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기화
바다가 있었다. 끝을 짐작하기 어렵고 깊이를 느낄 수 없는 바다.
산이 있었다. 꼭대기가 안 보이고 에둘러 가려고 하니 막막해지는 산.
하늘이 있었다. 내 눈길이 닿은 저곳이 진정 끝일지 계속 의심하게 만드는, 텅 빈 것 같지만 모든 것을 품은 하늘.
땅이 있었다. 파도 파도 그 바닥을 볼 수 없는 두꺼운 땅.
무극존자가 떠올랐다. 백원선사가 떠올랐다. 검선이 떠올랐다. 광명우사도 떠올랐다.
'애송이들.'
잔월이 만약 장삼풍이었다면 천하 사대 고수로 불리는 저들을 애송이라고 비웃어줬을 것 같았다.
고수 두 글자가 의미 없게 느껴졌다. 장상품 앞에서 고수라고 자처하는 건 우물이 바다 앞에서 깊이를 자랑하고 둔덕이 산 앞에서 굴곡을 자랑하는 셈이다.
"치료에 앞서 할 일이 있다."
장군보와 그 사형제마저 처음 보는 모습인지 인사 올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새겨들어라."
"구양진경은 대단한 무학이다. 수십 년 고민했는데 오늘 아침 또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깨달은 건 내 것이니 안 알려주겠다."
장삼풍은 눈을 감고 일각 정도 침묵했다. 눈을 뜬 장삼풍은 바로 입을 열어 구양진경의 구결 풀이를 여덟에게 들려줬다.
"너무 뛰어나서 부족하구나."
구결 풀이를 마친 장삼풍이 잔월에게 말했다.
"내가 깨달은 게 아니고 구양진경이 품은 기본 의미들이다. 구결을 어떻게 엮어 어떤 형태를 빚어낼지는 각자 몫이다."
잔월은 안 알려준다면서 왜 이토록 상세히 알려주는지 이해 가지 않았다. 그 속마음을 장삼풍이 읽고 대답했다. 여섯 제자는 물론 천희연도 장삼풍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는데 잔월만 오해했다.
"그만큼 순수하다는 뜻이겠지. 결핍이 없는 자는 채우려 하지 않고 채우지 않는 자는 부족함을 느끼지 못한다. 넌 강한 무공을 익히려고 태어났구나."
사대 고수로 불리는 넷 중에 검선이 가장 약하다. 독고경천이 경지에 이른 후 검선은 강한 무공보다는 검법의 완성에 목적을 두었다. 자신을 훌쩍 뛰어넘을 게 분명한 독고경천에게 부족함 없는 사부가 되려는 생각이었다.
천희연 조부인 천부전 역시 무공의 완성을 추구하는 무인이다. 싸우는 실력은 조금 부족해도 경지는 검선 못지않다.
백원선사 역시 통비권을 이룬 후 무공이 정체했다. 그래서 강한 무공보다는 통비권을 보다 익히기 쉽게 완성하는 데 열중했다.
광명우사나 무극존자는 이들과 다르게 강한 무공을 좇는 자들이다. 타고난 성격과 무공의 성질 모두 완성보다는 강함을 목표로 했다.
장삼풍은 잔월이 광명우사나 무극존자와 비슷한 부류라고 평가했다.
"쉽게 익히고 쉽게 펼치나 완성은 어렵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아라.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도 그 쓰임새가 따로 있는 법. 하늘이 너를 이리 훌륭하게 빚었으니 꼭 그 쓸모를 다할 것이다."
"협이 뭡니까?"
잔월이 불쑥 물었다. 장삼풍이라면 자신이 협에 대한 고민을 말끔하게 해소해줄 것 같았다.
"대제자. 협이 뭐라 생각하느냐?"
"그딴 거 모릅니다."
장군보가 대답했다. 소림에서 십 년 중노릇하고 갓 환속했을 때 보여줬던 점잖은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도 몰라서 묻는데 너도 모르면 어떡하느냐."
"궁금한 사람이 알아내야죠. 난 안 궁금한데요."
장군보의 대답에 장삼풍이 손뼉을 짝 쳤다.
"답이 되었느냐?"
