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서·의뢰
장군보는 말없이 먼 곳을 쳐다봤다. 어떻게 말해야 잔월에게 오해 없이 전달될지 고민을 거듭하다 포기했다.
'본인 수준에 맞게 알아서 잘 해석하겠지.'
"음양무계에서 넌 무계만 깨달았구나."
잔월은 잠자코 들었다.
"음과 양이 다르지 않다면 굳이 왜 음양으로 나눌까? 그냥 일원(一元)무계라고 하지 왜 굳이 음양무계일까?"
'과유불급.'
깨달음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야 한다. 잔월은 음양무계에 관한 이해가 낮은 상황에서 한대붕을 만나 음과 양의 경계가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음과 양이 어떻게 다르고 어떤 기준으로 나눴을지 고민하기도 전에 너무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음양으로 나눈 이유가 있다. 음양이 결국 인간 기준으로 나눈 거라지만, 그 기준이 틀렸다면 음양론이 벌써 사라졌겠지. 너는 음양무계가 불필요한 기운을 전신으로 분산하여 없애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잔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성해 덕분에 음양무계 역할은 그저 기운을 분산하는 데 그쳤다. 음양무계로 기운을 흩어놓고 기성해로 나뉘며 약하게 변한 기운을 움직이는 게 정말 편했다.
"밤이 있기에 낮이 있다. 밝음이 있어 어둠도 있다. 쭉 낮만 있다면 굳이 낮과 밤을 구분할 필요가 없지."
장군보의 말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밤에는 잠을 자고 낮에는 깨어서 일하든 수련하든 활동한다. 그러나 밤에 일해도 되고 낮에 자도 되는 거야."
잔월 속에서 뭔가 세게 꿈틀거렸다. 취접의 취접장에 당해 커다란 내상을 입었을 때처럼 울렁거렸지만, 기운은 오히려 더 활발하게 움직였다.
"음양무계는 몸속의 기운을 정리하는 거야. 굳이 적대적인 기운만 정리할 필요가 없지. 네 기운도 음양무계로 정리할 수 있다. 다름을 알아야 같음을 알 수 있지. 넌 다름을 모른 채 무작정 같다고만 생각했기에 음양무계의 무계를 진실로 깨닫지 못했다."
적대적인 기운을 분산하는 걸 음이라고 하면, 본인 기운을 분산하는 걸 양이라고 여길 수 있다. 음양무계는 우선 음양 이분법으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바른 사고방식을 기른 후, 결국엔 음양의 구분이 의미 없음을 깨닫는 공부다. 잔월은 음양의 구분을 제대로 모르는 상황에서 무계를 깨달아버렸다.
엉겁결에 정답을 찾아냈지만, 그 과정이 미흡하여 깨달음이 마음에 새겨지지 않았다. 머리로만 아는 답이어서 어마어마한 깨달음에도 큰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
'구양인!'
여덟 인을 합쳐 하나로 만들려는 생각에 공통된 점만 찾으려 했다.
'다른 점을 알아야 뭐가 같은지 알 수 있다. 같다는 건 동일하다는 뜻이 아니다. 본질이 같지만, 겉으로 표현되는 형태와 성질은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다름을 알아야 같음을 깨닫는다. 잔월은 전칠이 대수인을 익혀내려면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려야 한다는 말에 안 버릴 것을 찾으려 했다. 여기까진 음양무계의 음양의 이치를 잘 따른 셈이다. 그러나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찾는 과정에 공통점만 찾으려는 실수를 저질렀다.
'월영도법.'
조사동에서 검선을 구할 때 허실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러나 그 뒤로 월영도법에 큰 성취는 없었다. 허와 실의 경계를 허물기 전에, 그 경계가 뭔지부터 확실히 인지했어야 했다.
'구양진경.'
모든 걸 말하는 것보다 하나를 확실하게 말하는 게 낫다는 구결이 있었다. 장삼풍이 구양진경을 왜 대단하다고 평가했는지 어슴푸레 느꼈다.
'만류귀종. 구양진경을 대성하면 내 눈을 가린 안개가 걷어지겠지.'
구양진경은 한 우물을 끝까지 판 절학이다. 구양진경의 깊이를 이해하면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무공이어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이미 생각의 깊이가 생겼기에 생소한 무공이라고 쩔쩔맬 이유가 없다.
