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량부정·하량왜
독심호리는 현재 종남파 제자도 용문파 제자도 아니었다. 외부인 신분으로 용문파 총관직을 맡아 문파 재산을 운용하고 관리했다. 실질적인 권한은 전혀 없고 일일이 계획을 짜서 보고하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문파 제자가 아니어서 독심호리는 태을산 산자락에 작은 모옥을 짓고 살았다. 십사 년이나 지난 지금에는 감시자가 없지만, 경공과 은신술이 뛰어난 독심호리는 예전에도 감시자를 쉽게 뿌리치고 몰래 나들이했다.
그러나 누군가 몰래 방문한 건 처음이었다. 독심호리는 검자루를 잡은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대사형?"
갑자기 허깨비처럼 눈앞에 나타난 경공은 대사형 제외하고 펼치는 사람을 본 적 없었다. 심지어 사부마저도 몇 번 시도하고 포기했다. 그리고 앳된 얼굴은 갓 입문했을 때 봤던 대사형과 똑같았다.
상대는 말없이 검을 건넸다. 검집만 보고도 대사형의 연월검임을 알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을 뽑아봤다. 검푸른 날은 연월검이 틀림없었다.
"공령은 형체가 없는 게 아니고 환허는 숨기는 거지 사라지는 게 아니다."
독심호리의 작은 눈이 더 가늘게 감겼다.
"너 뭐야?"
"독고경천과 묘연향의 아들 독고잔월이라고 합니다. 종리형 숙부의 혈도에 있는 혈전을 녹여 정신 차리게 했습니다. 조사동을 지키는 아홉 무인은 이미 처리했고 상관소혜와 혁중 그리고 종리형 세 분과 함께 검선 사조를 구출했습니다."
"무슨 수작이지?"
"강유 숙부와 마준 숙부도 구했고 함께 갇혀있던 전진교 지파 후계자 아홉 분도 구출했습니다. 검선께서 당신을 데려오라고 지시했습니다. 검을 보여주고 저 말을 전하면 의심을 풀고 따라올 거라고 하더군요."
검선의 예상과 달리 독심호리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부친이 글로 남긴 경공 구결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잔월은 품에 손을 넣어 섬전도가 적힌 가죽을 꺼냈다. 구결을 조금 읽어본 독심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이 나한테 알려준 구결과 비슷하구나. 필체도 맞고."
섬전도를 품에 갈무리하고 잔월이 사라졌다. 독심호리도 바람에 날리는 연기처럼 희미한 모습으로 잔월 뒤를 따랐다. 독고경천이 알려준 구결을 나름대로 변형해서 조금 느려도 은밀함은 훨씬 뛰어난 경공을 익혀냈다.
독심호리는 마지막 의심을 접지 않고 반신반의하면서 감옥이 된 조사동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용문파에서 서열이 높은 편인 아홉 무인의 주검이 제멋대로 널려있었다.
상처를 살피니 연월검이 남긴 흔적이 분명했다.
"몇 합을 썼느냐?"
아무리 완안덕명이어도 자신을 시험하려고 충성스러운 제자 아홉을 죽이는 건 말이 안 된다. 타고난 조심성 때문에 경계를 완전히 풀진 않았지만, 독심호리의 마음은 흥분과 기대로 두근거렸다.
"총 세 합을 나눴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사부와 사매 사제들의 얼굴을 보고 경계를 완전히 풀었다.
"급하다. 지금 태을산에 어느 정도 무력이 남아있느냐?"
독심호리는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준비한 것처럼 막힘없이 대답했다.
"연월검을 갖고 가서 무력을 밖으로 돌려라. 그사이 완안덕명 거처에 숨긴 비급을 찾아낸다. 비급을 수습하고 태을산에 불을 지른 후 여길 떠난다."
구체적인 지시가 없었지만, 독심호리는 알겠다며 연월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독심호리가 연월검을 들고 돌아왔다. 옷이 검에 베이고 찢겨 흡사 큰 싸움을 벌인 사람 같았다.
"대사형을 기습했더니 검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했습니다. 태백산 근처에서 놓쳤는데 다리를 다쳐 멀리 못 갔을 거라고 했더니 저에게 어린 제자들 데리고 태을산을 수색하라 시키고 자기들은 태백산으로 갔습니다."
