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두·북두
"누구냐!"
기척을 발견한 완안덕명은 내공을 실어 뾰족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으레 들려야 할 호원무사들의 달음박질 소리가 없었다.
"덕명, 평생 꼬리 부러지게 흔들더니 꼴좋구나."
검선이 모습을 드러내자 완안덕명은 황급히 베개 밑에 숨긴 검을 뽑았다.
공손평천이 수천 명 무인을 데려온 후 완안덕명은 황궁에서 쫓겨났다. 공손평천이 데려온 무인 중 고수들은 황궁에 기거하며 황제를 지키기로 했다. 그들이 지낼 방을 비우는 과정에 완안덕명도 짐을 싸야 했다.
"혼자 왔니?"
"널 상대하는 데 나 하나면 과하지. 유언 같은 거 없니?"
완안덕명 검에 강기가 씌워졌다. 강기가 순식간에 생겼다 사라지는 모습에 검선은 많이 놀랐다. 강기가 사라진 게 아니라 검 안으로 갈무리한 거였다. 강기가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높은 경지다.
검선 얼굴이 자색으로 물들더니 역시 검에 강기가 깃들었다. 안안덕명처럼 강기가 겉으로 보이지 않고 처음부터 안으로 깃들었다. 경지는 확실히 검선이 높았다. 그러나 누구 강기가 더 단단한지는 검을 부딪쳐봐야 알 수 있다.
둘의 검이 정직하게 충돌했다. 북두검법은 화려한 초식보다는 강한 위력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무공이었다.
검을 몇 번 부딪힌 둘은 거리를 벌리고 상대를 노려봤다.
"규화공을 익히면 널 압도할 줄 알았는데. 너도 그간 뭘 익혔나 보다."
완안덕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규화공?"
"무곡진 안에서 운 좋게 공손완아라는 여자를 만났다. 무극환허인 비급을 얻었지. 그림뿐이어서 어려웠지만, 운기 경로대로 익혀서 규화공을 얻었다."
밖에서 기척을 숨기고 있던 잔월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림으로 된 무극환허인도 없애야 한다. 약물 외에도 익혀낼 방법이 있다.'
완안덕명은 영약 덕분에 내공은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내공 성질이 잡다하고 제대로 된 다스림을 받지 못해 강한 위력은 내지 못했었다.
하지만, 거세를 하면 가짜 무극환허인을 익힐 수 있다. 규화공을 익혀낸 완안덕명은 강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내공 위력이 강해졌다.
'강한 힘을 아무나 쉽게 얻는다면 강호가 무너지고 세상이 무너진다.'
"너 설마 북두심법 찾아낸 거야?"
규화공을 자랑한 완안덕명이 질문했다. 어린 시절부터 서로 경쟁하며 자란 둘은 그저 상대를 죽이는 거로 만족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상대에게 최대한도의 패배감을 주려 했다.
대화하고 정한 건 아니지만, 둘은 북두검법을 누가 먼저 복원하는지로 경쟁했다. 완안덕명이 규화공을 익혀 순식간에 고수가 되었지만, 만약 검선이 북두심법을 찾아내 북두검법을 제대로 익힌 거라면 완안덕명의 패배다.
"적양기공과 빙련기공을 구양신공에 합쳤다. 자하신공이라고 이름 지었다."
북두검법의 초식은 둘 다 복원했다. 개인 해석에 따라 초식이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같은 비급 보고 같은 사부 가르침을 받아도 초식은 조금씩 다르게 익힌다.
"그럼 여전히 비긴 거구나. 그냥 오늘 끝장 보자."
검선 역시 심법을 복원하지 못했다는 말에 완안덕명 기세가 부쩍 커졌다. 기세가 자주 변하는 완안덕명과 달리 검선은 처음부터 물처럼 고요하여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었다.
'장기전으로 가면 사조께서 유리하다. 완안덕명은 기복이 너무 심해.'
검선 역시 잔월과 같은 생각인 듯 완안덕명의 공격을 부드럽게 받아내며 가끔 반격하기만 했다. 강맹한 공격이 연신 막히자 완안덕명의 기세가 변했다. 잘 벼린 창끝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조금 먼 곳에 기척을 숨긴 셋까지 쿡쿡 찔렀다.
챙.
