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곡진·기관
'전음을 엿들었다.'
누가 누구한테 보낸 건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전음이 실제 목소리와 다르기에 언어 습관으로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말투로만 저들을 구분하기엔 만남이 너무 짧았다.
'제갈속도 대비를 했겠지. 괜히 끼어들지 말자.'
예전이라면 제갈속에게 알려야 하는 게 아닌지 한참 고민했을 테지만, 이젠 협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에서 벗어났다.
협에 집착하게 된 건 무극존자의 심령제압 때문이다. 심령제압 당한 상황에서 무극존자의 말에 반발하는 바람에 협을 지킨다는 말이 잔월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공손용기 만났을 때 무극존자가 줬던 상편이 가짜임을 알고 심령제압을 깼지만, 협을 지켜야 한다는 집착은 벗지 못했다.
그러다가 무당에서 협에 대한 생각을 확고히 한 후 집착을 벗었다. 무엇이든 올바르게 하는 게 협이 아님을 깨닫고 하오문과 제갈속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
"그냥 네가 길 안내 잘하면 되는 거 아냐?"
외우는 게 힘들었는지 하오문 무인이 툴툴거렸다.
"진법에서 흩어지면? 그냥 죽을 거야?"
한 시진이나 지나서야 하오문 일행이 출발했다.
[움직이면 안 되오. 제갈속을 몰래 돕는 자가 있을 수 있소]
잔월은 전음으로 청강과 칠신병에게 계속 기척을 숨기라고 지시했다. 셋은 하오문 일행이 떠나고 일각이 지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장로. 어떻게 할까요?"
"나도 무곡진에서 움직이는 법을 아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내 뒤를 따르기만 하면 되오."
"하오문 뒤를 따를 겁니까?"
"그렇소. 저들은 비급을 두는 장소를 아는 것 같소."
무곡진 앞에 도착한 잔월은 기감을 넓혔다. 무곡진 범위를 가늠하고 놀라움에 혀를 찼다.
석경협의 오양월음진도 대단한 진법이었다. 그런데 무곡진은 그 범위가 작은 도시 하나를 덮을 정도였다.
"내가 딛는 곳을 따라 디디면 되오. 혹시 실수해서 내가 안 보이면 움직이지 마시오. 내가 움직여 꺼내줄 테니."
칠신병은 물론 청강도 고수 소리를 들을법한 수준이다. 고작 앞사람 발자국을 따르는 일엔 실수하지 않는다.
"멈추시오."
진법에 들어가고 잔월은 바로 멈췄다. 무당에서 배운 방법대로 무곡진의 흐름을 느꼈다.
'모든 기척이 안으로 향하는구나.'
어느 기척이 누군지 구분할 재주는 잔월에게 없었다. 그러나 기척 개수로 무리를 구분하는 건 가능했다.
'하오문과 일치하는 무리는 없다. 그렇다면 가장 근접한 숫자의 무리로 가야지. 걷다가 무리가 갈라질 수도 있으니.'
"사부. 저기 시체 있다."
백 걸음도 걷기 전에 칠신병이 피 냄새로 시체를 찾아냈다. 잔월은 둘에게 가만히 있으라 하고 혼자 시체 있는 곳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하오문 무인이다. 나를 따라라."
칠신병과 청강은 잔월을 따라 시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마에 쇠꼬챙이 세 개를 꽂은 하오문 무인 시체가 있었다.
"기관 암기입니다."
"기관 암기?"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암기를 발사하는 기관이 있습니다. 웬만한 고수가 던지는 암기보다 훨씬 위력이 강합니다. 내공으로 던지는 게 아니어서 낌새를 알고 피하기도 어렵습니다. 원나라 덕분에 서양 문물이 많이 넘어왔는데 기관도 그중 하납니다. 무곡산장이 무곡진에 기관을 결합한 거 같습니다."
"내공을 용천과 백회 사이를 느리게 오가게 하시오. 그럼 공격받을 때 내공이 빨리 반응해 목숨을 구하고 부상을 줄일 수 있소."
청강과 칠신병은 잔월이 시키는 대로 내공을 움직여 몸을 보호했다.
"사부. 저기."
하오문 무인 시체를 벌써 열이나 발견했다.
"피 냄새가 싱싱하다.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체다."
하오문 무리와 거리가 가까워진 것 같았다.
'소림사 대단하구나. 한 명도 안 줄었어.'