검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한 놈들만 남겨둔 모양이구나.'
완안덕명은 사부를 닮아 마음에 드는 제자한테는 엄청나게 잘해주지만, 그렇지 않은 제자는 홀대했다. 완안덕명 제자들은 독고경천을 죽이거나 잡아서 사부 총애를 받으려고 독심호리 말에 쉽게 속았다.
"둘째는 일곱째와 막내 그리고 경천이 아들을 데리고 완안덕명 거처를 수색해서 최대한 많은 비급을 수습해라. 아홉째는 밖에 두 소년과 함께 우릴 보호하여 배가 있는 곳으로 가서 기다린다. 우린 단전에 쇄심침(鎖心針)이 박혀 내공을 못 쓸 뿐이지 팔다리는 멀쩡하다. 저분들도 쇠사슬을 뽑아내고 잠깐 운기 했으니 거동에 불편함은 없다. 너흰 그저 앞뒤를 살피며 용문파의 악적들에게 들키지 않게 해주면 된다."
잔월과 독심호리가 아픈 사람들을 업어서 밑으로 내려줬다. 다행히 간수를 자처한 아홉이 동문의 정이 남아 괴롭히지 않았기에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없었다. 몸이 허약하여 걷는 게 느렸지만, 위급한 상황에 강한 초식 한두 개씩 쏟아낼 여력은 다들 있었다.
태을산으로 향한 넷은 경공으로 은밀히 움직였다. 독심호리가 빠르고도 인적이 드문 길로 일행을 안내했다.
완안덕명의 거처는 태을전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완안덕명은 아주 조심스러운 사람이다. 아마 누군가 침입할 걸 대비해 조치해놨을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창문과 지붕으로 들어가는 경로에 뭔가 함정을 만들었을 거다. 이럴 땐 문으로 들어가는 게 가장 안전한 길이다."
완안덕명의 집은 무척 든든했다. 그리고 문은 철로 만든 쌍겹이였다.
"열쇠가 없으면 안에서도 밖에서도 문을 열 수 없다. 잠금쇠가 두 겹의 문 사이에 숨겨져 열쇠 구멍만 드러냈다."
안에서든 밖에서든 열쇠로만 열 수 있는 문이었다.
독심호리가 식지의 상양혈로 내공을 뽑아냈다. 내공이 점점 유형화되어 셋의 눈에도 선명히 보였다.
독심호리는 땀을 뚝뚝 흘리며 형상화한 기운을 열쇠 구멍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기운을 돌리는 데 반 각이나 소모했다.
"우연히 완안덕명의 열쇠를 본 적이 있다. 그 모양을 기억해서 매일 연습한 보람이 있구나."
문을 연 독심호리가 소매로 흥건한 땀을 닦았다.
'무극존자 못지않게 심계가 깊은 사람이구나.'
지금까지 들은 걸 종합하면, 완안덕명은 무척 주도면밀하고 의심도 많은 자였다. 그런 자 밑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십사 년이나 견뎠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홀로 안으로 들어간 독심호리는 줄을 끊기도 하고 뭔가를 부러뜨리기도 하고 걸상이나 화로를 조심스럽게 치우기도 했다.
"이젠 들어와도 괜찮다. 그래도 이상한 거 있으면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나한테 확인받거라."
넷은 탁자와 책장에 있는 수많은 책을 빠르게 살폈다. 내용을 대충 살펴서 무공 비급이 확실한 건 따로 수습했고, 비급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것도 따로 수습했다.
확실히 무공비급이 아니다 싶은 것들도 한쪽에 쌓아뒀다. 여유가 되면 모두 들고 갈 작정이었다.
"호리 사형, 여기 완안덕명이 받은 편지들이 있어요."
"그건 모두 수습해라. 완안덕명과 친한 자들이 누군지 알면 몰래 쏘는 화살을 피할 수 있다."
복수 상대를 알아내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잔월은 소림이나 아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원 황실의 총애를 받는 장문인의 거처치고는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청술을 이런 식으로 써먹을 줄은 몰랐구나.'
