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협·이주논협
잔월과 천희연은 봉상부 북쪽에 있는 평량으로 경공을 펼쳤다. 남쪽은 슬슬 봄기운이 몰려올 시긴데 봉상에서 평량으로 향하는 길은 녹지 않은 눈이 가득했다.
짧은 편지를 남겨놓고 나온 천희연이나 말도 없이 가출한 잔월이나 속으로 걱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생소하여 아름답게 느껴지는 경치 덕분에 걱정보단 즐거움이 컸다.
"취협이란 분은 부유하게 사시는군요."
천희연 말대로 취협의 집은 작지만 담벼락까지 있는 장원이었다. 나무를 묶어 대충 울타리를 치고 사는 이선과 대조되었다.
"좋은 집에서 살아도 협객이 될 수 있는 거겠죠. 무공을 익힐 때도 처음엔 복잡하고 화려한 초식이 대단해 보입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단순하고 직접적인 초식이 실전에 좋다는 걸 느끼죠. 그렇다고 화려하고 복잡한 초식이 쓸모없는 건 아니잖습니까."
"무공 생각은 좀 내려놓으면 안 될까요? 모든 얘기가 무공으로 끝나네요."
천희연의 일침에 잔월이 헤헤 웃어버렸다. 화내는 듯한 모습도 너무 보기 좋았다.
잔월의 대응에 천희연이 얼굴을 붉혔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며 발걸음이 빨라졌다. 취협이라는 자의 장원 대문에 도착하고 둘 다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때였으면 반 시진 정도는 어색한 분위기가 지속했을 것이다.
문을 똑똑 두드리니 눈썹이 진하고 얼굴이 갈색으로 탄 건장한 사내가 문을 열었다.
"여기 취협의 거처 맞습니까?"
"날세. 어디서 온 누구신가?"
"이선 대협의 소개로 가르침 받으러 왔습니다."
"드시게."
안으로 들어가니 피 냄새가 짙었다.
"악한 무리가 있어 교화하려 했는데, 죄질이 너무 심하여 그냥 죽이고 말았네."
옷을 담근 대야의 물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최소 열 명은 죽여야 옷에 저 정도 피가 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산에 북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네. 거기 가서 기다리시게."
잔월과 천희연은 취협이 준 술동이를 들고 정자로 가서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흘러 취협이 안주 여럿 들고 나타났다.
"이선 그 친구가 뭐라던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대협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니네. 나는 참을성이 아주 강하다네."
취협은 자기 술잔에 술을 부었다. 술이 정말 가늘게 흘러나와 잔을 천천히 채웠다. 그런데 잔이 다 차는데도 취협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넘칠 정도로 술을 부은 취협이 입을 열었다.
"자넨 왜 술이 넘칠 것 같은데도 날 제지하지 않은 건가?"
"넘치기 전에 멈추려니 생각했습니다."
취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당사자가 아닌 방관자는 누군가 악행을 저질러도 보통은 지켜본다네. 어느 정도가 되면 멈추겠지 하면서 말이야. 그게 인지상정이지."
말을 마친 취협은 가득 찬 술잔에 술을 부었다. 술이 줄줄 넘쳐 흐르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지금 술이 넘치는데 왜 자넨 날 말리지 않은 건가?"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야. 당사자가 아닌 이상 조금 도를 넘어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계속 방관하지."
취협은 술을 훌쩍 마셔버렸다. 그리고 다시 술을 부었다. 술이 넘치자 잔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술이 넘칩니다."
"전의 경험이 있어 똑같은 일을 저지르면 끼어들게 되네. 이젠 술이 넘칠 걸 아니까."
다시 술을 마신 취협은 잔월과 천희연의 잔에도 술을 부었다. 술이 잔을 가득 채울 때 둘이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 모습에 취협이 껄껄 웃었다.
"이젠 자네들도 내가 술을 넘치게 붓지 않을까 걱정하는군."
자기 잔에도 술을 부은 취협은 건배를 제안했다. 술을 마시고 입맛을 다시던 취협이 다시 둘의 잔을 술로 채웠다.
"누군가 악행을 저질러도 나는 일단 지켜본다네. 사정도 모르고 함부로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건 협이 아닌 민폐지. 그러나 악행을 두 번째로 저지르면 나는 이유를 묻는다네. 왜 바르지 못한 행동을 거듭하는지."
"그 이유가 타당하다면 그냥 물러나거나 말로 타이른다네. 그게 아니면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엄포를 놓거나 조치를 하지. 도저히 용서 안 되면 그냥 죽인다네."
