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월·심근
"후, 이번엔 대단했어."
기분이 부쩍 좋아진 잔월은 자화자찬으로 자신을 격려했다.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일곱 장이나 움직였다. 비록 수백 장을 날다시피 한 무극존자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방법을 찾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외숙공 외에도 내겐 가족이 있었어.'
부모님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무척 크지만,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는 건 잔월한테 너무나도 기쁜 일이었다.
신나게 목적지로 뛰어가는데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정면에서 덮쳤다. 등에 멘 계도를 미처 뽑을 겨를도 없었다. 잔월은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신형을 순식간에 멈췄다.
'해시신루.'
해시신루(海市蜃樓 - 신기루)는 상대의 눈뿐이 아니라 감각도 속이는 보법이다. 자주 펼쳐보지 못했고 상대가 자강이나 두천이어서 얼마나 효과적인지 여태껏 확인 못 했다.
"생각보다 대단한 놈이구나."
잔월 가슴이 피를 흘렸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아마 심장이 갈라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외숙공. 금강불괴라며!'
"네 명호를 말하거라. 내가 특별히 기억해 주마."
처음 보는 특이한 옷을 입은 사내는 말투가 무척 딱딱했다. 잔월 가슴에 상처를 남긴 검은 어느새 검집에 들어갔다.
"잔월이다."
"강호인의 별호치곤 이상하군."
"이름이다. 별호는 없다."
"안돼."
별호가 없다는 말에 사내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이 불이검(不二劍)의 쾌검에서 살아남은 자가 별호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돼."
그때 손을 뒤로 묶인 열 살 남짓해 보이는 거지가 다가왔다.
"불이검, 어서 풀어."
불이검의 몸이 살짝 떨리는 듯싶더니 거지의 손을 묶은 밧줄이 몇 가닥으로 끊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잔월은 불이검이라는 작자가 언제 검을 뽑았고 언제 검을 넣었는지 보지도 못했다.
"어서 별호를 지어."
다짜고짜 검으로 가슴을 베고, 혼자 감탄하며 이름을 묻고, 별호가 없다고 하니 화를 내면서 어서 별호를 만들라고 난리다. 잔월은 너무 황당한 사태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자, 이 새끼 거지가 정리하겠다. 먼저 내 목숨을 구해준 데 대한 감사를 표한다."
새끼 거지는 잔월을 향해 주먹을 잡고 읍했다. 하도 진지해서 잔월도 엉겁결에 마주 보며 포권했다.
"여기 이 무식한 놈은 멸세교 고수인 불이검이다. 별호에서 알 수 있다시피 상대를 한칼에 죽이지 못하면 다시 공격하지 않는다."
"내가 공격해도?"
"공격은 안 해도 반격은 한다."
잔월은 뭐 저런 새끼 다 있냐는 표정으로 불이검을 쳐다봤다. 아까 덮칠 때 잠깐 살의가 있었고 그 뒤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첫 공격에 살아난 잔월을 계속 공격할 생각이 진짜로 없는 듯했다.
"나는 개방 새끼 방주다."
"그건 또 뭐야?"
"전칠 할배가 방주고 내 아버진 소방주다. 난 무공 자질도 출중하고 학식도 쌓아가는 중이니 굶어 죽지만 않으면 미래의 개방 방주가 될 것이다. 소방주 다음이니 새끼 방주로 호칭하기로 했다."
잔월은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지만, 일단 잠자코 듣기로 했다.
"나는 아주 불행하게도 이 멸세교의 살인마에게 생포되었다. 우린 말다툼을 하다가 내기를 벌였다. 내가 지목한 사람을 불이검이 죽이지 못하면 나를 놔주기로 합의했다."
"죽이면?"
그냥 듣기만 하려고 했는데 너무 기상천외하여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내가 고분고분 멸세교에 가입하기로 했다."
"사흘 만에 끝내 내 마음에 차는 자를 만났는데 단칼에 죽었다. 그리고 저 살인마는 죽은 자의 피를 마셨다."
"왜?"
"그건 내가 직접 설명하지. 내가 익힌 무공은 극쾌를 추구한다. 극쾌를 이루려면 무심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검으로 심장을 벴을 때 흐르는 심두혈(心頭血)을 마시면 내게 남은 인간의 마음을 지울 수 있다. 천 명의 심두혈을 마시면 난 천하에 적수가 없을 것이다."
