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외인·천외천
주원장을 따라 대도까지 온 이십오만 병사는 이리같이 질기고 호랑이처럼 용맹했다. 그에 맞서는 원나라 군대도 삼십만이 되었지만, 제대로 먹지 못해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피의 향에 취해 이성을 날려버린 병사들은 도망칠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눈에 보이는 적을 죽이려고 충혈로 따끔거리는 눈을 부릅뜨고 손에 꽉 묶은 칼을 휘둘렀다.
"폐하. 굳이 모험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 군의 우세입니다."
"황궁을 빨리 정리하면 아군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원을 몰아낸다고 끝은 아니니 취할 수 있는 이득은 모두 얻어낸다."
주원장은 원 황제 목숨을 취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북으로 쫓아내려고만 했다. 진우량과 장사성과 싸우며 손해가 꽤 컸기에 이미 패망이 정해진 원 상대로 큰 희생을 치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공손평천이 나타나는 바람에 원 황제가 도주를 포기했다. 주원장은 무림맹 고수들을 믿고 모험하기로 했다.
"그런데 옥면금강이라는 자는 어디로 간 거요?"
"편지를 받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안내를 맡은 팽궐기가 주저하며 대답했다.
"멸세교한테 공격받은 문파가 화산뿐이 아닌데. 설마 폐하의 안위를 무시하고 돌아간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러하다면 엄벌할 것이오."
유백온의 추궁에 팽궐기는 입을 쉬이 열지 못했다. 잔월에게 독심호리가 보낸 편지를 전했고, 잔월은 말없이 사라졌다.
마음 같아선 가문의 은인인 잔월을 두둔하고 싶었지만, 잔월이 진짜로 화산으로 돌아간 거라면 팽가도 연루될 수 있다.
"잔월은 아미파 문외제자요."
백원선사가 나직이 말했다.
"무당에서 가르침을 많이 받았지."
장군보가 보탰다.
"나랑 친해."
취접도 거들었다.
"개방 집법 장로요."
전칠의 말에 엄복룡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유기, 국법을 어기지만 않으면 우린 강호에 간섭하지 않는다."
주원장의 말에 유백온이 고개를 숙였다. 주원장의 모사인 유백온은 멍청이가 아니다. 일부러 자극하여 반응을 보려던 것이지 진짜로 추궁하려는 건 아니었다.
"두 분은 무림맹 소속이 아닌 거로 알고 있소."
유백온의 말에 당한백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잔월과 친합니다. 저기 취접과도 구면이고요. 백원선사 추천으로 동행했습니다."
"무극존자다. 잔월이랑 친해."
무극존자라는 말에 주원장도 자세히 훑었다.
"옥면금강이라는 자를 꼭 기다려야 하는가?"
"그건 아니오."
"그럼 원 황제와 공손평천 죽이러 갑시다."
고수들의 도움으로 주원장과 유백온도 높은 성벽을 날아서 넘었다. 빠르게 황궁에 도착한 일행은 활짝 열린 대문을 지나 곧장 대전으로 향했다.
"어서 오시오."
혜종은 푸짐한 인상에 살집이 넉넉한 사내였다. 열세 살에 황제가 되어 이미 삼십오 년 제위를 지켰다.
"멀리서 온 손님인데 대접이 변변치 않소. 음식은 내놓아도 안 드실 것 같고, 가무를 보일까 하는데 어찌 생각하시오?"
"객수주편(客隨主便 - 손님은 주인 편의를 따른다)."
키와 체형이 똑같은 여자 열여섯이 대전 중앙으로 나왔다. 머리엔 상아로 만든 불관을 썼고 목엔 여러 색의 보석으로 만든 영락을 걸었다. 상의와 연결된 통짜 붉은 치마를 입었는데, 치맛자락이 무릎을 겨우 가릴 정도였다.
금빛 실로 짠 상의를 입었고 어깨에는 구름을 수 놓은 천을 씌웠다. 허리는 환대로 꽉 졸랐고 소매가 짧아 팔을 드러냈다.
손에는 사람 두개골로 만든 듯한 물건을 하나씩 들었다. 이들이 자세를 잡자 열한 명 궁녀가 한쪽에서 악기를 연주했다.
"이 춤은 천마무(天魔舞)라고 하오."