'섬전도.'
빠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다. 부드러움이나 은밀함을 구결에서 찾으려 했다. 그러나 얼만큼이 빠른 거고 얼만큼이 느린 건지 기준이 없었다. 그래서 빠름에 대한 집착을 제대로 내려놓지 못했다.
'통비권 대단하구나.'
익힌 무공마다 잔월의 이해가 부족하거나 깨달음이 앞서나가서 제대로 익히지 못했는데 통비권만 그런 게 없었다.
'어떻게 원숭이가 이런 대단한 무공을 만들었지?'
정확히는 사도현공이 원숭이와 대련하면서 만든 무공이다. 처음에야 사도현공이 원숭이에게 배웠지만, 끝에는 원숭이가 도로 배워갔다.
"천 소저 치료가 빨라도 일 년 반은 걸릴 것이다. 일단 네 실력부터 키워야겠다. 시급히 해결할 일이 있어 시간은 오래 못 준다."
그날부터 잔월은 장군보 사형제와 대담을 시작했다. 이들은 강호를 거닐며 보았던 재밌는 일을 얘기해주기도 하고 어떤 사건에 관한 견해를 주고받으며 토론하기도 했다.
도덕경을 비롯해 도교 경전을 함께 공부하며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저, 도가인데 왜 불경을."
급기야 이들은 금강경과 법화경 등을 꺼내 들었다.
"중놈들도 도가 경전 공부하는데 우리라고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여섯 도사의 불경에 관한 공부는 생각 이상으로 깊었다. 머리 깎고 승복만 입으면 어디 가서도 고승 행세가 가능했다.
"음양이나 삼태극은 이해했습니다. 대립이 곳곳에 보이기에 음양이 만들어졌고, 둘로는 균형을 이루기 힘들기에 덕(德)이라는 가상의 기운을 만들어내 음양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들을 집어넣었다는 말씀이시죠? 그런데 오행은 왜 굳이 오행입니까?"
왜 세상을 이루는 기본 구성을 다섯으로 했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의심하고 고민하는 건 좋다. 그러나 오행을 부정하지는 말아라. 음양오행론이 생긴 지 벌써 삼천 년도 더 될 것이다. 긴 세월의 시련을 이겨냈다는 건 그만한 가치를 품었다는 뜻이다."
장군보 말을 금섬자가 받았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필연이다.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이었다는 말이지.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 우연이라면 매일 해가 뜨는 시각이 조금씩 차이 난다는 것이지. 오늘은 우연히 이 시각에 해가 뜨고 내일은 우연히 다른 시각에 해가 뜨는 것이다. 물이 흐를 수 있는 곳이 둘인데 어떤 물은 우연히 이곳으로 흐르고 어떤 물은 우연히 저 방향으로 흘렀다."
"그럼 저도 우연일까요? 누군가는 무공을 익혀 어떤 일을 해야 하는데 우연히 제가 선택된 건가요?"
"너는 필연이다."
잔월 가슴이 쿵 울렸다.
"세상에 있어 우연히 네가 선택된 거지만, 네게 있어 너는 필연이다. 너는 우주 일부지만, 네가 우주 중심이 아니라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렇군요. 우연이 음이라면 필연은 양이군요. 누군가에게 있어 내가 음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내가 양일 수 있겠네요. 음양은 구분되나 그 경계는 모호하군요. 모호할 수밖에 없는 경계가 선명해지면, 결국 경계가 무너져서 음양의 구분이 의미 없어지는군요."
"그렇다. 본질을 알면 그 외의 것들이 부질없이 느껴지지. 내가 사부라면 영생을 추구하겠지 싶으나, 정작 사부 경지에 이르면 나도 죽음을 택할 것 같다."
"그럼 협이란 건."
잔월이 웃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였네요."
협은 기준이다. 내가 잘 모르는 일에 맞닥뜨렸을 때, 내가 짧은 순간에 정확한 판단을 내려 실수를 피하게 하려는 기준. 세상을 잘 안다면 굳이 협이 필요 없다. 뭘 해야 할지 늘 안다면 굳이 사람은 이래야 한다는 기준이 필요치 않다.