잔월은 잠시 멈춰서 기척을 느꼈다. 거리는 잘 짐작되지 않지만, 기척 숫자는 똑똑히 느껴졌다. 수많은 무리 중 숫자가 가장 많이 줄어든 건 황실 무리였다. 다른 무리도 어느 정도 줄었고 소림으로 추정하는 서른여섯인 무리만 그대로였다.
"젠장. 더는 못 가겠다."
조금 더 걸으니 하오문 무인의 짜증과 두려움이 가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셋은 멈춰서 기척 숨기는 데 열중했다.
"여기까지 와서?"
제갈속이 외치자 하오문 무인이 반발했다.
"열이나 죽었어. 벌써 열 명 죽었다고. 이대로 가다가 다 죽으면 무슨 소용이냐고."
"이제 와서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돌아가자. 돌아가서 무곡산장에서 오는 소식을 듣고 움직이자."
그때 포주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황실 말고 다른 놈들이 무극환허인 얻으면? 우린 돌아가도 문주한테 제거당한다. 제갈속 말대로 다른 비급 얻어서 익힌 다음 무력으로 문주를 제압하는 게 낫다."
"난 제갈속이 일부러 우릴 죽음으로 몰아넣는 거 같아."
면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그래."
편담도 살아있었다.
"자. 모두 화를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생각해. 기관에 당해 한 명이 죽고부터 내 위치는 너희가 정해줬어. 앞장서라면 앞장섰고 뒤에 가라면 뒤에 갔지. 그리고 기관을 해체해서 위험을 없앤 것도 나였어. 기관 해체하는 건 맹수 입안에서 가시 빼내는 것과 같아. 자칫 잘못 건드리면 내가 죽는다고. 나도 너희만큼 위험을 무릅썼다."
"문주가 하오문 문도도 아닌 너에게 결정권을 준 자체부터 이상해. 너 문주 편이지?"
채도 목소리였다.
"나한테 준 게 아니라 나랑 포주에게 준 거다. 그런데 너희가 하도 무식해서 내가 자주 나선 것뿐이지. 그럼 지금부터 가만히 너희 지시만 따르면 돼? 어떻게 하면 돼? 면도 말처럼 뒤로 물러섰다가 무극환허인도 놓치고 비급 훔칠 기회도 놓친 다음 돌아가서 문주에게 고문당하다가 죽을까? 문주라면 분명히 우리가 뭔가 얻고 숨겼다고 의심할걸?"
"제갈속. 네 생각을 말해."
보다 못한 포주가 나섰다.
"포자랑 채도가 번갈아 앞장서는 게 희생 줄이는 방법이다."
포자는 철을 두드려 만든 밀대를 무기로 쓰는 자로 일행 중 내공이 가장 많다. 채도는 날이 넓은 칼을 무기로 쓰기에 날아오는 암기를 막기에 적합하다.
"난 내상 입었다."
채도는 암기 하나 막고 내상을 입었다.
"이렇게 하자. 포자가 앞장서라. 그리고 나랑 편담이 따르며 돕는다. 남은 자들은 제갈속을 보호해라. 우리가 살려면 제갈속이 있어야 한다."
포주의 말에 포자가 밀대를 들고 앞장섰다. 하오문 무리가 떠나고 조금 지나서 잔월 일행도 움직였다.
"장로. 저들을 따르는 것보다 진법을 뚫고 무곡산장에 가는 게 낫지 않습니까?"
청강은 먼저 움직인 다른 자들이 비급을 손에 넣을까 봐 걱정되었다.
"무곡산장이 철저히 대비하고 있을 거요. 저들은 안 들키고 들어가는 방법을 아는 게 분명하오."
하오문 무인 중 실력이 청강 정도 되는 자는 포주 하나뿐이다. 남은 자들은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었다. 그러니 분명히 몰래 들어갈 방법을 알고 진법에 들어왔다.
최소 네 권의 가짜 비급을 없애야 하기에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잔월은 계속 하오문 뒤를 따르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하오문 무인 시체가 간간이 하나씩 나왔다. 그러다 하오문 무인들의 기척이 갑자기 사라졌다. 잔월은 어렵게 바닥에 남은 흔적을 찾아냈다.
"흔적이 없다."
칠신병이 중얼거렸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흔적이 갑자기 사라졌다. 잔월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감각을 퍼뜨렸지만, 다섯 남은 하오문 무리의 기척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장로, 그거 아닐까요? 하오문에서 봤던 거."
"하오문의 진법?"