'세 번!'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소리는 하나만 울렸지만, 완안덕명은 세 번 공격했다. 전광석화와 같은 세 공격을 막은 검선이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완안덕명이 펼친 건 삼첨화 초식이다. 천하에서 이 초식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검선일 것이다. 본인이 만든 초식이고 가장 즐겨 사용하는 초식 중 하나기도 했다.
그런 삼첨화 초식을 검선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막아냈다. 세 번째 공격을 막을 때 강기가 흔들리며 바늘처럼 콕콕 찌르는 완안덕명의 내공이 몸에 침투하기까지 했다.
"어떠냐? 규화공은 극쾌를 가능케 하는 무공이다. 초식이 조금 미숙하면 어때. 노린 곳이 아닌 다른 곳을 찌르면 어때. 너무 빨라서 상대는 막을 엄두도 나지 않을 텐데. 어차피 상대를 죽이는 목적을 달성하면 되는 거 아냐? 사람 죽이는 기술에서 도 따위를 찾겠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이지."
검선은 호흡 몇 번으로 침투한 기운을 해결했다.
"북두검법의 요결은 강(罡)이다. 강은 강(强 - 굳셈)이고 강(剛 - 바름)이다. 쾌는 방문좌도다."
"그럼 막아 봐. 승자가 왕이고 이기는 게 정도다."
잔월은 계도를 잡고 언제든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완안덕명은 구경하는 잔월도 가끔 놓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단순히 빠름만 따지면 섬전도를 능가했다.
섬전도는 부드러움과 은밀함 그리고 사람들의 사각을 이용하여 갑자기 사라진 듯 보이는 경공이다. 빠름까지 천하에서 제일을 다툴 수 있어 잔월의 움직임을 따를 고수는 몇 없다.
완안덕명의 규화공은 그저 빨랐다. 경로가 단순하여 예측하긴 쉽지만, 북두검법이라는 강한 공격까지 겸비하니 취접 정도는 되어야 막을 수 있다.
"어떠냐? 내가 너보다 강하지?"
완안덕명이 공격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지쳐서가 아니라 흥분으로 숨이 가빠졌다. 소매와 옆구리 그리고 겨드랑이 옷만 베인 완안덕명과 대조되게, 검선은 핏자국이 여럿 생겼다.
"방문좌도는 바름을 이기지 못한다."
"주둥이만 살아서는."
"내가 옛날에 너한테 자주 해주던 말이구나."
완안덕명 기세가 거칠어졌다. 검선을 덮치는 완안덕명의 공격이 한층 빨라졌다. 그러나 경로는 오히려 더 단순해 잔월이라면 눈 감고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완안덕명. 이따위로 사는 게 좋냐?"
덕분에 여유를 찾은 검선이 말로 상대를 흔들었다.
"제자 다 죽은 너보단 나은 거 같은데?"
완안덕명은 금나라 황실 후손이다. 직접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건 어렵다. 황실에 충성하며 던져주는 걸 받 먹는 방법밖에 없다.
완안덕명은 최선을 한 셈이다. 비록 큰 좌절과 실패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론 자기 처지가 검선보단 훨씬 낫다고 여겼다.
"무공을 바르게 익혔으면 너도 괜찮은 고수가 되었을 거야."
"지금도 강호에 적수 몇 없을 거 같은데. 사대고수 말석을 몰아붙이고 있잖아."
완안덕명이 검선을 자극했다. 검선은 예전부터 자존심이 과할 정도로 강했다.
"사대고수는 허명이지. 싸움으론 열 명 안에 들기도 힘들 거야."
검선이 여유롭게 받아쳤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검선 역시 많이 달라졌다.
'압축. 초식을 압축했다.'
속도와 힘 모두 완안덕명이 압도적이었다. 섬전도에도 언급했다시피 빠름 역시 힘이다. 북두검법을 통해 구현한 강기는 둘이 비슷한 수준이다. 완성도는 검선이 높지만, 강기 위력은 완안덕명이 앞섰다.
완안덕명은 힘에 빠름을 얹어서 검선을 압도할 정도 위력을 보였다. 그러나 검선은 어마어마한 공격을 전부 막아냈다.
'찌르기 하나 베기 하나에 초식이 여럿 깃들었다.'