말을 마친 취협은 자신의 잔에 술을 부었다. 술이 잔을 넘어나는데도 쏟아지지 않고 계속 쌓였다. 천희연은 아미에 있으면서 가끔 본 장면이지만, 잔월은 술이 계속 쌓이는 광경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문제는 이거야. 힘 있는 자는 술을 계속 부어도 잔에서 넘치지 않게 한다네. 단순히 잔에서 술이 넘치는 걸 기준으로 하기엔 힘 있는 자들이 저지르는 숨겨진 악행이 무척 많다네."
"그리고 힘없는 자는 가끔 잔이 차기도 전에 손이 떨려 술을 밖으로 쏟뜨리지. 그걸 악행이라고 처벌하면 억울한 자만 생기네."
"그럼 대협은 악인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합니까?"
"기준이 없다네. 기준은 세울 수도 없지만, 세워서도 안 되네."
잔월은 취협의 말을 곱씹었다. 협이 뭔지 알고 싶어서 시작한 일인데 점점 헷갈리기만 했다.
"자, 술도 마시고 안주도 들게. 술은 직접 빚었지만, 안주는 근처 유명한 숙수의 솜씨라네."
권커니 잣거니 술동이가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안주도 동났다. 취협은 술동이를 탈탈 털어서 한 방울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자네 혹시 해독에 능한가?"
"어찌 아셨습니까?"
"내 친우가 중독으로 쓰러져 깨지 못한 지 몇 년이나 된다네. 이선이 콕 짚어 나한테 보낸 걸 보면 해독에 재주가 있지 않을까 짐작한 거네. 이선은 마음 수련이 대단하여 상대가 악한지 선한지 그리고 어떤 재주를 품었는지 잘 맞히는 편이라네."
"해독하는 재주가 있긴 하지만, 그렇게 대단하진 않습니다."
"이선이 이유 없이 그댈 보내진 않았을 걸세. 바쁜 일이 없다면 환자를 봐주기라도 하는 건 어떤가?"
잔월과 천희연은 눈빛으로 상의했다. 이선과 달리 거칠어 보였지만, 취협도 인상이 나쁘진 않았다.
"부족한 재주지만, 해보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시게. 내가 말을 준비하겠네."
얼마 지나지 않아 취협이 말 세 필을 끌고 왔다.
"몇 년이나 버티고 있지만, 언제 잘못될지 모른다네. 초면에 실례인 건 알지만, 최대한 서둘렀으면 하네."
"사람 목숨 구하는 일이니 서두름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잔월과 천희연은 취협을 따라 말을 달렸다. 휴식을 최소화하며 임조부까지 도착한 후 말을 맡기고 경공을 펼쳤다.
"여긴 마함산이라고 하네."
마함산은 바위가 많이 보이는 산이었다. 그러나 산세가 그렇게 험준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기다리면 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을 걸세."
마함산을 조금 오르니 석경협이라는 협곡이 있었다. 셋은 협곡 어귀에 멈췄다.
[독고 사부. 좀 이상하지 않나요?]
천희연이 전음을 보냈다.
[서두르는 감이 있지만, 환자가 걱정되어 그러는 게 아닐까요?]
잔월도 취협이 너무 서두른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독고 사부가 해독에 능하다는 건 어찌 알았을까요? 정말 이선 대협이 그냥 보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 재주를 알아내는 신통이 있는 걸까요?]
잔월은 태연한 얼굴로 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러나 천희연과 마찬가지로 의혹이 점점 커졌다.
'지금 취협이 부은 술은 잔을 넘치려 하고 있다. 내게 해독하는 재주가 있냐고 묻는 것까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협곡 앞에서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
"대협. 여기서 누굴 기다리는 겁니까?"
잔월은 그냥 묻기로 했다. 대답이 여의치 않으면 경공을 펼쳐 떠나도 된다.
"내 친구는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네. 몇 년 전부터 영문도 모르고 잠에서 깨지 못했지. 서각 가루도 뿌려보고 은침도 사용했지만, 독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네. 그런데 오독교 교주는 중독이 분명하다고 말했네."
"하독한 자의 정체는 밝히지 못했지. 내부인 소행이라고 여기기엔 하독한 솜씨가 너무 뛰어나. 원래부터 혼수상태에 빠뜨리려 했는지 아니면 죽이려 했는데 실패했는지 모르니 방비를 엄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네. 지금 친구 제자들이 진법을 조절하여 생로를 만드는 중일 걸세."
과연, 일각 정도 흐르고 안에서 스님이 나왔다. 머리를 짧게 기르고 갈색 승복에 황갈색 가사를 입은 스님이 취협을 향해 합장하며 인사했다.
"어찌 벌써 오셨습니까?"
"이분이 해독에 능하다고 하셔서 급히 모셔왔다. 어서 안내하거라."