하오문은 진법 안에 진법을 숨겼다. 바깥 진법을 알아차려도 지하로 내려간 다음엔 진법에서 벗어났다고 여겨 경각심을 낮춘다. 그래서 안에 있는 진법이 원래보다 훨씬 큰 효과를 보였다.
그러나 청강 생각과 달리 잔월은 진법에 문외한이었다. 진법이 있는지 발견해도 넘어가는 방법을 찾아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부. 여기 이상하다."
다행히 칠신병이 있었다.
"뭐가?"
"다른 데는 발자국이 있는데 여기만 없다."
비석을 닮은 바위 뒤편에만 발자국이 전혀 없었다. 잔월은 바닥에 귀를 대고 내공을 투사했다. 사방으로 뿌려진 내공이 여기저기 부딪히며 다양한 소리를 잔월 귀로 돌려줬다.
잔월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석판을 발견했고 그 밑에 있는 거대한 공간도 느꼈다.
"내가 문을 들면 먼저 들어가라."
잔월은 바닥에 손을 대고 흡기공을 펼쳤다. 흡기공에 관한 이해는 독심호리보다 못했지만, 내공이 많다 보니 무거운 석판도 어렵게나마 들었다.
칠신병과 청강이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받쳐줘. 나도 들어가야지."
칠신병은 그러려니 했지만, 청강은 엄청 무거운 석판을 내공으로 당기면서 입을 여는 잔월 때문에 매우 놀랐다.
"기다려. 키가 모자라."
칠신병은 키가 작고 청강은 내공이 부족하다. 밑에서 받치는 거라면 잔월도 크게 힘들지 않겠지만, 흡기공으로 당기는 거여서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
칠신병은 봇짐에서 금속 막대를 꺼내 조립해 곤을 만들었다. 곤에 내공을 주입해 석판을 받쳤다. 잔월이 경공을 펼쳐 안으로 들어오자 석판을 천천히 내렸다.
석판이 내려지자 기관이 작동했다. 고운 흙이 쏟아져나온 다음 빗자루 비슷한 것이 나와 좌우로 쓸었다. 잔월이 흡기공을 펼치며 남긴 손바닥 흔적이나 칠신병과 청강이 엎드려서 밑으로 들어가느라 남긴 흔적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위에서 흔적을 지우는 사이 밑에서도 분주히 움직였다. 잔월은 무곡진에서 움직이는 방법만 배웠다. 지하에 다른 진법이 있다면 엄청나게 헤매야 하기에 최대한 하오문 뒤를 바싹 따라야 했다.
기척을 감지하며 따라가다가 하오문이 멈추자 셋도 멈췄다.
"여기에 뒷문이 있다. 찾아라."
제갈속의 말에 포주와 편담 그리고 포자와 면도가 품에서 고운 가루를 꺼내 사방으로 뿌렸다. 넷이 뿌린 가루가 가라앉길 기다리며 제갈속이 새알 크기의 하얀 환약을 입에 넣었다.
"태산 현무관 대제자."
편담이 화들짝 놀라며 손때가 반질반질한 멜대를 꽉 잡았다.
"귀곡 유일 생존자."
면도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팽영옥 관문 제자."
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제갈속을 쏘아봤다.
"난 금릉 칠성문 문주다."
포자는 자기 입으로 신분을 밝혔다.
"모두 원수를 피해 하오문에 몸을 숨긴 사람들이지. 나완 달리 말이야."
제갈속 몸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올랐다. 굳이 잔월처럼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 아니어도 제갈속 단전에서 꿈틀거리는 어마어마한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잔월은 천희연에게서 배운 방법으로 칠신병과 청강의 기척도 함께 숨겼다.
霧谷陳 무곡진에
機關 기관을 결합하다
- 작가의말
어제 누가 잔월한테 전음 보낸 것처럼 낚시해서 미안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앞에 전음도청술을 펼쳤다고 잠깐 언급했고 별생각 없이 글자 수에 맞춰 거기서 끊은 겁니다.
“난 월영도법 유일 합법 계승자로서 옥녀공을 극성으로 익히고 섬전도의 유일 수련자이며 백마사 구인류를 익힌 문외제자에 아미파 통비권을 익힌 문외제자이자 전공 사부에 화산파 대제자에 개방 타구봉법을 복구한 집법 장로 독고잔월이오. 별로 중요한 얘긴 아닌데, 구양진경도 익혔소.”
“시발, 너 잘났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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