불이검의 말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죽은 자의 심장에서 나오는 뜨거운 피를 마셔 인성을 없애 무공을 완성한다는 뜻이었다.
"불이검. 넌 설명하는 재주가 좀 부족하다. 남은 건 내게 맡겨라."
불이검은 새끼 거지의 막말에도 전혀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타고난 성격인지 심두혈을 마셔 감정이 무뎌진 건지 살짝 궁금했다.
"약한 자의 피는 안 마신다는 게 불이검의 원칙이다. 하여튼 여기까지 오면서 세 명 모두 불이검 손에 죽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지목했을 때, 불이검은 전과 달리 기습했다."
인정받았다고 기뻐해야 하는 건지 헷갈렸다.
"근데 별호랑 무슨 상관인데?"
"불이검의 손에 살아남았다는 건 강호 어디에서도 인정받을 수준의 고수라는 뜻이다. 그리고 불이검은 자기 검에서 살아남은 자의 별호를 기억하는 습관이 있다. 이름은 비슷하거나 같은 자가 많으나 별호는 중복하기 어렵다. 별호를 기억해 다시 만났을 때 공격하지 않도록 조심하려는 거지."
"얼굴 기억하면 될 거 아냐?"
"강호인은 언제든 얼굴에 칼을 맞아 생김이 변할 가능성이 있다. 별호만큼 확실한 게 없다."
불이검의 대답에 새끼 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호 바꾸면?"
새끼 거지와 불이검 모두 벙어리가 되었다.
"불이검, 어쩔 건데?"
새끼 거지가 재촉하자 불이검이 하늘을 쳐다봤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보였지만, 정작 공격하려니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건 내 불찰이다."
"저 정도 무공이면 어데 가서 얼굴에 칼 맞지 않을 거야. 그리고 저 얼굴이면 까먹기도 힘들고."
불이검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놈과 새끼 거지는 합이 잘 맞았다.
"다음엔 웃는 얼굴로 보자."
작별 인사를 건넨 불이검이 경공을 펼쳐 떠났다.
"저기, 경공이 대단하던데. 날 저기까지 데려다주면 안 될까? 나이보다 경공이 출중한 편이지만, 보다시피 아직 다리가 짧아서."
잔월은 새끼 거지의 허리를 잡은 후 경공을 펼쳤다. 잔월이 엄청 빠르게 달리자 새끼 거지가 버둥거리며 환호했다.
성문 가까이에서 새끼 거지를 내려놓자 주변에 있던 거지가 모조리 몰려왔다.
"아이고. 용케 살았구나."
"됐고. 얼른 내가 무사 귀환했다고 알려. 안 그럼 모친이 또 부친 머리 다 뽑을 거야."
"그리고 구피사골고를 가져와."
구피사골고는 개 껍데기와 뱀 뼈를 고아서 뽑아낸 고약이었다. 새끼 거지는 검은색과 누런색이 섞인 고약을 잔월 가슴에 발라줬다.
"너 진짜 대단하구나. 불이검에게 당하고도 바로 지혈되다니."
굳이 잔월이 뭘 할 필요도 없이 상처 주변의 혈도들이 알아서 불이검의 기운을 해소하고 피를 멈췄다.
"나는 안경으로 가야 해. 너도 무림대회 참석하는 길이면 내가 배에 태워줄게."
"난 아냐."
"너 정도면 초대장을 받았을 것 같은데? 아까도 이름만 말한 걸 보면 성을 밝히기 싫어하는 것 같으니 굳이 캐묻진 않으마. 혹시 남궁세가가 주최하는 무림대회에 참석한다면 날 찾아. 북개방 새끼 방주라고 하면 개방 거지는 다 알아."
'애새끼 참 똘똘하네.'
잔월은 어린 자신을 보며 수많은 사람이 느꼈던 감정을 새끼 거지한테서 똑같이 느꼈다.
구피사골고 효과가 좋은지 아니면 옥녀공 덕분인지. 그것도 아니면 기성해가 외상 치료에도 탁월한지 새끼 거지와 헤어지고 반 시진 정도가 되니 가슴이 근질거리며 아물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희미한 실선 하나만 남았다.