스님이 잔월과 천희연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잔월과 천희연도 합장으로 답했다. 부리부리한 눈에 정기가 흘러넘치고 몸에 막대한 내공이 흐르는 스님이었다. 몸가짐이 조심스럽고 몸짓에 겸손이 배어있었다.
"지금부터 앞 사람 따라 그대로 밟아야 합니다. 진법에 능한 사람이 없어서 갇히면 구해낸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밀종 스님 뒤를 취협이 따르고 그 뒤를 잔월이 따랐다. 천희연은 잔월 뒤를 따르며 진법을 관찰하는 걸 잊지 않았다.
'오양월음진 같은데.'
오양월음진(烏陽月陰陳)은 생로가 없는 절진(絶陳)이다. 안에 사람이 갇히면 외부에서 생로를 만들어줘야 하는데, 진법에 굉장히 능통한 자가 아니면 생로를 만들어줄 수 없다.
진법은 밤낮의 영향도 받고 절기(節氣)에 따라 기운 흐름이 달라진다. 그냥 생로 만드는 거야 배운 대로 하면 되지만, 진법 모처에 갇힌 사람에게 생로를 만들어주는 건 전문적으로 진법을 배운 사람도 어려운 일이다.
생로를 만들었는데 갇힌 사람이 생로가 지나는 곳에 우연히 있기를 바라기엔 석경협에 있는 진법이 너무 방대했다.
'진의 핵이 어디 있지?'
핵은 씨라는 뜻으로 진법을 존재케 하는 가장 중요한 부속을 말한다. 위력이 약한 진법은 핵이 없어도 괜찮지만, 오양월음진같은 위력이 강한 진법은 적어도 핵이 하나 있다.
넷은 반 각 정도 걸어 진을 벗어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겨우 삼십 장도 안 되는 곳에 협곡 어귀가 보였다. 경공을 펼치면 숨 한두 번 쉬고 이를 거리를 반 각이나 소모한 셈이었다.
"흉수가 협곡 위로 침투하면 어떡합니까?"
잔월의 질문에 취협 대신 스님이 대답했다.
"우리는 생로로 들어왔기에 여기부터 진법 영향을 안 받는 겁니다. 진법은 협곡 전체에 걸렸습니다. 옆으로 걷는 건 괜찮지만, 절대 뒷걸음치지 마십시오."
'이런 곳은 들어오기도 힘들고 들어오면 나가기도 힘들겠구나.'
협곡을 따라 한참 걸으니 작은 절간이 나타났다.
'외숙공!'
갑자기 단무전이 생각났다. 기침요결에 분명히 찾기도 힘들지만, 찾아가더라도 나오기 힘든 곳으로 간다고 했었다.
'외숙공은 이런 곳에 갇혀있지 않을까? 찾기 힘든 건 아니지만, 협곡 자체가 아니라 협곡 안을 말하는 거라면 얼추 맞는다.'
"중독된 지 얼마 되었습니까?"
희망을 품고 질문했다.
"오 년 조금 안 되네."
취협의 대답에 잔월은 크게 실망했다. 그때 단무전은 분명히 자기 발로 떠났다. 단무전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갔을 게 분명하고 여긴 당연히 아니다.
"그간 치료는 받았습니까?"
"오독교 교주도 청했네. 그런데 무슨 독인지 밝혀내지도 못하여 손도 못 댔다네."
醉俠 주정뱅이 협객
以酒論俠 술로써 협을 논하다
- 작가의말
제가 첫 글인 당문지예를 연재할 때 거지행각 님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한 글을 추천해주셨습니다. 당문지예는 시놉시스 뭐 이런 것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시작해서 매일매일 이야기 생각해서 쓰던 글입니다. 애초에 결말도 생각하지 않았고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갈지도 염두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추천글 덕분에 선작이 부쩍 늘었습니다. 그때야 겨우 책임감을 느끼고 이야기에 좀 더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어쩌면 글 하나로 끝날 수도 있었던 저를 글 쓰는 재미에 푹 빠지게 도와주신 사람 중 한 분입니다.
이번에 또 추천글 올려주셨습니다. 감사의 말과 더불어 마음을 담은 글로 많은 분의 응원에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원래 아주 재밌게 썼던 작가의말 지우고 위처럼 썼습니다. 그런데 비축분 수정하는 중에 또 추천글이 하나 올라왔네요.
레드Bull 님의 좋은 평가 및 추천 감사드립니다. 13일에 비축분 3편 쓰고 지금까지 손 놓고 있었습니다. 5월 21일부터 다시 비축분이 써질 것 같습니다.
마음대로 안 되는 것 중 최고가 마음인데 겨우 추스른 거 같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찾아왔던 슬럼프를 추천해주신 두 분과 댓글로 응원하시는 분들 그리고 읽어주시는 분들 덕분에 빠르게 극복한 것 같습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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