잔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잔월의 협은 자신이 고민하며 찾아내야 한다. 협은 누군가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아니다.
"협은 말이다."
그런 잔월을 골리기라도 하듯, 장삼풍이 협에 관해 얘기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상대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게 옳은지 고민하는 과정이다. 고민하고 고민하고 끝까지 고민해라. 결론이 나면 그건 협이 아니다."
잔월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 똑똑히 봐둬라. 이건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장삼풍이 서서히 날아서 도관 앞 작은 연무장에 내렸다. 잔월은 느릿느릿한 장삼풍의 신법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장삼풍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는 건 섬전도처럼 순식간에 이동하는 것보다 열 배는 어려운 일이었다.
"장권이다."
팔을 강하게 휘둘러 상대를 타격하는 단순한 무공이었다. 그러나 장삼풍이 왼팔과 오른팔로 각각 다른 초식을 펼치자 순식간에 대단한 무공으로 변했다.
"면장이다."
손바닥을 앞으로 밀 때마다 온몸이 함께 움직였다. 단순히 강한 힘을 전달하려는 게 아니라 몸 전체의 조화를 이루려는 목적이었다. 공격을 수십 번 했는데 하나의 초식처럼 끊어짐이 없이 면면부절(綿綿不絶) 이어졌다.
"진산장이다."
면장과 반대로 무척 강맹한 초식이었다. 장풍이 거센 걸 보니 격공장의 한 종류인 듯했다.
"진천철장이다."
진천철장은 반대로 내공이 끝까지 손바닥에 머물렀다. 단순히 위력만 따지면 진천철장이 훨씬 나았다.
"회풍장이다."
회풍장은 양팔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장법이었다. 장삼풍의 두 손이 만들어내는 회오리에 말려들면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극현공권이다."
보통 부드러운 장법이 있어도 부드러운 권법은 없다. 손을 펴서 수비도 쉬운 장법과 달리 주먹을 쓰는 권법은 공격적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무극현공권은 무척이나 부드러워 이게 권법이냐 싶을 정도였다.
"태극권이다."
혼연일체를 무공 자체에 품어버린 대단한 절학이었다. 예전에 무당파 제자가 펼치던 것보다 훨씬 단순해 보였지만, 그 단순한 움직임이 품은 의미는 잔월이 감히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신문십삼검이다."
장삼풍이 허리띠를 풀어 내공을 주입해 검처럼 만들었다.
"태극검법이다."
신문십삼검은 손바닥의 신문혈만 노리는 검법이었다. 뭘 노리는지 모르는 잔월에겐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혼연일체에 사량발천근의 묘미까지 섞인 태극검법은 보는 내내 감탄했다.
"양의검법이다."
양의심공을 익힌 잔월은 어렵지 않게 양의검법의 뛰어남을 알아봤다. 어디로 향할지 짐작되지 않는 검 끝이지만, 표홀한 움직임은 전혀 억지스럽지 않았다.
그 뒤에도 장삼풍은 수많은 무공을 보여줬다.
"십단금이다."
장삼풍은 십단금으로 무공 시연을 마무리했다. 원래 이름은 팔단금으로 몸을 단련하는 내외공을 결합한 수련법이었다. 장삼풍은 팔단금을 기반으로 권장법을 만들어내고 이름을 십단금으로 바꿨다.
"치료 시작하자."
장삼풍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정좌한 후 천희연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천희연이 몸을 축 늘어뜨리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공손용기가 펼쳤던 허공섭물은 아이들 소꿉장난으로 보일 정도로 대단한 모습이었다.
반 각도 안 되어 천희연의 몸이 땅으로 내려왔다. 구양진경 해석하고 무공 시연하는 데 걸린 시간이 한 시진이 넘는데 결국 치료는 짧게 끝났다.
"천잠포(天蠶布)를 가져오거라."
장군보의 신형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어느새 손에 누런 천이 들려있었다.
장삼풍은 천잠포라고 부른 천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적었다. 글자 하나 적을 때마다 오래 고민했다. 겨우 칠십 글자 정도 적었는데 반 시진이 훌쩍 지났다.