주원장과 유백온은 아름다운 자태와 고운 춤 선에 매혹되었다. 특히 춤 실력이 뛰어난 셋에게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그때 등이 따끔하더니 시원한 기운이 흘러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무당에서 온 웃기 좋아하는 도사가 실실거리며 말했다.
"사람을 취하게 하는 사이한 춤입니다. 폐하께선 부디 저런 걸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춤을 추는 열여섯 무녀는 물론 연주하는 열한 명의 궁녀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혜종도 천마무에 취해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엉덩이를 움찔대고 어깨를 덩실거렸다.
"누가 공손평천이요?"
정신을 차린 유백온이 질문했다. 공손평천 얼굴을 아는 당한백이 대답했다.
"저자가 공손평천입니다. 뒤엔 아무래도 공손평천 손주들로 보입니다."
서른 명 정도에 불과한 주원장 일행과 마찬가지로, 공손평천 주변에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 공손가 직계로 보이는 청년이 열두 명 있었고 멸세교 고수로 보이는 자가 다섯 명 있었다.
혜종을 지키는 고수까지 합쳐도 이쪽과 비슷했다. 그러나 남궁가 무인들은 주원장과 유백온을 지키기로 했기에 정작 싸울 사람은 일곱이었다.
공손평천 손자들은 무공이 별로인지 천마무에 미혹되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 천마무를 추던 열여섯 무녀 중 하나가 손에 든 물건으로 소리를 냈다. 북과 비슷한 악기가 내는 소리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연주하는 열한 명 궁녀도 미친년처럼 악기를 두드리고 뜯고 난리를 피웠다. 그럼에도 춤과 곡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천마를 소환하는 천마무. 이젠 내가 천마다."
"당신이 말한 시련은 아직 살아있소."
"시련은 나를 만나는 순간 죽는다."
공손평천과 멸세교 고수의 대화를 들은 무극존자가 이마를 찌푸렸다.
'자기 말에 따르는 자들은 다 밖으로 내보내 각 문파를 공격하게 하고, 자기를 의심하고 반대하는 자들만 남겼구나. 무슨 꿍꿍이지?'
"천마는 세상을 멸망하려는 자요. 내가 보기엔 당신은 세상을 멸망하려는 게 아니라 차지하려는 것 같소."
멸세교 고수가 공손평천의 저의를 의심했다.
"증명하마. 내가 천마라는 것을."
말을 마친 공손평천이 손을 번쩍 들었다.
"방금 신께서 내린 무공이다."
공손평천이 손바닥으로 궁전 바닥을 때렸다. 퍽 소리와 함께 궁전 바닥에 또렷한 자국이 생겼다. 심마해에 있는 마흔과 마찬가지로, 사람 손바닥이라고 하기엔 너무 컸다.
그와 동시에 공손평천 뒤에 서 있던 열두 명의 공손가 직계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세상을 멸하려는 내 결심을 너희에게 알리려고 혈육을 전부 죽였다. 이래도 날 의심하겠느냐?"
서로 눈치를 보던 멸세교 사내들이 무릎을 꿇었다.
"파멸신의 화신 천마를 뵙습니다."
"시련을 죽이면 신께서 임할 것이다. 누구도 신의 발걸음을 막지 못하겠지만, 그 과정을 단축하려면 저기 있는 자들을 다 죽여야 한다."
무릎을 펴고 몸을 일으킨 사내들이 각자 품에서 피리를 꺼내 불었다. 가까운 곳에선 잘 안 들리고 오히려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잘 들리는 특이한 피리였다.
황궁 밖에서 수많은 기척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천 명 정도입니다. 고수는 얼마 없을 것 같군요. 제가 막겠습니다."
당한백 모습이 사라졌다. 당한백을 은근히 무시하던 남궁가 무인들이 깜짝 놀랐다. 암기나 던지는 가문이라고 당문을 얕보는 마음이 있었는데, 경공 하나만 봐도 하찮은 가문이 절대 아니었다.
"무공을 모르는 자는 물러나시게."
백원선사는 말 중간중간에 진언(眞言)을 섞었다. 귀에 들리지 않는 마음을 울리는 말이었다. 천마무에 취했던 무녀와 궁녀들이 황급히 대전을 떠났다.
원래는 황제가 명령하기 전엔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되지만, 진언의 힘에 눌려 다른 생각은 떠올리지 못했다.