"누구 계십니까?"
쓰러져가는 모옥에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단무전 또래로 보이는 노부부가 있었고 이립이 가까운 청년이 있었다.
"누구시오?"
"혹시 단무견 맞는지요?"
"날 어찌 아시오?"
"단무전이 제 외숙공 되십니다."
잔월은 환대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모옥 안은 겉보다 훨씬 더 초라했다.
"무전이 그 후레자식이 갑자기 편지를 보내 우리더러 도망치라고 하는 거야. 난 손이 둔해서 의술을 배우지 못해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급하게 도망가느라 땅도 싸게 팔았다. 여기 와서 사기당해서 겨우 황무지에 농사지으며 입에 풀칠한다. 네 외숙이 저 나이에도 장가 못 가고. 어휴."
"그러니까 외숙공이 부귀영화 누리겠다고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을 못생긴 부자한테 시집 보냈다고요?"
"그래. 중원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이었어. 그래도 돈이 많아서 그런지 하인은 잔뜩 데리고 다니더라."
강릉에 땅을 마련해준 게 단무전이었지만, 단무견은 자기 동생을 곱게 보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차남인 단무전이 집안을 쥐락펴락했다.
"그럼 혹시 제 모친은 보신 적 있습니까?"
"연향이? 강릉에 와서 반년 정도 살다가 사라졌지. 후에 편지가 와서 단무전이 어디 있냐고 물어서 화산 낙안봉에 산다고 답신을 보낸 적 있다."
"모친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제가 외숙공하고 아주 어릴 때 헤어져서요."
단무전이 일부러 안 알려줬다고 하면 큰 외숙공도 안 알려줄 것 같아서 어릴 때 헤어졌다고 둘러댔다. 다섯 살에 헤어진 거니 아주 거짓말도 아니었다.
"연향이 성이 뭐였지?"
"누나 이름이 묘연향이었죠."
잔월은 심장이 쿵 뛰었다. 연향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부터 두근대던 심장이 터질 듯 날뛰었다.
'독고경천, 묘연향.'
상관소혜와 혁중에게 들었던 독고경천의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를 맴돌았다.
'협을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는 남자. 모든 사형제가 진심으로 따랐던 남자. 불의를 보면 절대 참지 않는 남자. 미색이나 재물에 추호도 흔들리지 않는 남자.'
거의 광신 수준으로 상관소혜와 혁중은 독고경천을 찬양했다. 과장이 반 섞였다 쳐도 무척 훌륭한 사람이었고 저런 사내가 부친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가진 은자가 이것밖에 없습니다. 부디 사기당하지 말고 좋은 땅 사서 농사지으시고 외숙도 얼른 장가가세요."
"벌써 가려고?"
"외숙공이 몇 년째 소식이 없습니다. 외숙공도 찾아내서 함께 올게요."
"그래. 이 은자는 빌린 거로 하고 농사지어 돈 생기면 꼭 갚을게."
형편이 진짜 어려운지 어린 잔월이 건네는 은자를 거절하는 척도 안 했다. 외숙 단운은 드디어 장가갈 수 있다는 생각에 잔월 손을 꼭 잡고 거듭 감사를 표했다.
'존자한테 가서 사부 행방을 물어보자. 모친은 이미 시체를 확인했다고 하니 부친 생사만 확인하면 된다. 원수가 강하면 외숙공부터 찾고 아니면 복수부터 한다.'
새로 생긴 가족과 작별한 잔월은 경공을 펼쳐 밤길을 재촉했다. 빨리 돌아가서 하가장에 남았던 사람들이 어디로 피신했는지 물어보고 의부 의모에게 자신이 독고경천 아들이라고 알리고 싶었다.
殘月 잔월
尋根 뿌리를 찾다
- 작가의말
불이검은 이상한 놈입니다. 이름이나 외모 대신 굳이 별호로 사람 기억하겠다고 고집부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리고 이 고집이 가장 정상적인 부분이라는 게 충격입니다.
잔월이 드디어 자기 신분을 알아냈습니다. 슬슬 십수 년 전에 종남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볼 시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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