 이득이 전혀 없다.
흑상의 창끝이 점점 더 큰 범위로 흔들렸다. 철로 된 부분은 그대로인데 나무로 된 부분이 내공을 주입하면 큰 폭으로 휘었다.
창끝이 큰 범위를 노리자 피하는 게 점점 어려웠다. 단순히 피하기만 하는 건 문제 없지만, 반격은 꿈도 꾸지 못했다.
'시간이 없다. 우린 둘인데 적은 점점 늘고 있다.'
잔월은 갑자기 존재감을 엄청나게 크게 키웠다. 성도에서 반나절 거리의 도시에서 삼불살과 오독교 무인을 상대할 때와 독곡에서 공손용기와 싸우는 척할 때 딱 두 번 써봤다.
깨달음, 내공, 운기 수준 등이 모두 그때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때는 십수 장 거리까지 미쳤지만, 이번엔 오십 장 가까운 거리를 존재감으로 꽉 채웠다.
"월만천하(月滿天下)!"
잔월 계도가 세 방향으로 어마어마한 공격을 쏟아냈다. 잔월을 중심으로 짙은 유황 안개가 깨끗이 사라졌다.
"너, 누구냐?"
흑상이 피를 토하며 잔월에게 물었다. 가장 가까웠고 공격이 가장 거센 정면에 있었지만, 흑상은 목숨을 부지했다.
"천천히 알아봐."
잔월은 당한백과 함께 경공을 펼쳐 안개가 훨씬 짙은 산으로 도망쳤다.
"안타깝소. 죽은 놈이 스물도 안 돼."
"당 대협. 상처가 깊어 보이오."
"내가 얍삽하게 암습하는 걸 잘하고 일대일도 자신 있는데, 혼전에 좀 약한 편이오. 그런데 흑 장로는 괜찮은 거요?"
"괜찮소. 문제라면 당분간 끌어다 쓸 내공이 얼마 안 되오."
광풍살과 달리 바로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지만, 초식을 펼친 다음 절반 이상의 내공이 묶여버렸다. 내상이나 이런 건 전혀 없었다. 그저 지친 혈도가 쉬고 싶어 하는 느낌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내게 맡겨주시오."
당한백은 팔에 난 상처에 금창약을 뿌리며 환하게 웃었다.
"흑 장로가 낮 싸움에 적합하다면, 난 밤 싸움에 적합하오."
휘영청 푸른 달이 당한백 얼굴을 밝게 비췄다.
晝戰 낮에 싸우는 법 따로
夜鬪 밤에 싸우는 법 따로
- 작가의말
“흑상? 검은 코끼리? 전혀 안 닮았는데.”
“코가 길어서 그래. 코끼리 코가 길어서.”
잔월은 흑상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심마니 외숙공 손에서 자연인으로 자라 만화를 잘 몰랐다.
“짱구 좀 굴려봐. 그럼 바로 알 거야.”
그때 당한백이 나섰다.
“해가 졌소. 이젠 내가 싸우지. 흑 장로가 낮 싸움에 적합하다면, 난 밤 싸움에 적합하오.”
“무슨 소리요? 난 달이오. 밤 싸움 잘하오.”
“힘은 몰라도 기교는 내가 훨씬 나을 거요. 그러니 흑 장로는 구경이나 하시오.”
그렇게 잔월이 의문의 2패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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