"그럼에도 협은 필요하네요. 세상은 모르는 것투성이고 나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
잔월의 기운이 서서히 옅어지자 장군보와 그 사형제들도 숨을 죽였다.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맞는 일이지만, 자리를 피하는 행동이 잔월 깨달음에 방해될까 봐 그냥 기척을 죽이기로 했다.
눈을 뜨니 상쾌했다. 자연의 기운이 좀 더 끈적이는 것 같았고 하늘이 조금은 더 투명해 보였다.
"오래 걸렸습니까?"
"아니, 겨우 네 시진이야."
"최소 보름은 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보름 어치 생각했나 보네. 가서 고기나 먹자."
식사를 끝낸 잔월은 편지를 썼다. 잔월의 양기가 강해 천희연의 치료에 방해된다고 하여 장삼풍이 우화한 날 이후 만나지 못했다. 같은 무당산에 있으면서 편지로 서로 안부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좀 길게 써라. 내일 무당을 떠나야 할 것이다."
"뭘 해야 합니까?"
"편지 다 쓰면 알려주마."
잔월은 부득이하게 무당을 잠시 떠나야 함을 편지 끝에 적었다. 먹을 말리고 곱게 접은 편지는 장군보 품에 들어갔다. 한참 후 장군보가 천희연의 답신을 갖고 돌아왔다.
"다 읽었으면 얘기 좀 하자."
편지를 세 번 정독한 잔월은 잘 접어 불경에 끼워 넣었다.
"무극환허인 그거 말이다. 익힌 자들이 급격히 늙어버린다고 하더라. 비급을 회수해서 없애야겠다. 네가 적임자다."
"스승 여러분이 나서면 훨씬 쉽지 않겠습니까?"
"욕심을 못 이겨 비급을 읽을 것 같구나. 내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된다."
성격이 무척이나 담백한 여섯이지만, 무공과 강한 힘에 관한 욕심만큼은 버리기 힘들었다.
"그럼 저는 왜?"
"사부께서 네가 적임자라고 했다."
'설마, 무극존자도 내가 하편까지 외운 걸 모르는데.'
그러나 장삼풍이 마지막 떠난 모습을 떠올리니 알고 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모두 없애야 합니까?"
"가짜만 없애라고 하더라. 필사본까지 모두."
"비급을 누가 보관하는지 압니까?"
"모른다."
잔월은 속으로 해야 할 일을 곱씹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그럼 왜 삼풍진인께서 직접 없애지 않으셨습니까?"
"무당을 못 떠나니깐. 땅에도 혈도가 있다. 기운이 강한 지혈은 용혈(龍穴)이라고 한다. 용혈을 하나 혹은 다수 포함해 순환까지 이루면 용맥(龍脈)이라고 한다. 사부는 무당의 기운에 맞춰 몸속 기운을 구성했다. 무당을 벗어날 수 없다."
"이걸 천 소저에게 맡기겠습니다."
구양진경이 적힌 일곱 권 불경을 장군보에게 건넸다.
"알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대련 제대로 할까?"
"좋습니다."
잔월은 입고 있던 도포를 벗어버렸다. 멋모르고 장군보와 대련했다가 기운을 제어하지 못해 입고 온 옷은 다 찢어졌다. 무극존자가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에 작심하고 펼친 봉황내의를 그대로 흩어버렸던 장군보였다. 자기 기운을 잘 다룰 뿐 아니라 잔월이 기운 다루는 걸 곧잘 방해했다.
"제길. 크다고 자랑하는 거냐?"
장군보가 투덜거리며 장권으로 대련 시작을 열었다. 잔월과 장군보 몸에서 십수 가닥의 내공 줄기가 넘실거렸다.
毁書 책을 없애라는
依賴 의뢰를 받다
- 작가의말
장삼풍이 예전에 수명이 6년 남았다고 한 건, 무당 용맥이 6년 뒤에 변하기 때문입니다. 무당의 기운이 변하면 장삼풍 내공이 다 흩어져서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인공 방문에 6년을 못 채우고 떠납니다.
은거기인 혹은 절대고수는 백 세가 넘은 후 주인공을 조심해야 합니다. 깨달음을 주거나 내공을 주거나 무공을 가르쳐주고 죽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꼭 죽기 전에 주인공한테 뭔가 일을 시켜 강호로 내보내죠.
장삼풍이 대단하다지만, 결국 주인공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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