"폐하. 저자를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거운 몸을 뒤뚱거리며 도망치는 혜종을 보며 남궁가 무인이 입을 열었다.
"저자가 도망치며 군사를 차출하면 오히려 희생을 줄일 수 있다. 꼭 죽여야 이기는 게 아니다. 천하를 다투는 싸움은 강호의 것과 다르다."
남궁가 무인들은 주원장과 유백온을 호위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무극존자와 장군보와 취접 그리고 백원선사가 공손평천을 합공했다.
전칠과 엄복룡은 멸세교 다른 고수들을 상대했다.
"고작 넷으로 되겠냐? 어서 옥면금강이라는 자도 불러오거라."
호위대 책임자 남궁창룡은 찌푸린 이마가 펴지지 않았다. 공손평천은 어마어마한 네 고수의 협공에도 여유가 만만했다.
오히려 못 미더웠던 개방 쪽이 우위를 차지해 둘이 다섯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실력으로 몰아붙이긴 하지만, 둘이 다섯을 상대하는 거여서 숫자를 줄이지 못했다.
'황제가 여기서 죽거나 다치면 남궁가는 멸문이다.'
주원장은 가뜩이나 천한 출신이어서 대신들에게도 은근히 무시당했다. 천하가 안정되면 마음에 안 드는 자들을 내칠 게 뻔하다. 전쟁이 끝나면 무신이 먼저 내쳐질 것이 분명하다. 남궁가와 같은 무인은 무신보다 더 먼저 내쳐질 가능성이 크기에 작은 실수조차 없어야 한다.
그때, 분위기가 변했다. 여유만만하던 공손평천이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퍽 소리가 다섯 번 울렸다. 전칠과 엄복룡이 상대하던 다섯 고수가 쓰러졌다.
"옥면금강이다."
잔월이 이름을 날린 무림대회 주최자가 남궁가였다. 그래서 남궁의 무인 대부분이 잔월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다.
공손평천이 뒤로 훌쩍 물러나서 황제 옥좌에 앉았다. 무극존자가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백원선사와 장군보의 수비 그리고 취접의 공격까지 합쳐서 겨우 공손평천과 평수를 이뤘다. 게다가 공손평천은 전력을 다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제안 하나 하지."
공손평천이 잔월에게 말했다.
"내 아들과 손자 모두 죽었다. 내 손녀 중 마음에 드는 아이와 혼인해라. 그러면 황위는 네게 물려주겠다."
"대단하오. 탄복했소."
잔월은 진심이었다.
"자기 손자까지 죽이면서 반대하는 자들을 설득했군. 여기까진 상상도 못 했소."
"잔월, 뭐 아는 거 있어?"
장군보가 질문했다.
"이틀 전, 난 독심호리 숙부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멸세교가 화산, 소림, 무당, 아미를 비롯해 십수 개 큰 문파나 가문을 공격했습니다. 남궁가가 있는 안경은 군대 삼만이 주둔한 덕분에 공격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단순히 각 문파 고수를 끌어내고 급습할 계획이었다고 여기기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무림맹이 뭉친 힘으로 각개격파라도 하면 오히려 전력을 노출한 멸세교가 위험한 상황입니다."
잔월은 공손평천을 마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공손평천은 강호의 적뿐이 아니라 멸세교도 없애고 싶어 한다고 추측했습니다. 왜냐면, 공손평천은 황제가 되려는 거지 천마가 되려는 게 아니니깐요. 그러나 멸세교를 없앤다는 게 멸세교 무인 모두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게 아닙니다. 일부만 제거하고 멸세교가 아닌 다른 형태의 무력 집단으로 변모하려 한 것이지요."
人外人 사람 밖에 사람 있고
天外天 하늘 밖에 하늘 있다
- 작가의말
천마무는 실제로 있었습니다. 원순제로 더 많이 불린 혜종이 유독 즐긴 춤입니다.
원순제는 주원장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보통 황제가 죽은 다음 익호라는 걸 하는데, 원혜종이 죽은 후 주원장이 순제라는 이름을 줬습니다.
천마무는 노출과 야릇한 몸동작으로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섹시 댄스라고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천마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부처에게 공양을 올릴 때 추는 춤이라고도 하는데, 손에 든 법기가 인간 두개골을 갈아서 만든 것이라는 썰이 있습니다. 사실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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