"천잠공으로 내공을 주입하면 글자가 나타날 것이다. 천잠공 성취가 부족하면 적게 나타날 것이고 높으면 많이 나타날 것이다. 총 예순여덟 글자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누런 천을 장군보가 곱게 개어 품에 넣었다.
"만나자마자 작별하자니 조금 섭섭하구나. 그냥 떠나야 하는데 마지막 순간 범심(凡心 - 세속적인 마음)이 발작해 끝내 뭔가를 남기고 가는구나."
말을 마치기 무섭게 장삼풍 몸이 크게 부풀며 허공에 떠올랐다.
상서로운 안개가 몰려와 장삼풍 주변에 뭉쳤다. 눈과 귀와 코와 입의 칠공으로 기운이 들어가고 나오기를 반복했다.
배꼽 근처에 연한 붉은색의 연꽃이 곱게 폈다. 머리 위에는 세 가지 색이 어울려 나뭇잎 같기도 하고 꽃 같기도 한 모양을 빚었다.
삼화취정은 백회혈과 인당혈을 이은 선의 중간에 있는 현관일규(玄關一竅)에 뿌리를 둔다. 장삼풍 머리에 생긴 꽃인지 잎인지 구분이 힘든 그것은 무림에 전해지는 삼화취정과는 사뭇 달랐다.
'강호에 소문으로 퍼진 건 삼화취정 초입이겠지. 저건 삼화취정이 끝에 닿아 신기정이 하나 된 모습이다.'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장삼풍의 몸이 줄었다가 늘어났다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 장삼풍 몸에서 안개와 같은 기운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사부 몸은 십수 년 전에 죽었다."
장군보가 입을 열었다.
"사부의 오장육부는 기운을 잃었다. 할 일이 남은 사부는 오장육부를 없애고 내공으로 대신했다. 십수 년 동안 심장도 폐도 없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내공 흐름이 비틀어지면 몸이 터질지도 모르기에 잠도 못 자는 힘든 나날이었다."
그제야 장삼풍이 말한 작별이 삶과 죽음으로 갈라놓은 영원한 이별임을 깨달은 잔월과 천희연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협을 지켜라."
마지막 울림을 남긴 장삼풍 몸이 땅에 떨어졌다. 머리와 팔다리는 그대로인데 몸은 무척이나 얇았다. 오장육부는 물론 척추도 없어서 가죽만 남은 몸통을 보며 장군보를 비롯한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눈물 흘렸다.
"우화등선(羽化登仙)입니까?"
장삼풍의 팔다리도 빠르게 쪼그라들었다. 그러더니 수많은 밝은 깃털이 되어 바람에 날려갔다. 참지 못하고 손을 내밀어 깃털을 잡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르지. 우화등선해 본 적 없는데."
장군보가 눈물을 닦고 몸을 일으켰다.
"세상 만물은 기로 이뤄졌다. 인간의 몸 역시 무수한 기운이 모여 만들어졌다. 만약 인간의 몸이 어떤 기운이 어떻게 엮여서 이뤄졌는지 알아내면 영생의 비밀이 풀리지 않을까? 사부께서 세상을 가여이 여기지 않고 생로병사의 비밀을 파헤쳤더라면 영생을 이뤄 신선이 되지 않았을까?"
장삼풍은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밝은 깃털도 멀리 가지 못하고 스러졌다.
"이젠 매일 고기 먹을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슬플까."
장군보의 중얼거림이 잔월 가슴을 후벼팠다. 천희연 역시 자신을 치료하느라 장삼풍이 목숨을 버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천 소저는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다. 우리 치료를 받아야 할 뿐 아니라 구양진경의 요상결에 따라 운기로 몸을 회복해야 해."
"구양진경 요상결이요?"
"무당에 있는 구양진경엔 요상결이 있다."
장군보는 천희연에게 요상결을 가르쳤다. 천희연은 듣자마자 이해하고 바로 요상결로 치료를 시작했다.
"소형제. 음양무변을 어디까지 깨우쳤는가?"
"음과 양이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三豊 삼풍은
氣化 깃털로 사라졌다.
- 작가의말
어떤 식으로 묘사할지 고민 많이 했습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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