바닥에 귀를 댄 잔월은 두 손에서 내보낸 내공을 바닥과 벽 여기저기서 충돌하게 했다. 어떤 소리가 무슨 의민지 모르지만, 잔월은 그저 다른 소리를 찾아내면 되었다.
"침대 밑이 이상합니다."
다른 곳 바닥과 벽과 달리 침대 밑에서 들리는 소리만 특이했다. 수색과 분류를 끝낸 셋은 잔월의 말에 합심해 운남에만 난다는 따뜻한 돌침대를 밖으로 끌어냈다.
"이것도 열쇠가 필요한데?"
독심호리 말에 혁중이 무릎을 쳤다.
"잔월, 아까 한철 끊던 것처럼 잠금쇠를 망가뜨려."
잔월은 내공으로 문의 구조를 대충 느낀 후 잠금쇠가 있는 곳으로 천양과 빙련의 기운을 보냈다. 아까완 달리 톡 소리는 잔월 귀에만 들렸다.
"문고리가 없는데 어떻게 열어요?"
"그건 내가 할게."
독심호리가 손바닥을 바닥에 난 철문에 대고 흡기공을 펼쳤다. 잡을 데도 없고 뭔가를 비집어 넣기엔 틈도 얇아서 고민이었는데, 독심호리가 심후한 내공으로 손바닥을 문에 붙여 손잡이를 대체했다.
"이거 다 얼마야?"
안에는 황금과 은 그리고 딱 봐도 진귀한 병장기들이 있었다.
"병장기는 다 챙겨라. 그리고 황금과 은은 적당히 챙기도록."
그러나 적당히 하라는 말은 개인마다 해석이 너무 달랐다. 상관소혜와 혁중은 아무리 퍼담아도 남은 황금과 은자가 눈에 밟혔다.
"남은 황금과 은자를 연무장에 뿌릴 거야."
독심호리의 말에 상관소혜와 혁중이 자루에 못 담은 황금과 은을 그러안았다.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는 눈빛에 독심호리는 고개를 저었다.
"완안덕명이 살아있고 원 황실이 건재하면 우린 이 돈을 쓰지도 못하고 도망만 다녀야 해. 정신 좀 차려라."
"혹시 용문파 제자들이 황금과 은을 줍고 다 도망가길 바라는 겁니까?"
"피는 못 속이는구나. 사부 명이긴 하지만, 태을전을 태우는 게 조금 내키진 않았다. 이게 있으면 완안덕명 집만 태워도 될 것 같구나. 어린아이는 물론 남은 제자 대부분 평소 냉대를 받는 자들이다. 황금과 은을 보면 들고 도망칠 놈들이지. 그러면 여기 일이 무림대회로 간 완안덕명에게 늦게 전달될 거고, 우린 그간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래도 상관소혜와 혁중의 눈에서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능력 이상으로 욕심을 부리면 위기가 끊이지 않고 무욕한 삶을 살면 재난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다가도 그냥 돌아간다."
"용문파 개잡놈들 주기 아까워서 그러죠. 차라리 예전처럼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면 기분이라도 좋죠."
"일반 백성에게 황금이나 은원보는 독이나 다름없다. 예전에도 대사형은 쌀 같은 것만 백성들에게 주고 돈이나 이런 건 홍건군을 비롯한 의병에 전달했다."
독심호리의 말에 잔월은 큰 외숙공 일가가 생각났다. 그러나 강릉을 떠나며 훨씬 많은 은자를 지녔을 때도 괜찮았으니 잔월이 준 은자 부스러기로 위험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태을전 앞 연무장에 황금과 은원보를 가득 뿌린 후 완안덕명 거처에 불을 질렀다.
독심호리와 잔월이 무거운 금과 은을 들고 상관소혜와 혁중은 비급을 넣은 주머니를 멨다. 책도 무겁고 금과 은은 더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산뜻했다.
"하, 저것들 보게?"
태을전이 큰불에 활활 탔다. 태백산에 간 자들이 벌써 돌아올 리 없으니, 어린 제자들이 황금과 은원보를 보고 더 큰불을 질러버린 게 틀림없었다.
上梁不正 위의 대들보가 삐뚤면
下梁歪 밑의 기둥도 삐뚤어진다
- 작가의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습니다. 완안덕명이 어떤 자인지는 곧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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