검선의 검은 혼연일체의 끝을 보여줬다. 단순해 보이는 찌르기에 몇 개 초식이 들어 있었다. 상황에 따라 어떤 초식으로 변할지, 공격이 될지 수비가 될지는 검선만 알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며 흥분이 가라앉자 완안덕명 역시 이상을 감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중간에 한 번 멈춘 후로 상처 하나만 더 늘인 것 같았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넌 옛날부터 대련에서 지면 늘 내가 수작 부렸다고 억지를 썼다. 그리고 사부는 늘 네 편이 되었지. 덕분에 오늘 내가 있는 거다. 덕명아, 고맙다."
검선이 갑자기 사라졌다. 잔월은 놀란 나머지 숨겼던 기척을 드러냈다.
완안덕명은 갑자기 나타난 세 기척에 깜짝 놀랐다. 잔월이 놀란 나머지 기세를 확 키우는 바람에 온전히 검선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차가운 검이 완안덕명 등을 뜨겁게 갈랐다. 완안덕명은 독맥에 속한 혈도들이 팍팍 터지는 환청을 들었다.
뜨겁던 등이 갑자기 시원해지더니 눈앞이 노래졌다. 검으로 자기 양물을 자를 때 느꼈던 그 기분과 흡사했다.
"뭐지?"
"섬전도. 네 음모에 죽은 내 대제자가 만든 경공이다."
"결국, 내가 졌구나. 제대로 이기고 싶었는데."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완안덕명을 보니 검선도 만감이 교차했다. 사부의 편애와 황실의 비호로 완안덕명은 부족한 실력에도 승승장구했다. 사부도 완안덕명도 몹시 미웠는데, 정작 죽음에 이르는 중상을 입혀놓아도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용히 제자나 키울걸. 내 원한과 욕심 때문에 아이들만 불쌍하게 죽었구나.'
"남길 유언 없느냐?"
"프흐흐."
완안덕명 입에서 피거품이 일었다.
"화산에 사람 보냈다. 화산 사람 다 죽을 거야."
검선 검이 번쩍이고 완안덕명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화산으로 돌아가자."
"사조. 저는 가짜 무극환허인 찾아서 없애야 합니다."
"그럼 잔월은 남아라. 우리 셋만 돌아가도 넉넉하다."
검선은 바로 화산으로 향하고 자강과 두천은 팽가에 가서 화산으로 비둘기부터 날리기로 했다. 잔월은 완안덕명 방을 꼼꼼히 뒤져서 그림으로 된 무극환허인을 찾아냈다.
'섬전도. 더 높은 경지가 있었구나.'
잔월은 자신이 섬전도를 다 깨달았고 실전에서 얼마나 잘 응용하는지만 남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검선이 펼친 섬전도를 보고 갈 길이 꽤 남았음을 깨달았다.
그림으로 된 무극환허인을 태워버린 잔월은 성벽을 넘어 대도 밖으로 빠져나갔다. 팽가가 준비한 집에 머물며 섬전도 구결을 곱씹어 살폈다. 검선이 펼친 섬전도를 보니 구결이 숨긴 의미들이 조금씩 드러났다.
'대단하다. 익히는 자의 수준만큼 보이는 구결이다. 부친은 어마어마한 천재셨구나.'
빠름과 부드러움과 은밀함이 더욱 잘 섞였다. 그리고 단순히 경공에 관한 깨달음에 멈추지 않았다. 구인류나 월영도법이나 통비권도 훨씬 깊이 깨달았다.
'공손완아는 봉황산장에 있을 때 그림으로 된 비급을 맨날 들여다봤다. 굳이 비급을 훔친 건 뭔가 확인할 게 있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공손완아를 죽여야 비급을 완전히 없앤 셈이 된다.'
깨달음을 다 수습하고 나서야 공손완아에게 생각이 미쳤다.
환관이 글자가 아닌 그림으로 된 무극환허인을 익히면 규화공을 얻는다. 이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설마 강한 무공 익히겠다고 거세하는 놈은 없겠지?'
北斗 규화 북두와
北斗 자하 북두의 싸움
- 작가의말
‘설마 강한 무공 익히겠다고 거세하는 놈은 없겠지?’
악불군, 임지평, 동방불패가 반대 눌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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